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11-14 / 하나님 우편과 원수
하나님 우편과 원수
이근호
2025년 2월 2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1-14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따로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벌려놓은 일의 최종 의미는 ‘자기 의미’로 돌아옵니다. 심지어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이 받아들이므로서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 것도 실은 ‘자기 의미’의 확충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하는 핵심 요소만 취득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피를 받아들이면 구원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우편’이라는 개념이 별반 필요없어 보입니다. ‘하나님 우편’이라는 개념이 들어와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자체적인 일련의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서 오셨고, 스스로 출생하셨고, 스스로 죽으셨고, 스스로 부활하셨고, 스스로 승천하셨고, 스스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스스로 재림하십니다. 그래서 해서 수립된 것이 ‘최종적 의미’입니다. 일련의 순서가 없으면 최종적 의미가 완료되지 못합니다. 이런 순서 중의 하나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입니다.
이 ‘앉으심’으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원수를 포착하고 색출하고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원수를 발판으로 꾹 누르는 위치가 ‘하나님 우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자에 해당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6에서 최종 하나님의 원수는 ‘사망’이라고 나옵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어떤 아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으면 왜 죽습니까?”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것이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최종적 의미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최종적 의미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사망 안에 갇혀 있음에도 불과하고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살아나심은 인간들이 여전히 최후의 원수인 사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눅 24:22-24)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타난 뒤에 두 번째 나타난 경우를 말해줍니다. 이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저녁 무렵에 떡을 뗄 대 비로소 그들은 눈에 밝아져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예수님은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눅 24:30-31)
요한복음 20장 나오는 막달라 마리와의 대화에서는 더욱 심오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즉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인간 세계와 예수님과 단절이 발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종 원수인 사망을 이기고 벗어나 ‘살아 있는 자’이지만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인 사망에 매여서 죽은 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한 최종적 의미로부터 모든 인간들은 끊어져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최종적 의미를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미로서 중간로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들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으면서 살아있다고 우김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여전히 자기 살 궁리를 하고 희망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요 욕망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겠다는 것도 최종 의미가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 욕망이요 죄입니다. 요나의 경우, 요나는 분명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니느웨 성에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이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해서 자아의 의미를 포기하므로서 심판이 그들에게 이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나 선지자 자신이 삐져서 죽을려고 했습니다. 즉 요나는 여전히 자신의 의미를 포기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으로 자신을 끝까지 놔주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 부여하는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베드로는 그 천국의 열쇠를 소지하므로서 구원이 될까요? 요한계시록 3:7에 보면, 천국의 열쇠는 주님 자신입니다.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즉 천국은 천국열쇠마저 빼앗길 때에 비로소 성립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열쇠에 소지했다는 자아성마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비유’나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나 다 같은 취지입니다. 그들은 더는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무덤에 가 있는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행 2:34) 그리고 더 이어 말하기를, ‘하나님 우편’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는 마지막 때, 즉 모든 의미가 마감되었을 때에 성령이 이 사망을 뚫고 들어아서 ‘최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것이 발호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세례란 ‘하나님 우편’에서만 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최종적 의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 모든 법칙과 원칙은 무효가 됨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