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4:4-6 / 오실 엘리야
오실 엘리야
이근호
2024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말라기 4:4-6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끝까지 율법으로 밀어붙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입각해서 더러운 자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한 하나님께서 밀어붙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평소에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럽기 짝이 없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선지자 인생 자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특이한 변화입니다. 예룰 들면, 호세아 1:2-3의 내용 같은 겁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호 1:2-3)
음란한 아내를 취하게 되면 선지자 자신의 구원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평을 받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개인의 구원 성공이나 명예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본성과 본질을 선지자 내부에 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반인들의 급선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육신의 생존입니다. 우선적으로 일단 살아 남고 보자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나 깨끗함은 늘 생계 문제에 밀리게 됩니다. 사람이 살만해야 그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을 위해 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육신적으로 당연시 올라오는 본심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율법을 퍼부어도 인간의 육신 자체가 이미 더럽기 짝이 없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내가 굶어 죽고 아파 죽는 마당에 무슨 하나님의 입장까지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바로 그점이 선지자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비-율법적 생각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전면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 또는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같은 말씀입니다. 즉 모든 이미 멸망의 대상으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조치가 또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택한 백성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입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완전한 의인으로 만들어 하나님 아버지와 합류가 가능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 일을 가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시 엘리야를 보내시겠답니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의 기능을 제대로 완성하실 분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왔던 엘리야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로마서 11:2-3에 보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 대해서 엘리야는 주저없이 하나님께서 송사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4:24-26에 보면,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천하가 다 의도적인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더라도 선별적으로 구원할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두 번째 엘리야가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엘리야가 왔습니까? 엘리야가 왔다고 하면 이는 이 세상이 벌써 전면적인 심판 속에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구원을 요청할 그 어떤 자격자도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되고 구원되지 않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실 엘리야의 몫입니다. 누가복음 1:16-1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받은 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에서 내뱉아지는 모든 말들이 밖으로 나왔다하면 거짓이요 왜곡이요 더럽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말로 인해 가리워지지 않는 말을 사가랴의 아들인 세례요한 입에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말을 해야 될 법을 배우는 자가 아니라 자기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자입니다. 하지만 이 세례 요한마저 여전히 율법+선지자라는 구약의 계시에 갇혀 있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2-3)
구약이란 계시 한계는 예수님에 의해서 넘어서고 완성이 됩니다. 진정 최종 ‘오실 엘리야’는 예수님이 되십니다. 즉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서 돌릴 수 있는 능력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어떻게 나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크게 소릴 질렀던 두 외침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7:26입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큰 모독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누가복음 23:46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놓고서는 그 버림받은 영혼을 도리어 아버지에게 부탁하십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사이에 예수님의 이런 과정이 실이 되어 새로운 통합된 원단으로 꿰매어져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진정 구원받은 성도는 이 실이 주입되어 있기에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충분히 모독하셔도 괜찮아요!” 사도 바울에 고백은 이러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주님 마음으로 충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