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7:23-25 / 락에 걸린 인생
락에 걸린 인생
이근호
2024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23-25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을 하나님쪽에서 먼저 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제사 시스템에서 제사장들이 계속 해서 죽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답은 인간들의 일상에서 얻고 싶거나 듣고 싶은 답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듣고 싶은 답은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데 유리한 것을 듣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시한 답은 존재나 인물이 아니라 직책입니다. 직책에 강저되고 부각되기 위해서 존재는 도리어 모호해야 합니다. ‘존재가 없다’가 아니라 ‘존재가 모호하다’입니다. 소위 ‘비(非)-존재’입니다. 있는 듯 하지만 일반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자, 그분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의 비-존재 안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미리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즉 멜기세덱의 직책과 기능이 완수될 때에 그 혜택을 입을 자들이 미리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 직책이 무엇일까요? 그 직책이 바로 제사장직입니다. 제사장직이란 특이한 죽음을 늘 생산하는 일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특이한 죽음 생산’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이미 락lock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자물쇠에 채인 상태요 갇힌 상태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늘 자기 존재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나 어떻게 하면 멀쩡하게 건강하고 여유있는 살아남느냐’입니다.
이런 생각은 멜기세덱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존재하는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존재에 신경 쓰는 것은 본인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아예 조상들 대대로 내려오는 그 죄 상황에 갇혀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유도 모르는채 인간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고 소멸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나는 왜 죽을까”에 대한 질문조차 안합니다. 그리고 같은 인간들끼리만 그리워하고 찾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존재에 대한 끈질김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존재 지탱방식은 이러합니다. 자기에게 남아 있는 에너지를 사회에 투자해서 거기서 얻은 이익으로 자기에게로 비축하는 식입니다.
이것을 ‘일상생활’이라고 합니다. 이 일상생활이 악마로 인해 락에 걸린 것은 악마가 인간들을 자기 몸 안에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악마 배 안에 다수의 인간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염소와 늑대 이야기]와 같습니다. 엄마 염소가 없는 사이에 늑대가 아기 염소들에게 찾아와서 집안에 들어가서 6 아기 염소를 다 잡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포만감에 늑대는 깊이 잠들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집에 도착한 엄마 염소가 아기 염소 6를 찾다가 늑대 배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칼로 그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있는 자기 새끼 6을 건지고 그 배 안에 돌로 가득 채워서 늑대를 물 속에 쳐넣어 죽였다는 동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늑대는 몇 마리인가?” 일곱이지요. 큰 늑대 안에 다수의 늑대입니다. 악마 안에 다수의 인간들입니다. 유다서 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악마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제사장 언약 코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시체를 빼돌리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는 그동안 악마의 기준에 준해서 죽는 죽음이기를 악마가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반면에 미가엘은 모세의 시신을 언약이 작동되는 그 시스템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으니까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하는 자들은 비록 잠시 악마 품에 있다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신 분의 능력으로 강제로 자기 품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해내지 못합니다. 조상 아담에 락이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인간 노선의 마지막에 ‘사람의 아들’로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최후의 자식으로서 선조의 사정이 다시금 정립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 안에 갇혀 있음’으로써 필히 늙어 죽어야 합니다. 이들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이것이 제사직의 완성입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게 걸린 죄의 자물쇠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참으로 제사직책으로 끌린 자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특이한 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보통 불신자라면 악마가 걸어넣은 락에 의해서 다음과 고백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바르게 살아야 하고 나쁘게 행동하지 않아야 돼. 그래야 내세 좋은 결과가 나올거야”라고 말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자기가 넘어설 수 없고 도로 자기에게로 돌아와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관된 제사직에 저를 맡깁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 사정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부렸다면’ 여기에 반드시 이 세상은 악마가 훼방과 땅 속 돌이 방해하고 가시덤불이 방해해서 씨의 열매는 맺힐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사단도 없고 돌도 없고 가시덤불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옥토는 이 세상에 없는 밭으로서 100배, 60배, 30배의 증산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곧 ‘무한의 능력’이 무한히 공급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무한으로 제공될까요? 스가랴 4:12에 보면 기름이 계속 제공되는 파이프에 해당되는 두 감람나무의 등장으로 알려집니다.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같은 왕직책과 여호수아같은 제사직입니다.
이것은 곧 히브리서 7:1에 나오는 ‘왕이요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직책입니다. 오로지 먼저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바로 예수님께서 마감된 그 직책 안으로 합류되는 자들이 곧 성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하지 말게 하시고 모든 것이 주님의 제사직에서 거저 주신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