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말라기

말라기 4:1 / 심판과 피

정인순 2024. 10. 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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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피 

 

이근호
2024년 10월 2일          

 

본문 말씀: 말라기 4:1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심판이나 예수님의 피흘리심이나 모두 일체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인간의 것이 하나님에게 도달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환경이 전부인 줄 압니다. 유일한 현실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환경에서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인간들의 통상적인 관점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심판은 차질없이 주어집니다. 최종 심판 이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늘의 불심판을 미리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 전달되어 완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은 제대로 정리되고 정립됩니다. 베드로전서 1:24-25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 모두 애초부터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푸라기를 지푸라기로 적절하게 대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불이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참으로 합당하고 당연한 겁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치워버리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안일한 통상적인 관점은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자와의 만남에서 그 한계가 드러납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다니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과 그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인간에게 가장 겁나는 낯선 환경으로 겁을 줍니다.

하지만 다니엘 세 친구는 다른 환경을 생각합니다. 일반인의 관점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환경에 속해 있었던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극렬한 불무불 속에다 다니엘 세 친구를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네 번째 사람과 더불어 뜨거운 불 속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이로서 통상적인 관점인 자들과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이라는 경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불 밖에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불 속에 놓이게 될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 속에서 살아남지 못할 자들이기 때문이요 그들의 통상적인 세상관은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요구없이 일방적으로 전면적인 심판을 감행하시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도저히 생각못할 새로운 환경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 가지 공간상이 나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세상이 그 하나입니다. 또 다른 공간은 그 아름다운 공간이 온 천지가 물로 덮힌 공간입니다. 또 하나는 ‘방주’라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마련된 공간입니다. 이 세 번째 공간인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다 죽습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7-18) 똑같은 조치가 세상 마지막에 주어집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공간이 이 세상이라면 이 공간은 불로 몽땅 다 태워집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새로운 공간이 방주처럼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공간이 ‘피 속’이라는 공간입니다. ‘피 속’은 새언약이 완성된 공간이요 모든 말씀이 집중되어 있는 공간이요 이 피 안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격이 어떠니, 혹은 인간의 취미나 재산이나 인물이나 품위나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떠한지 전혀 상관없습니다. 모든 이가 불 타 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피 안에서만 말씀 성취가 되니 구원될 자들은 오로지 피 속으로 들어와서 그 안에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 피를 증거하기 위해 성령이 온 자들이 사도요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전도자들에게 있어 말씀 내용은 오직 ‘피’ 하나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원래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천사의 몫입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 13:39-40)

전도자들은 이런 천사의 심성이 장착된 자들입니다. 천사도 그러하듯이 이들 전도자들도 융통성이라는 손톱만치도 없습니다. 자신의 전도 내용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심적 부담과 충격을 주는지도 전혀 관심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피 밖에 그3대로 있는 자들로부터 온갖 모욕적인 발언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에게는 그런 욕설마저 너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겁니다. 피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아무나에게 주어진 혜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할 일을 해야 하는 자이기에 해야 할 일에 대해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피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자부하게 되면 후에 자기 인생이 쫄다 망해도 하나님께 항변할 근거자체가 날아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 밖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여전히 희망과 기대와 포기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피 밖에 있는 자들은 자꾸만 성경과 피를 설명하고 해석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바른 삶이라서 그 바른 삶이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과 물 심판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악마에 현혹되어 펼져진 얇은 환상의 막에 불과함을 말해줍니다. 다른 공간이 있습니다. 이런 데서 인간이 못 빠져나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악마의 억압에서 빠져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처지며 알아서 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가 악마의 지배 하의 인간 모습입니다. 하지만 말씀 완성의 능력이 주어진 자는 이미 피 안에 있기에 이 세상이 불타는 최후의 날이 된다할지라도 상관없이 그 불 속에서 춤 출 지경입니다. 성령받은 사도들을 향하여 피 밖의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행 2:1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안에 사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