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1:21-22 / 부활의 빈 자리

정인순 2024. 12. 22. 19:38

 

음성 동영상

부활의 빈 자리

 

이근호
2024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21-22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이스라엘’ 앞에 ‘처녀’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그 어떤 남자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아본 적이 없는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사람들을 천국에 불허하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신명기 19:21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 즉 인간들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들 속에서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십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릴 때,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고 두 끼만 먹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 끼만 먹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느 인간은 두 끼에서 세 끼 먹는 것으로 스톱이 되는지 말입니다. 세끼에서 멈추는 인간은 없습니다. 놀려도 가야하고 더 고급스러운 식당도 찾아다니고 해외 여행도 형편만 되면 그 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을 구성할 권한이 없음을 말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복수의 한계를 말하는 겁니다.

분노가 일어난다고 해서 피해 입은 상황보다 더 가혹한 보복을 가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품은 분노는 원상회복으로 만족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가겠다’는 것, 즉 ‘나중에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욕망은 인간의 자기 주제 파악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천국가겠다든지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다 욕심에 해당되고 소용없는 헛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헛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를 통해서 필히 하나님 말씀은 성취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 7:14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즉 처녀로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있는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처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거론하면서 부정(否定)적으로 거론하십니다. ‘∼못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동안 자기 인생살이에 전적으로 의미를 실어서 살아온 니고데모에게 난감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남자의 후손들’의 한계입니다. 자기가 그동안 채워놓은 자기 인생을 여전히 견지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집대성으로 니고데모는 감히 천국 입성을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은 절망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자식’이란 기존의 ‘아담의 후손 노선’과 별개로 나타납니다. 이는 사람들이 손 쓸 수 없는 상황을 놓이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는 이루어진다’는 점을 중점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주 기도문’입니다. ‘주 기도문’을 완성된 양상이 그냥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 주 기도문을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우선 이방인들의 기도부터 언급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이방인들의 기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자들이 이미 ‘여자의 후손’ 출신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항상 결과적인 생성자로 활동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처녀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녀 마리아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관여할 수가 없이 결과적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담의 후손들, 즉 사람들이 끼어들지 않고 천사가 관여하는 인생을 새롭게 맞이해야 했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0-31)

인간은 모르고 천사는 아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의 부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1-13)

두 천사가 고정적으로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경우는 법궤 위 천사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결코 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공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천사의 위치 배정을 보게 되면 한 천사는 머리맡이요 다른 천사는 발 쪽입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여기 누워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천사에 의해서 범위지워진 그 빈 자리가 실은 온 역사를 다 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인 마리아 눈에는 그 자리는 비워있는 양상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에게 빈 자리를 만들지 않고 낭만적인 자신의 행함으로 꽉 채워넣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기껏해서 ‘자기를 위한 자기 인생’에 머물고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친히 성취해내신 말씀이 늘 팝콘 터지듯이 터지는 공간이 됩니다. 내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신 주님의 인생이라는 이것이 ‘여자의 후손의 노선’에 해당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을 모조리 뭉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