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0:8-11 / 다윗 언약의 시공간 / 주일 오후 예배

정인순 2024. 11. 3. 16:17

 음성 동영상

 

다윗 언약의 시공간

 

이근호
2024년 11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8-11

(30: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30:9)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30:10)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30: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무슨 대책을 세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친히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갑니다. 인간들은 자기네들 아쉬운 것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당연히 하나님보다 도와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개인 위주가 아니라 새로운 ‘우리’가 조성하려고 하십니다. 즉 개인 위주로 살다가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 도로 다른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는 결코 개인 위주는 용납될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밖에 모른 식으로 사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삭제가 가능한 채로 약속의 땅으로 도로 들어올 수 있겠느냐하는 겁니다. 우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해서 과연 ‘자기 위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자기 위주’가 아닌 태도로 이해하는지로 나뉘어집니다.

그 약속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윗왕’은 옛날에 70세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이 다시 살아난다구요? 여기서 우리는 ‘개인 위주’로 해석하는 것과 개인 위주로 벗어난 해석하는 것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이 살아있는 식으로 ‘우리’가 아니라 ‘나’가 삭제당한 채로 구성되는 것이 ‘우리’가 되려면 삭제당하는 그 나를 대신할 초월적 ‘나’가 따로 마련되고 나머지 ‘우리’의 각 구성원들은 그 초월적 자아와 ‘우리’라는 자격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초월적 나’는 시공간적으로도 개인이 느끼고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능가하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비록 죽었지만 죽은 다윗 안에, 다윗이라는 개인을 능가하면 초월적 다윗 존재가 있어서 그 다윗은 부활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 자손의 부활’ 혹은 ‘다윗 언약의 영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약이란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겁니다. 비록 노아의 가족들도 다 물 속에 빠져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시적인 언약체 방주를 만들게 함으로서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이미 노아 가족은 이미 죽은 자로서 자신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삭제’를 통해 언약의 살림이 증거 가능합니다. 다윗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므로서 다윗 언약이 주어지고 내내 그 자체에 시간이나 공간이 ‘개인’은 버리고 ‘우리’를 새롭게 살리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나→우리’가 가능한 기능을 위한 낯선 시간과 공간이 다윗 언약이 진행되면서 펼쳐집니다. 우 선 공간적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일 같은 겁니다. 결코 물맷돌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물맷돌로 이겼다면 골리앗에게 이긴 후 전 이스라엘 군대를 물맷돌로 무장시킬 겁니다.

시편 8편에서는 소년 다윗이 전쟁을 이긴 이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1-2)

하나님의 전쟁의 참전자는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마치 전혀 내세울 것없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처럼 말입니다. 승리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자아 삭제의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인간 자신이 알아서 자진해서 포로된 데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삭제가 된 채로 돌아와 ‘우리’ 안에 편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시간과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을 설명하면서 어느 임금의 자기 아들 혼인잔치를 알리고 백성들을 초청한 대목이 나옵니다. 개인위주로 살던 일반인들은 자신의 다급한 일을 제처두고 임금이라는 타인의 행사에 참석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임금은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데리고 와서 혼인잔치를 참석케 하라고 임금은 종에게 지시합니다.

그런데 혼인잔치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내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임금의 인식과 동일한 공통의 자리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1-13)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
14) 즉 자기 의식을 유지하면서 천국에 합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자기 의식으로 무장된 것은 천국의 예복도 가리지 않는 그 한 사람은 천국에 강제 퇴장 당한 겁니다. 이번에서 다윗 언약의 새로운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24:14-15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 주인은 먼 타국에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섯 달라트와 두 달란트 받은 직원은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간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재 같이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일합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직원만이 주인이 먼 타국에 간 것을 여깁니다. 자기 의식에 무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올 때에 그래서 고이 간직한 주인의 것으로 도로 내어놓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분노합니다. 그것은 악한 종이 자기 위주의 시간 의식으로 무장된 채 그동안 감히 주인의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복음의 ‘다 이루심’이 주입되어 자신이 이미 주님과 새로운 시공간함을 느끼는 자라야 가능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위대하는 쪽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