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1-2 / 덮쳐진 완전
덮쳐진 완전
이근호
2024년 7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2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구원을 인간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개입시켰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을 죽이시려는 겁니다. 인간 가운데 값어치 있는 인간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세계는 이로서 ‘위기’ 정도가 아니아 아예 ‘끝!’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 인간 세계를 다루시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에 ‘도의 초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도 나옵니다. ‘초보’에서 ‘완전’ 사이에 어떤 라인이 그려집니다. ‘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길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자기 구원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체도 ‘길’로 작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길을 걷고 싶어 합니다. 자체적으로 ‘길’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본인이 길을 찾아나서는 방식의 구원을 인간은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신의 근원에 깔려있는 원초적 문제점을 제거할 방식이 못 보여주게 됩니다. 여기서 초보가 무엇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보란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바를 뜻합니다. “나의 오랜 친구 어둠이여. 당신과 다시 애기 하려 왔네. 조용히 기어 다니던 환상이 내가 잠든 동안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내 머릿 속에 심어진 그 환상은 침묵의 소리 속에 아직 남아 있어” -The sound of silence-
하나님의 계시의 찾아듬은 본인이 요청한 바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개입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 개입하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개선할 그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초보적 하나님의 찾아듬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희망을 갖게 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은 위해 살 듯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상태는 예수님과 자신이 협력과 협조가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유지되는 겁니다. 제대로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하면서 만난 모든 자들은 모조리 초보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나 각종 귀신 들렸다가 나은 자나, 중풍병자나 세리나 창기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가족이나 12해 동안 혈류병 건릴 자는, 병고침 받은 38년 된 병자나 12제자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 시킨대로 하겠다는 백부장이나 기타 등등 모든 긍정적 인물들이 다 초보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는 누구일까요? 완전한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홀로 단독적으로 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아성을 유지하면서 완전을 발견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완전’이 덮쳐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체 동질성과 동일성을 포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죽는 그 순간에 천국이 입성되는 그 자아가 지금의 자아와 동일한 자아이고 싶어해서 구원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자아 동일성으로서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초보’와 ‘완전’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 내부에서나 이해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 죽음의 동일성으로 이 땅을 심판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은 이 땅에서 안 죽을 그 어떤 권한도 없고 죽을 그 어떤 권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처분할 그 어떤 권리가 애초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 인간은 ‘애초의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낯선 죽음’을 위한 죽음의 힘으로 인간들을 살리내고 계시는 겁니다. 죽어라고 살리시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 단어로 직시하면 바로 ‘육신, 육’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십니다.
예수님과 제자 3명이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요한복음 3장에서는 니고데모가 이런 의아한 반응을 예수님에게 보이십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즉 이미 육신으로 태어난 몸을 어쩌란 말인가 라는 투정입니다. 육신이란 곧 짐승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란 먹을 게에 준해서 행동을 하는 객체입니다.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식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목숨이란 바로 이런 본능을 따릅니다.
인간들은 부자되기 보다는 노동량을 줄이기를 원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순적 고리에 갇혀 있습니다. “목숨 바치면 돈 줄게”이게 인간 사회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권능을 여기에 멈추지 않고 짐승이라는 위선의 지붕마저 뜯어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악(惡)’이 나옵니다. 곧 자신을 자기가 처분하려는 악 말입니다. 이 길은 자기가 자기를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개입의 연속성은 입은 자들은 예수님 자체가 길이 되시는 것처럼 그들로 하나님에 의해서 길로 만들어집니다. 멜기세덱의 족보 속의 세계처럼, 시작한 날도 없고 끝이 날도 없습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꾸준히 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와 헤어질 생각을 못합니다. 타락하기 전의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릅니다. 점점 자기 내부에 들어가서 독하게 홀로 살려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주도권을 쥔 길이 되어버린 자들은 예수님의 공로와 성과에 의해서 자신이 육신에 불과함을 아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원없이 봉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비난과 폭력 뿐인 것처럼 성도도 이 예수님이 당했던 그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봉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비난뿐인 이 생활이 곧 이미 시작된‘천국 생활’입니다. 이로서 주님의 일관된 길의 동질성 속에 성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덮치는 겁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이 둘 사이에 완전한 권능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주님의 공로만 개입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