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8:3-5 / 모형

정인순 2024. 11. 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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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 

 

이근호
2024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3-5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모형과 그림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타민족과는 달리 ‘모형적 민족’이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들 민족 안에서 성막이 있고 그리고 거기서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를 내고 육체는 태워지는 율법적 작업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막이 없는 이방민족은 어떻게 될까요?

에베소서 2:12-13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민족에 대해서 아예 ‘하나님이 없음’으로 단정짓습니다. 그들 이방민족은 하나님이 없기에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곧 ‘나는 결코 누구의 모형이 아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 누구의 모형으로 살기 싫다. 나는 나로서 살고 싶다’를 주장하는 겁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문학이나 과학이 발달된 겁니다. 그들의 모든 업적이나 노력은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5:12에서는 달리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최초의 사건에 주목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자, 죄의 왕노릇의 사례나 경우는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현대 유전생물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DNA의 두 가닥 가운데 한 가닥이 풀어져 따로 나와서 m-RNA가 됩니다. 이것이 핵 밖으로 나오면 핵 밖은 세포질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소포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단백질 합성 공장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리보솜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집니다. 만드는 방식은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레시피라면 그 레시피대로 핵산의 염기 중 세 가지를 한 조를 이워서 단백질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을 지정하게 됩니다. 서열순서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아미노산의 서열은 단백질의 기능과 연결됩니다.

리보솜은 이 아미노산을 이어붙여 폴리펩타이드(나란히 연결형) 사슬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분자의 전기적 성질에 의해서 접히고 말려서 단백질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자체적으로 에너지 안정화를 추구하고 구조를 갖추고 이 구조의 차이에 의해서 단백질은 모양의 기능을 갖추게 됩니다. 1차원적 염기 서열이 3차원적인 단백질의 입체적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즉 ‘서열→구조→기능’이 되는 겁니다. 생물학에서 이런 연구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처음 아담과 얼마나 다른가를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즉 부모의 속성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근소한 차이나마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보다 진화된 오늘날 자신들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즉 인간은 뒤로 돌아갈 줄 모릅니다. 존재의 배후, 존재의 뒤편에 뭐가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저 보다 인간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데 유리한 존재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누구의 모형이기를 강력하게 선천적으로 거부합니다. 이 선천성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사건으로 비롯됩니다.

최초의 사건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인류의 역사가 진척되어 왔습니다. 그 최초의 사건은 다름 아닌 ‘인간 자체가 모형’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

여 본문에서 모형이 아닌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반면에 모형인 자는 아담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머지 모든 인간 존재는 아담의 복제물입니다.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담만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단일 모형인 아담의 사건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모형과 실체 사이에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로마서 5:16에 보면,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로서 의로우심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와 사망은 선물이 아니라 아담의 행위 하나로 자동적으로 덮쳐져서 그 아담 안에서 인간은 출생하고 짝짓기하고 살다가 결국은 몽땅 죽게 됩니다. 모형과 실체가 같은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사람의 행위가 결과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분의 의로움으로 끝나는 것이다는 점에 모형과 다른 점이지만 그것이 은사로 주어져 다수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입니다.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따라서 성도는 존재의 뒷쪽으로 가야합니다. 거기에는 오늘날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모형 안에서 우리는 결코 의로울 수 없음이 결정났기에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본래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런 죄인이 하늘나라의 실체가 합류되기 위해서는 생명되시는 주님쪽에서 움직이십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5-7)

주님의 일방적 사랑으로 인하여 합류가 되는데 이를 위해 주님은 스스로 인간에게 버림받는 발에 덮힌 때만도 못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일방적 사랑을 받은 자만 압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

우리가 어떤 형편에 쳐해있든지 모형을 실체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멈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끈질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는 존재에 현란함에 우리가 스스로 속아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