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0:12-17 / 상처
상처
이근호
2024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2-17
(30: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30:13)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30:14)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너를 징계함이어늘
(30:15)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30:16)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처는 험담을 듣게 되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 파급됩니다.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선지자에게 대듭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상처가 돌아가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간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정립하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요령이라는 게 있습니다. 타인에게 있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게 보이고, 반대로 자신의 치부를 얼마나 교묘하게 감출 수 있는가를 감안해서 삶의 기술을 연마하고 터득해 왔던 갑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실망스러운 미래상을 부여받게 됩니다. 당연히 마음에 상처를 받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주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이 받으실 상처 안에서 새롭게 구상해서 끄집어낼 새로운 완전한 이스라엘이 따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처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인간들 아이디어서 나온 모호한 하나님의 이미지하고는 결별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주시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인간들은 세상을 살면서 재미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세상 재미일까요? 그것은 타인에게 자랑할 게 있다는 것이 세상 사는 재미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대해서 내세울 게 없으면 살 맛이 나지 않고 지루해집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타인 앞에서 별 볼일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상처를 입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 편이고 자기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자부심을 갖는 동시에 평소에 인간 본성에 나오는 사는 재미까지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비축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도리어 된통으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철석같이 하나님만을 믿고 쳐다보고 사는 이스라엘에서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차라리 예레미야 자체를 참된 하나님으로 오신 선지자가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선지자 본인이 백성들로부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자,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었던 겁니까? 신약에 와서 전반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인간 평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0-11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전제로 신약을 봐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 땅’이란 바로 먼저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바로 ‘영접지 아니했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못 알아보고 영접아니했다 는 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그 누구도 구원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신은 자기쪽에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접을 하던 주님의 이름을 믿던 하나님의 자녀가 되던 그 모든 것은 결코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난 자들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그들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결코 믿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식으로 그들의 역사는 몰락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은 이사야 10:5에 보면,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 반 담임선생님이 자기반 아이들을 때리는데 옆집 반 아이를 동원해서 때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옆반 아이들은 얼마나 자만을 떨고 교만스워하는 지를 보라는 겁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실제로 이사야 36장에 보면, 앗수르 군대장관이 유다나라에 쳐들어와서 성밖을 포위한 뒤에 예루살렘 성 안으로 날려보내는 발언이 나와 있습니다. 이 발언은 고스란히 하늘에게는 녹음이 다 되어 있습니다.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사 36:7-8)
오늘날 이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는 자들을 향해 날리는 이 조롱의 발언을 듣게 되지만 실은 그들의 발언을 수시로 우리 내부에서 늘 올라오는 발언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은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장담했습니다. “나는 보지 않고는 안 믿는다”
이때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로 주님의 상처였습니다. 부활의 능력, 부활은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에서 나옵니다. 아무도 구원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부활이 나오므로서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주님의 상처가 삽입되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인식이 곧 부활의 능력입니다. 더는 자기 자랑으로 세상 살지 않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무너짐을 이제는 안타깝게 여기지 말게 하시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