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7:1 / 최종 궁
최종 궁
2025년 2월 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7:1
(7:1)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
솔로몬이 궁을 짓는 것은 솔로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유지의 일부 작업입니다. 아버지 다윗의 유지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겁니다. 솔로몬은 이 성전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왕의 궁을 13년 동안 지었습니다. 성전과는 딴 건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성전의 부속건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매사가 철저하게 아버지 다윗에 종속적입니다. 이는 곧 ‘다윗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에 종속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다윗의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도 받고 지배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원칙은 잠언 25:2의 말씀의 구현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즉 솔로몬이 앉아 있는 자는 일반적인 ‘왕의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언약’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언약’에서 이탈되면 성전을 사라지고 궁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왕궁의 자리보다 성전의 존재가 우선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다윗 언약’ 곧 성전의 보호와 지배를 받는 것처럼 백성들도 자기처럼 자신의 보호와 지배를 받기를 원합니다.
사실 백성들은 자기네들은 집에 살지만 왕은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궁에 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대단한 왕에서부터 보호와 지배를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건축을 통해서 자신의 뜻이 확장되기를 원한다’ 인간 신체의 포부는 눈에 보이는 건축 행위로 가시화되기를 원합니다.
왕은 백성들에게 있어 자신의 안녕과 안정을 보장책이기를 기대합니다. 곧 백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그 양보받은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복을 누린다면 이 복은 곧 백성들의 번영으로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비록 백성들 개개인의 집이 솔로몬이 왕궁처럼 화려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은 솔로몬 같은 영광에 대해서 기꺼이 인정할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본성은 안정적이고 대단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의 양심을 드러냈다면 하나님께서는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을 뜻을 드러내시는 데 그것이 바로 성전과 왕의 궁궐입니다. ‘화려한 궁궐’의 영광이 천국에 해당된다면 상시적으로 무서운 불이 피워있는 성전은 지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에 있어 지옥같은 성전이 없는 한, 천국같은 화려한 집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한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자신의 선조가 다윗 혈통이라면 출생 자체로서 마땅히 자동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면 왕궁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성전도 무너집니다. 성전 안에서 상시 피어오르는 그 저주의 불이 왕궁 및 이스라엘 전체를 불사르게 될 것입니다. 성전의 가치가 유지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다윗의 언약’에 자신의 전부를 바쳐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특혜를 받은 겁니다. 그것은 바로 ‘신체의 최종성’입니다. 인간 신체의 최종성이 두 건축물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면 이런 사실을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에게 있어 인간 신체의 최종성은 그저 죽음입니다.
즉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그저 ‘죽음의 표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집→무덤→스올(음부:죽은 자의 집합소)→지옥이 됩니다. 요한복음 11:1에 보면,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즉 이 세상 누구나 자기 동내에서,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1:17에 보면,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평범하게 사는 모든 자들이 평생을 해온 일이 자기 무덤을 건축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은 오로지 죽음들을 표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 가정’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여기서 ‘믿느냐’는 것은 ‘더는 너의 목숨을 네가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어가는 내가 나를 믿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옥같은 성전이 직접 움직일 때만 죽을 목숨이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다. 역대상 21:1-2에 보면, 다윗은 사단의 시험을 받아 이스라엘의 인구를 계수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려 7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대상 21:14) 그 다음의 하나님의 공격은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에 놀란 다윗은 예루살렘에다 제단을 쌓게 됩니다.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대상 21:26-
27)
이 제단에 ‘천사’도 있었고 ‘불’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전을 기반으로 천국같은 세계를 펼쳐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천국을 고대합니다. 이것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성전으로서 움직여서 찾아오십니다. 즉 ‘죽음을 네가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치 핀이 뽑힌 수류탄을 계속 평생 쥐고 있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1-2)
최종 하나님의 집이 바로 ‘성전+다윗의 자손으로서의 궁’입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4-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의 목숨을 찾으려 오신 분에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