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10 / 거룩한 배설물
거룩한 배설물
이근호
2025년 2월 1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0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배설물로 가득 넘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 의해서 살해사건이 일어나야지만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거룩은 모든 인간이 제조한 의를 거부함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자체적인 의를 생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저주로 보답하신다는 말입니다. 저영원한 저주가 인간에게서 쉴새없이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육신의 성경 때문입니다. 이 육신은 대대로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서 내려온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성인 남녀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말은 인간은 점차 발전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은 커갈수록 더욱더 더러워진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더러움이 놀랍게도 완전한 거룩과 완벽한 의로움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5: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에 못들어감’도 소개하십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못들어가면 갈 수 있는 남은 곳은 어디일까요? 지옥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상 삶이란 최종적인 목표점을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천국’과 ‘지옥’이 인간의 존재보다 선행(先行)하는 개념이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의 존재는 천국과 지옥의 분류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옥가야만 하는 자들은 복음이 들어오면 뱉아버립니다. 자기하고 안 맞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어떤 삶을 원하는 겁니까? 그들은 자기 삶을 자기가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이미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아니까 그것으로 온전한 선을 구축한 삶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미 시행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욥은 가정이 화목하고 건강하며 부유한 사람입니다. 욥은 이러한 축복이 자신의 선행과 온전함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욥처럼 생각한 사람이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모든 것이 무너지니까 다음과 같이 남편에게 제안합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이 몰랐던 바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자기 육신의 기초해서 볼 때 복이 아니라 실은 화(禍)라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의 육신에 문제있음을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서 건강과 재산과 가정 화목을 걷어내니 욥은 남은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분출하게 됩니다.
바로 이 육신, ‘죄 있는 육신’을 예수님을 품고 오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됨을 걷어내고 말입니다. 이럴 때 나타난 결과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마 27:46) 즉 인간은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선과 악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거룩을 생산하면 되지 않느냐로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잘못된 세계관입니다. 이미 선악의식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선악지식에서 기초한 ‘거룩’에서는 다른 거룩을 추호도 생각못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을 앞장 세워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건 악이다. 악한 것은 악이다. 이건 선이다. 선한 것이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더러운 것이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은 어떻게 마련되는 겁니까? 민수기 35:11-21에 보면, ‘도피성’에 관해서 나옵니다. 도피성이란 ‘살아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죽어 있지만 실은 살아 있는’가 같이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입니다.
우연이던 필연이던 어쨌든 타인을 죽인 자는 그 사회에서 살해 대상이 됩니다. 죽어야 될 자로 낙인찍힙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는 자들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나는 그 장소가 타지역과는 달리 ‘격리장소’가 됩니다. 이 격리됨이 곧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차별됨, 구별됨, 따로 격리됨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이승과 저장의 중간지역이며 제대로 된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살인의 표적이 되는 이 인물은 우연이 일어난 살인 사건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이것은 ‘거룩’이란 인간 손에서 점차 만들어져야하는 동사 개념이 아니라 이미 확정 난 선행하는 명사 개념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이 품은 죄악된 근원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악마를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육신을 기꺼이 즐겁게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전체는 그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그리고 사도는 말합니다.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고후 5:8) 이것은 덮쳐진 사랑에 미쳐야 가능한 일입니다.(고후 5:13) 이제 기존의 육신말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끝으로 중요한 것은 고린도후서 5:21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된 자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의 거룩’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맞쳐서 조정해내가시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육신을 갖고 아직 세상에 있는 한 악마에게 속고 있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을 즐기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만 살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상처를 발사하는 총기 되기 위해서 살려주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