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4-6 / 성소 청소 / 240821
성소 청소
이근호
2024년 8월 21일
본문 말씀: 말라기 3:4-6
(3: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을 때 기뻤다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전혀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끌려갈 때입니다. 이사야 63:9에 보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1:1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어렸을 때’입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가 성립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심을 하나님쪽으로 증명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음을 인간쪽으로 증명해내지는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증명하는 바가 바로 율법이 율법대로 빈틈없이 실행된다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율법이 없는 다른 이방민족들이 뭐라고 비웃겠습니까? “저들 이스라엘은 참으로 재수없다. 맨날 율법 못지킨다고 자기들 하나님에게 얻어맞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쪽에서 증명하는 겁니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세계에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를 성소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인간들만의 세계라고 누구도 알고 있고 또한 주장되는 이 현실세계에서 ‘하나님이 여기 있다’가 성립되면 과연 인간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대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모든 그동안의 지식과 상식과 학문과 업적과 문명이 모조리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문명을 착실하게 이루어왔자고 자부합니다. 당연히 이방민족들만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고 뭐든지 인간 편의 위주로 노동하고 활동해 온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원활하면 충분히 자기 삶이 평화롭다고 자부하고 그것을 자기쪽에서 부지런히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단에 합당한 제물을 드리지 못하면 저주받고 심판받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제단에 깨끗한 제물만 드린다고 이스라엘이 멀쩡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전반에 걸쳐서 율법의 거룩이 확장되기에 하나님의 율법대로 일상을 살지 못하면 가차없이 심판이 내려지는 나라였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늘 하나님이 계시는 바로 그곳, 곧 성도는 깨끗하고 정결하게 청소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성소를 어떤 식으로 청소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레위기 4:6-7에 보면,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17-19에 봐도,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조치는 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확정해놓으신 ‘인간과 만남의 조건’이 얼마나 철두철미한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철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충족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말라기 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희생 제물의 똥이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 어떤 식으로 처리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29:14에 보면,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27-28에 봐도,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 조항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있음을 하나님쪽에서 증명해내심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증명한다면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심판을 행사하지 못할 겁니다. 하나님의 증명의 최종 모습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없는 자가 구원 이해와 성령받은 자의 구원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없는 자들은 먼저 ‘내가 여기 분명히 있다’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차로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자기 쪽으로 가져 올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의 신앙을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보호해주기 위한 성령님의 도움을 끌어당길 겁니다. 반면에 성령받은 자은 이런 철차가 아닙니다.
먼저 성령이 먼저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이 자기 원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의 활동 근거가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절차로서 이 예수님과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결실로 새로운 ‘나’를 동원했음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한 그 성소를 졍결하게 청소하시는 피가 됩니다. 그 피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심판받음은 성도가 행한 모든 세상 일에 대해서의 대신 심판입니다. 이로서 성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 즉 ‘야곱의 자손은 소멸되지 않는다’이 성취되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오늘도 이 저주 속으로 계속 다이빙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늘 고맙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