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6:19-20 / 휘장을 향하여

정인순 2024. 9. 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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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을 향하여 

 

이근호
2024년 9월 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9-20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휘장이 있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환경입니다. 여기에 비해 인간의 환경에서는 휘장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환경은 휘장없고 대신 시간과 공간이 있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든든히 의지하고 삽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0-1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멸망하기 위해서 창조된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인간도 포함됩니다. 즉 ‘있음’은 곧 ‘없음’으로 바뀝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없음’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자연의 변화와 인간 세계의 원천은 성막의 등장으로 그 내막이 밝혀집니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 뵙고 지상에 세워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주한 지형에 있지 않고 높은 시내산 꼭대기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성막의 등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수평적 지형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로서 차이나는 두 공간이 이스라엘 내부에 생겼습니다.

기존의 공간이 있음이 없음으로 변해야 하는 인간 공간이라면 새로 등장된 공간인 성막은 없음에서 잠시 있다가 도로 없어질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 공간은 실은 하나님 스스로 망기지게 하는 장치입니다. 즉 성막이 속한 대자연과 더불어 성막도 같이 망가지는 겁니다. 이를 통해 ‘없음’에 근거를 둔 세계만이 영원히 있음의 세계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성악 안에 있는 휘장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휘장으로 인해 성막 안의 공간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뉘어집니다. 휘장이 나올 때까지의 공간은 거룩한 공간이지만 기존의 자연의 시간과 공간과 겸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휘장 뒤의 공간은 휘장이 찢어지므로서 진가가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즉 휘장을 찢어지지 않을 경우만 휘장 뒤의 공간인 지성소는 성소와 관련성을 맺으면 성립하는 공간이지만 휘장이 찢어지면 휘장 뒤의 공간인 지성소의 시간성과 공간성도 같이 날아가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멸망해야 될 이 지상의 용도가 휘장 찢어짐으로서 다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공간과 그 외의 공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일체 인간은 이 성막 안으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은 성막 밖의 존재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비거룩한 존재로 단언하십니다. 성막 밖의 존재가 성막과 관련성을 맺으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짐승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비록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고 더러운 존재이지만 짐승은 흠없는 짐승이어야 합니다. 즉 깨끗함이 더러움을 대체되는 겁니다. 성막 밖의 인간이 더러운 이유는, 그들은 이미 ‘있음’을 근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곧 ‘멸망되기 위한 있음’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들은 온통 ‘자기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지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은 ‘자기 구원’에 필요한 내용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천국가기 위한 아이디어나 지식 확보용으로 성경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독한 자기 설득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위해 조성한 환경 속에다 성경 지식을 쏟아붓는 식입니다.

즉 본인이 영화감독이 되어 하루하루 삶을 엮어 대단한 영화를 하나 제작하려는 겁니다. 이때 인간들은 자문위원으로 하나님의 위촉합니다. 본인을 빛내기 위한 영화에 차질이 없도록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성막의 존재와 상관없는‘소용없는 세상’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왜 자꾸 믿고자 하는 걸까요? 그것은 ‘옳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른 결정을 하게 되면 자아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도리어 빛이 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갈수록 자아가 더욱 긍정하게 되고 지키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성막 밖의 일상적 의미세계입니다.

참으로 소용있고 의미있는 공간은 인간을 대체하는 짐승이 피와 기름을 내놓고 나머지는 쓰레기 장으로 처리된 채 통과하는 공간입니다. 짐승 제물의 내장 및 부위들은 가차없이 성막 밖 쓰레기장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 쓰레기 장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성막 속으로 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방은 성소입니다.

이 성도 안에서는 움직이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실은 제사장은 ‘피의 운반체’일 뿐입니다. 이 피는 일단 휘장 앞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로서 성막 입구에서 휘장까지의 공간은 바깥에 작용하는 시간과 공간의 적용을 같이 받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육신이 기존의 인간 세계의 공간과 시간을 같이 느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휘장 앞까지 당도한 피는 곧 성막밖의 세상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들 피는 이미 자신의 육신이 이미 제단 위에서 죽어버렸다는 사실에 입각한 피이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자에게만 막혀 있는 휘장이 보이는 겁니다. 성막 밖의 세상은 휘장의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생각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저 성경 내용을 믿고 있으면 자신들은 언제가 구원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입니다. 자살이라는 것도 결국 자신을 놓지 못해서 생기는 결말입니다. 즉 ‘믿어서 지옥’가는 겁니다. ‘믿어서 자살’하는 겁니다. 휘장 앞까지 온 피들은 대기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나 성도들은 모두 이런 자들입니다. 자신이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됨을 아는 자인 동시에 그들에게는 휘장이 막혀 있음은 인식합니다. 즉 자신이 죽은 자되었음을 안다고 해서 구원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51에서 드디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맞추어 휘장이 찢어집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이로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구원의 능력이 휘장 앞에 대기된 자들에게 쏟아지면서 그들은 구원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도 없습니다. 그들이 바로 멜기세덱의 가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있음에 몰두하지 말고 예수님의 일하심에 몰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