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1: 7-9 / 구원 장치

정인순 2024. 12. 1. 16:40

음성 동영상

 

구원 장치

 

이근호
2024년 12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 7-9

(3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31: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31: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손’은 전부 예외에서 거룩한 민족이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하는 구원백성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주도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을 마치 우리 ‘인간이 구원을 따낼 수 있다’로 오해하면 아니됩니다.

참으로 구원받는 백성이 누구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점차 일을 벌려가면서 구체화됩니다. 동시이 인간들의 선입견과 어떤 식으로 불일치를 보여주는 지도 나타납니다. 인간들의 오염된 데이터로 인간의 뜻과 마음을 알아 차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일치는 당연합니다.

어떻게 되었든 구원은 분명 혈육적 혈통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혈육적 혈통을 배제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그렇다면 같은 혈통이라도 어떤 이는 구원되고 어떤 이는 구원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기준은 어떻게 지정되고 정해질까요? 그것은 혈통에서 끊어져 둘이 되면 그 사이에 절단면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절단면이 무엇인지 알면 됩니다. 혈육에서 떨어지게 되면 누구나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물과 하나가 된 채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내 물건에 손되면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 중에서 제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가족관계입니다. 가족끼리 싸울 수는 있어도 타인이 내 가족을 건드리면 힘이 합하여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결속이 강한 가족까리 영원히 갈라서는 상황이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을 겁니다. 나중에 사도가 되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 외지에 사는 유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과 결코 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혈통적으로 같은 유대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사상적으로도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합치된 견해로 뭉쳐져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울은 자신, 아니 자기 민족이 신봉하는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심정에서 예수라는 이단을 믿는 자들을 정리해서 없애는 일에 나서고자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휘황찬란해 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핍박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전에 가졌던 자기 견해가 오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 광채로 인하여 사울은 그는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집에서 간호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사울은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즉 사울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 달라진 변화를 넉넉히 소화할 수 있는 눈을 장착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겁니다. 예수님의 혈통을 따르게 되어 자연적으로 이 주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남은 혈육과는 차이화가 생긴겁니다.

이렇게 사울이 소개하는 새로운 가족은 로마서 8:14-17에 나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대목에서 처음에 모든 인간들은, 어떤 혈통을 가졌든지 하나님 안목에 보면,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 죄의 특징은 뭐든지 무서움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무서워할 까요? 이점에 대해서 구약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의 경우를 통해서 일아보면 됩니다. 요나 4:9에 보면,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 4:7-9)

요나는 고국, 이스라엘에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계시와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 차이를 느끼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기 지식과 진리에 차이가 나버린 겁니다. 니느웨성은 분명 40일 지나는 멸망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요나 선지자는 자기 말에 대해서 본인조차도 자신감이 없어진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로 할 수 있는 게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자기 마음 안에 혼선이 발생된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가 바로 요나 선지자 본인에게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의 잘못은 자기가 생각한 자아를 위하여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자기에게 가져온 겁니다. 하지만 멸망의 대상이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소식이 즉각적으로 그들 마음 내부에 자리잡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장악당한 겁니다. 다시 사도 바울에게 돌아와 봅시다. ‘무서워 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를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영을 받았다가는 것은 더 이상 지킬 자아가 자신에게서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혈육에서 분리된 절단면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는 바로 자신에게 성령을 주신 그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감사함으로 갈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 자신이 자립적으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히 주님에게 한 가족으로 의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나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살게 된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끊어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가신 고난 속에서 하나됨이 확인됨을 알게 아홉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