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3:6-9 / 종교외 복음의 차이
종교와 복음의 차이
이근호
2025년 2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6-9
(33: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33: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33: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33: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기존의 시공간적인 지평으로 계속 이어져 간다면 지금 이스라엘 정부가 하는 것이 제대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최종성’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최종성’이란 모든 인간의 행함의 ‘끝’을 내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죄’로 마감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래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 ‘죄악을 사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데 있는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사한 상태’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악을 사하기 위해 어떤 상황이 필요하지요?
이 상황을 위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해서 무수한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등장했습니다. 이런 선지자 중에 대표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죄사함’을 위하여 어떤 공통적 내용을 담게 될까요? 이 사실은 구약의 범주 안에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언 해석에는 필히 ‘최종성’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최종성’에 입각한 해석이 마태복음 17:1-3에 나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하나님께서 이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하시고자 하는 최종적 과업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 그는 화산 속에서 40일 있다고 다시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들고 온 율법판은 불 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가 들었던 율법도 다 불 속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의 경우, 그는 죽으면서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쉽게 말해서 불 속에서 견뎌내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생각말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13에서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불 속에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는 어떤 불을 견디고 그 불 속에서 나오는 걸까요? 마태복음 3:11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나 예수님이 주시는 분인데 본인은 물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 하나 몰랐던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주시는 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세례 속으로 투입시키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12:49-50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방화범이라면 자신이 흩뿌려놓은 모든 불 지평에 자신도 집어넣으신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레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요청되는 자들만 그 물세례를 참여했지만 예수님의 불세례는 동네방네 다니시면서 온 천지에 불을 질러버리십니다.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와 엘리야나 예수님은 모두 불붙는 세상을 전제로 깔고 그 위에 말씀을 날리신 분들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스스로 반성하므로서 정립되는 그런 죄개념이 아니라 그 대신 의도적으로 죄개념을 유발하시겠다는 뜻을 펼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죄가 감해지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반대로 죄가 전반적으로 확대되는 효과를 보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희망’입니다. 인간들이 희망을 느끼는 것은 결핍 때문입니다. 이 결핍은 그동안 자아 구축을 위해 퍼부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과 ‘시간’과 ‘정력’입니다. 이러한 정성이 쌓이고 쌍이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 속에 생겨나는 것이 ‘한맺힘’입니다.
즉 오늘날 유대교는 이 한맺힘을 기도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한맺힘이란 그 내부에 담겨있는 결핍에 대한 분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하는 본심을 간절한 기도로 감추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율법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들고 나와서 이 약속대로 속히 이루어달라고 떼쓰는 겁니다.
바로 이 모습이 ‘최종성’이 누락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희망을 붙들고 사는데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언약을 받았지만 이들은 이 언약을 종교화시켰습니다. 즉 한맺힘을 푸는 체계를 갖춘 겁니다. 그들이 이것이 죄인줄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약속한 이 말씀은 다시 ‘언약 제공’으로 해결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 완성’으로 그 해결의 최종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2-3에 보면, “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자 인간들 각자 본인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믿음의 대상자는 여느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님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자기 한맺힘에 기초를 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 앞에서 죄로 드러납니다. 자기 한맺힘에서 못 벗어나는 그 죄인과 ‘다 이루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복음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늘 ‘죄인’되고 예수님은 늘 ‘다 이루신’ 최종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만이 하늘의 약속의 땅으로 소집됩니다. 이 복음 안에서 나의 결핍성과 한맺힘과 나의 소망마저 죄가 됨이 드러납니다. 이 관계 속에서 성도는 비로서 주님을 ‘위해’ 제시된 말씀이 주님에 ‘의해서’ 성취된 것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올리게 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결핍을 종교행위로 은밀하게 감추고 사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