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1:15-16 / 라헬의 본질

정인순 2024. 12. 15. 16:10

음성 동영상

 

라헬의 본질

 

이근호
2024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5-16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31: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마는 유대민족의 포로가 바벨론으로 포로잡혀가는 길목이자 집결지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이스라엘의 쓸만한 인재들이 적군에게 잡혀가서 영원히 살던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단순히 고향을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살던 땅은 조상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한 데서 벗어나 비로소 마음껏 노예로 대우받지 않는 정복자의 삶을 살게 해준 땅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변에 인간들을 상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같은 인간들을 상대해서 그들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지키고 싶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을 좀 살만하기 하나님을 치워버린 겁니다. 그저 살던 땅은 어떻게든 지켜주시겠지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어떤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 있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혜택받을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하나님의 희생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에 상처가 주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타민족에게 분노하기 이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분노하십니다. 슬픈 하나님의 마음은 곧장 이스라엘 민족에 슬픔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속 마음이 어느 정도로 슬픈지 그것을 이스라엘도 같이 겪여야 합니다. 이는 일종의 역주행과 같습니다. 평소에 그들은 이방민족을 공격해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공격했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 방식은 하나님께서 옛적의 포로생활을 재현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적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이 되고 그 적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의 이스라엘이란 도대체 뭔가’를 재정립하는 기회가 됩니다. ‘라헬’이라는 표현은 야곱의 아내 이름이면서 야곱의 나라의 운명을 반영해 주게 됩니다. 전체 이스라엘이 당하는 바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종속된 가족들도 같이 슬픈 일을 겪는 겁니다.

이러한 슬픈 일의 본질은 창세기 35:16-19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벧엘에서 베들레헴으로 내려가는 길에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이 죽습니다. 그런데 그 라헬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생산과 관련을 두고 일어난 슬픈입니다. 아이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발생되지 않을 일입니다. 라헬은 자기가 낳은 자식과 죽어가는 자신과의 분리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습니다.

‘슬픈의 자식’이라고 자신의 심정을 담아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즉각 그 이름을 바꿉니다. ‘슬픔의 자식’에서 ‘오른손의 아들’로 바꿉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어미의 죽음이라는 슬픔의 환경에서만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은 희생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슬픔의 원리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내부에 살아있어 이 내부를 본질을 갖추어져야만 완전한 이스라엘이 성립한다는 겁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 아니라 ‘아들을 인해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서 당했던 그 환경을 공유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완전한 이스라엘로 나아가는 노선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아기 예수님의 출생과 더불어 주변에 슬픈 일이 같이 일어나는데 이 관련성을 갖고서 ‘라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6-18)

베들레헴이 기거하는 백성들 중 2세 이하의 남자 아이들이 몰살당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연관해서 이러한 불상사가 계속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불순함 때문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희생당해야 하고 이 본질에 같이 참여되는 자만 구원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미리 예수님을 모시고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위해 불행한 사태를 유발하거나 각오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희생과 불행을 짐작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사 52:13-15)

이렇게 되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사전에 하나님의 아픔을 모방하고 흉내내려는 모든 순교 시도는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의 효과로서 구원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고난이 자기 구원에 밑거름이 되고자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을 옆에서 시중드는 이 엄청난 자리를 얻은 것이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이 시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놀라야합니다. 이 놀라움이 그동안 세상에 친숙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을 가볍게 포기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신앙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고난이 얼마나 어설픈 것임을 자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