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16-18 / 맹세 임신
맹세 임신
이근호
2024년 8월 2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6-18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뭐지요? 그냥 “나는 너희에게 맹세하겠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맹세 남김에는 인간이 여기 ‘있음’이 거짓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없어지는 존재이기에 제대로 ‘있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맹세라는 것은 진정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인간의 있음을 거짓된 것으로 규명해서 없애는 식으로 성취성을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맹세란 ‘없는 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데서’ 나온 것을 참된 맹세라고 받아들일려면, ‘참되게 없는’ 바로 그분에게만 성립됩니다.
없음에서 자신을 시작하지를 못하고 ‘나는 반드시 있어야 함’으로 시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맹세가 소용없고 도리어 거짓된 것으로 배척받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와 무관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출생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있음’을 진실의 시작으로 본다는 겁니다.
즉 이왕 있게 된 것 잘해보자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짐승과 과연 차이점이 날까요? 맹세를 성취하실 분은 현 인간들이 ‘있다고’ 여기는 세계 출신이 아니라 인간들이‘없다’고 여기는 세계 출신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인간의 ‘있음’이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맹세가 또 하나 거짓말이 아닌 이유는, 인간보다 월등한 분이 이 맹세를 친히 이루신다는 겁니다. 왜 인간은 배제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임무를 오직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만 일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진 찍을 때, 누가 머리 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비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그 두분의 주님 사이에서 모든 인간들은 나락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모조리 거짓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깨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셨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9-10,17)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맹세를 받은 그 당사자들을 제물과 같이 둘이 쪼개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진짜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거짓이요 가짜요, 진짜 쪼개진 그 제물 사이를 통과하면서 맹세 자체를 홀로 다 이루시는 바로 그분 안의 세계뿐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과 쪼개집니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는 이삭과 야곱을 인정해야만 하는 이삭으로 쪼개집니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름 붙여진 야곱과 둘로 쪼개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결국에는 남쪽과 북쪽 나라로 쪼개집니다. 가장 완전한 쪼개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한 몸으로 받으신 일입니다.
죄로 죽으셔야 하는 예수님과 영광스럽게 부활되셔야 할 예수님과의 쪼개짐, 바로 그 둘 사이에는 맹세는 성취되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없으신 분이 인간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들어올 때, ‘이름’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나는 나다’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출 3:14)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그 의미체계 속의 질서에는 일체 포함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곧 인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일체 알아챌 수 있는 근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4-19)
두 개의 의미 있는 기호로서 표현되지 못하면 진정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이미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스스로 표출하는 증거에 대해서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맹세 달성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뜻입니다.
맹세로 인해 인간 세계는 더욱더 철저하게 하늘 나라에게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흔적을 인간 세계에 남겼습니다. 것이 바로 전쟁 방식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 현실이라는 것이 인간의 노고로 인해 구성되는 것이 아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언약궤라는 나무상자가 다곤신상을 박살냅니다.(삼상 5:1-5) 이 둘 사이에 그 어떤 인간의 이해가 관여된 바가 없습니다. 마지막의 흔적은 바로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는 일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출생하므로서 처녀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마땅한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천사가 개입해서 마리아는 요셉이 낳은 아들인 것처럼 해서 양육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짐승같은 자는 가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성령이 자진해서 인간 육신 안에서 생겨버린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예수님 홀로 모든 맹세를 이루었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저급한 접시로 취급받는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당한 말씀의 진격을 막을 길 없음을 늘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자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에 있어 우리 자신을 배제해주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