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8:1-2 / 빚진 종

정인순 2024. 11. 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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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종

 

이근호
2024년 11월 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1-2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8: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제사장은 자꾸만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지만 막상 메시야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습니다. 이로서 두 층의 의미-무의미가 성립됩니다. 하나는 시간 속에 있는 인간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은 대제사장의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라 제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하는 장소도 성막과 성소입니다. 이 성막과 성소는 창세기 2:17에 나오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사실을 집결해서 공간화한 곳입니다. 물론 이 성소 외부에도 당연히 ‘정녕 죽으리라’가 맹렬하게 작용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들이 죽어가면서 왜 죽는지를 모르는 곳입니다.

반면에 성소는, 인간이 죽는 이유가 하나님의 율법 위반으로 성립된 결과임을 시각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활동만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활동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인간들 속에서 의미있는 그 대제사장의 존재도 메시야 앞에서는 무의미로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히 8:3-4)

아직도 뭔가 하늘을 향해 드리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임을 반복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계속해서 양이나 소나 염소나 비둘기나 곱게 갈은 곡물을 제단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제사장마저 무의미하다면 나머지 모든 자도 무의미합니다.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의미있는 것으로 여기고자 애쓰는 이유는, 자기 쪽에서 행하는 의미있는 그것으로 하나님과 천국을 붙잡을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 와서 하나님 믿고 그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자신이 보다 향상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쓰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깨끗하고 진심어린 영혼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진심이나 솔직함은 도리어 진리의 반대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정녕 죽으리라’의 평가에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이 힘으로 비축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줄곧 자신을 신뢰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자기가 보기에 신뢰할만한 자가 되기 위해서 평소에 신뢰할 만한 것들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앞길을 열고 가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생각의 틀은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생각의 틀을 무엇일까요? 로마서 11:33-36에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렸다는 그 행위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럴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조차 비축될 힘으로 여기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약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인간들의 기본 틀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찾아들었습니다. 이 찾아드는 과정에서 이 인간 세계 자체가 죽음의 힘으로 가득찼기에 생명되시는 주님께서도 이 땅에서는 죽음의 속성을 나타내면서 나타났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조성된 나라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관계로 하나님에게 묶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55) 즉 죽어야 하는데 종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종에게 무한한 빚을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값을 치르고서 노예를 사오듯이 말입니다. 이 빚은 감히 인간들이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 빚을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전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경악스러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베드로도 평소에 주님과 생활하면서 자기 존재쪽의 허무함을 모르고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자기가 삭제된 채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발굴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삭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질문을 했습니다. 무한한 세계란 단순히 탐구하고 찾아간다고 해서 도달될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무한한 빚은 진 자가 종이라는 인식이 기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 18:32-34) 즉 내쪽에서 하나님과 관계설정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죄가 발굴되어 주님과 종의 관계에서 무한한 은혜에 대한 빚을 있음을 인식하는 자가 천국 백성입니다.

이 빚은 값은 인간쪽에서는 값없이 탕감되고 예수님쪽에서는 인간쪽에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생명으로 그 값을 갚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값없이 하나님의 것이 된 것에 대한 감사마저 나의 힘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