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1:35-37 / 포도나무 언약

정인순 2025. 1. 1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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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언약

 

이근호
2015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35-37

(31:35)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31:36)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31:3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지킬 규정에 신경 씁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양보없이 지키시는 규정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연세계에 모범생을 심어놓았습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그것들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이 있어 그들 해와 달과 별은 어태껏 그 언약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언약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새언약을 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해와 달과 별처럼 빈틈없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이는 나라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새언약대로 움직인다는 이스라엘됨을 소원할 것이 아니다 왜 우리 인간들은 해와 달과 별처럼 하나님의 규정대로 살지 못하느냐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거저 주시기는 하지만 그 그저 주신다는 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점을 여지없이 다 폭로시키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가치는 다치지 않고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은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 살게 하셨습니다. 거기는 포도가 잘 자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보게 하십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2-4)

좋은 포도가 맺혀야 하는데 못 먹는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포도같은 피조물로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포도가 이스라엘을 만족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하기 위함인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창조주를 만족함에 방해하는 요소가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새언약에 가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1-32)

이 언약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언약을 파했다’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를 인간쪽에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새언약은 스스로 언약 파기와 그것이 곧 새약 완성의 내용이 된다는 점을 모두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2: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눅 22:17-18) 이 말씀의 의미는 새언약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끼어들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하시고 진행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단 언약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시간을 종결시켜 버립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최후의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새언약 내에 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시간의 끝은 어디일까요? 바로 ‘죽음’이지요. 인간들은 ‘죽음’을 최고의 실패 모습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죽은 망자에게 최대한도로 애우해 주는 것은, 아직 그런 마지막 실패에 도달하지 않아서 살아있는 자신을 여전히 희망이 유효하게 남아 있는 성공자로 자처합니다. 덜 실패한 자가 완전하게 실패한 자(망자)에 대해서 배려 차원에서 보상해 주려는 것이 장례의식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무덤입니다.

무덤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는 곧 인간이 ‘존재의 뒤편’을 못보고 있는 겁니다. 2001년에 루마니아 시골 여인이 자신의 장례식 관속에서 기절해 있다는 다시 깨어나서 자신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놀라서 관속에서 급히 뛰어나갔다가 지나가는 트럭에 받혀서 즉사했습니다. 이래서 그 여인은 그날이 역시 장례식의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 세계는 자신의 존재 뒤편에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 뒤편으로 나아갈 줄을 모릅니다. 막혀 있고 저지당합니다. 그래놓고서는 여태껏 자신이 평생을 최선을 다해 잘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제대로 살았을까요?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난 것을 제공하고 난 뒤에 알려진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하나님의 새언약 입장은 모든 인간의 존재 뒤편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어느 정도로 무지한 지를 본인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자꾸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져 삽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이 뭘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 5:13) 즉 맨 정신이 문제였던 겁니다. 사도의 제안은 주님이 주신 사랑에 미쳐버리는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존재 뒤편에 이미 주님의 사랑이 대기해 있습니다. 인간이 실패라고 단정한 그 죽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랑에 접근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망나니였나를 겪여야 합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 “하나님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나”하더라도 즐겁게 주님의 최종 사랑에 모든 것을 던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얼마나 하나님의 수긍하는지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