열왕기상 8:31-34 / 성전의 생산
성전의 생산
이근호
2025년 2월 2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31-34
(8:31)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8: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8: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최종 권위를 ‘성전에서의 기도’에 두자는 의식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면 우스울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최종 판단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옳고 그름의 최종 판단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까지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각오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즉 그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할지라도 그 결과까지 흔쾌히 수용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신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현상까시 수용하는 자아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최후의 1인자로 숭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잘못을 하든 잘 하든 그 어떤 경우도 본인이 알아서 해결할 마음 자세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철저하게 ‘개인을 숭상하는’ ‘개인주의 정신’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찾든 절을 찾든 아니면 평소에 급작스럽게 신을 찾는 것은 바로 ‘신전(神殿)에서의 기도’에 해당됩니다. 답답해서 신을 찾고 절대자를 찾는 경우가 있다할지라도 이는 자신의 ‘불안요소’를 반영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도리를 대해 보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신의 능력에 아부하고 호소하고 애걸해 보는 겁니다. 이것이 ‘소원 비는 식’의 기도입니다. 반면에 ‘성전에서의 기도’는 이런 개인주의를 철폐합니다. 성전에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존재만이 인정합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 열왕기상 8:33-34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죄를 지었으면 그 죄값으로 망하든지 아니면 심한 벌을 받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지었으면 성전에 와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 죄를 용서해서 이스라엘을 정상화시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성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게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개인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능력이 죄 사함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의 생산입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능력과 권세는 ‘성전이 갖은 깨끗함’에 근원이 있습니다. 이 깨끗함을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성전 안에 매번 ‘깨끗한 제물의 죽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단’은 번제단을 말합니다. 번제단은 제물을 죽이는 장치입니다. 여기에서 죽은 제물은 연기+재를 남깁니다.
다 태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물을 성전 밖에 쓰레기 장에 버려집니다. 그 중간에 피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 안까지 운반됩니다. 이는 제물의 파괴에 분해를 의미합니다. 깨끗함을 색깔이 나타낸다면 ‘흰색’입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통해서 ‘흰색’을 품은 백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성전의 있음에서 나온 생산물’입니다.
이것은 성전에서만 나오는 결과입니다. 이사야 1:18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성전의 깨끗함에서 발휘는 권세와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결코 인간의 기도나 인간의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신전에서의 기도는 기도하는 당사자의 노력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중간과정’임을 스스로 느끼면서 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중간이나 결과 양쪽으로 다 관계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특정한 하나의 관계의 정확도를 최대한으로 높이는 경우 다른 관계의 정확도는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원리’입니다.
인간은 중간 과정에 치중하므로서 결과는 미지의 것, 불확정한 것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중간 과정의 주인공에 자신이 주입되므로서 악마의 사주를 자처하게 됩니다. 악마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기도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해서 조언을 쉴새없이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성전에서의 기도는, ‘내가 누구이어야 하는지’는 재정립받게 됩니다. ‘주홍같은 죄가 이미 양털같이 희어졌음’이 된 결과로 성립된 자아임을 늘 확인받게 됩니다. 구약의 성전는 하나의 대상이 되지만 신약에 와서 성전은 이미 성도 자체가 성전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마치 기차 안에서 타고 기차와 함께 달리는 안목과 기파 밖에서 기차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구약에 성전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까지 성전의 활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서 생산된 것은 ‘남은 자’의 등장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또한 로마서 11:5-6에 보면, “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은혜일까요? 그것은 생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산물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다른 분이 지금 나 대신이 이 자리에 살고 계시다”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성도는 이미 죽어야 합니다. ‘이미 죽어서 하는 기도’가 바로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과연 어떻게 죽을까요? 히브리서 13:11-13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가짜 성전 말고 진짜 성전은 사건으로 발생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을 통해서 흰색의 능력과 권세가 계속 발휘되는 겁니다. 이 성전 안에서 죽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성도의 모든 개인적인 성향을 뚫고 예수님의 마음이 솟구쳐 올라오게 됩니다.
마치 잠수함이 물 위에 올라오면서 다른 인간들의 모든 행위와 성향이 다 사방으로 쓸려내려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찬미가 가능한 성전의 생산물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의 생산물로 늘 평안함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