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상

열왕기상 2:21-25 / 다윗의 여인

정인순 2024. 11. 27.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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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여인

 

이근호
2024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1-25

(2:21) 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2:22) 솔로몬 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2:23)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24)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저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아버지의 여자였던 아비삭을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를 달라고 합니다. 이게 과연 굳이 하나님께 맹세코 죽을 죄인가요? 안 주면 그만이 아닌가요?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근본적으로 다윗의 왕가 자체의 본질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솔로몬은 다윗 왕가의 정신에 도전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도니야의 이런 행동이 다윗이 겪였던 왕 직위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의 왕되심의 언약적 취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요청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생명을 이 지상에 남기시는 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과실 보호에 집중하십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틈타지 못하도록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 없음’의 현상이 어떤 저주를 낳는지 땅에서 겪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사는 모든 인간은 ‘생명은 없음’이라는 차원에서 실은 모두 죽은 자입니다. 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편 27:1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죽어 마땅한 이 땅에 왠 ‘산 자의 땅’이 생겨나는 걸까요? 산 자들만 따로 모여 사는 땅을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죽음과 저주 밖에 없는 이 세상에 ‘산 자의 땅’을 따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출발되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다윗 관계에서 ‘산 자의 땅’ 구체적으로 수립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찾아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붓게 합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그런데 이 일이 대단히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엄연히 그 당시 이스라엘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고 사울 왕가가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과의 전쟁 승리 이후에 사울왕은 노골적으로 다윗 제거에 돌입합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0에서는 아담의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산 자의 어미’라고 규정받게 됩니다. 죽음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아담의 여인을 통해서 생명되시는 분이 출생한다는 겁니다. 바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원리를 적용받게 됩니다. 즉 다윗은 사울왕의 여자로 인하여 죽게 되고 여자로 인하여 살게 됩니다.

사무엘하 12:7-8에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모든 일의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셨다는 겁니다. 이 일에 ‘다윗의 여인’들이 관여합니다.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마음에 들어서 다윗과 혼인하고 싶어했지만 이 혼인으로 인해 다윗은 위험 속으로 떠밀리게 됩니다. 장인인 사울왕이 혼인을 빙자해서 다윗을 죽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 전쟁하여 남자 양피 100을 가져와서 왕가의 사람다운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 핑계삼아 사울왕은 정치적 적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전쟁에 승리해서 조건을 충족시키자 자기 딸 미갈과 혼인이 시켜주지만 신하들에게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겠다는 의사를 드럽니다.

목숨 부지 하기 힘든 다윗을 구사일생으로 구출시킨 자는 사울의 딸 미갈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삼상 19:12-13) 결국 다윗은 왕이 된 뒤 다시 만나 미갈을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갈은 사울왕가의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언약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다윗성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신하가 되어 하나님께서 친히 왕되심을 찬양을 올리고 춤을 춥니다.

이 모습을 창으로 내다본 미갈은 자존심이 매우 상하게 됩니다. “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단호하게 미갈에게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1-23)

미갈은 살아 있다가 하나 실은 죽은 여인으로 규정받게 됩니다. 다윗의 후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일종이 피해자로서 반란자인 압살롬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욕을 당하게 됩니다. (삼하 16:22) 그러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다윗은 10명의 후궁에 대한 조치는 이미 죽은 여인으로 취급해서 죽을 때까지 생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삼하 20:3)

그것은 죽음에서 살아남의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자(합살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서 살아도 더는 산 자로 아닌 자로 전시하는 겁니다. 오늘날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이후에 구원된 성도는 매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증거 수집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과 같은 겁니다.

다윗 입장에서는 더는 동침할 필요가 없는 여인 아비삭을 통해서 ‘다윗 위상의 완료’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감히 자신을 산 자라고 여긴 아도니야는 아비삭의 존재를 자기 소유와 엮어서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당연히 죽어 없어져야 될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현 자리는 자신이 쟁취한 자리가 아니라 다윗 언약이 작동하는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들이 죽어가면서 생명을 생산하는 설비라는 입장이 된 것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