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말라기

말라기 2:7-9 / 언약의 일치

정인순 2024. 7. 1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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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일치 

 

이근
2024년 7월 17일                

 

본문 말씀: 말라기 2:7-9

(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2: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와 같은 존재로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천사하는 일은 일체 인간을 배려하고 이해해주는 일이 아닙니다. 냉정하고 냉혹하고 일을 처리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하나님의 벌리시는 일 앞에서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요 살아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이미 고장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런 쓸모 짝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대상도 아니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확고한 기준으로 볼 때에 인간은 전혀 가치없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인간에게 해주게 되면 그들은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나는 그 어떤 기준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거야. 언약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런 것은 내가 다 치워버릴 거야”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여도 인간들은 단호하게 얼굴을 돌려버립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세상 사는 기준은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말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기준이라는 것도 자신이 정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꾸만 수치성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곧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바가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내쳐도 인간은 밖에 외출할 때 옷을 입고 나섭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3:7에 부합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내리는 조치입니다.

이 조치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산다’가 아닙니다. 하지만 왜 인간은 타인 앞에서 수치를 느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결함없는 자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백성들 앞에서 내세우시는 이유는, 제사장들이 하는 제시 행위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제사 행위의 원형은 창세기 3:21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인간이 자기에게 내린 조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조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조치 앞에서 한결같이 하찮은 존재요 결함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가죽옷을 입히셨던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는 특별한 복장을 입히십니다. 그 복장에는 12지파의 명단이 몸에 걸쳐있습니다. 이는 제사장과 백성 사이에 거룩으로 관련지으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흔히 ‘거룩하라’고 한다면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거룩은 ‘제물이 희생되는 제사 취지’가 빠져 있는 거룩입니다.

제대로 된 거룩이 아니지요. 거룩이란 제사에서 불에 의해 과감히 소실되는 희생물의 사멸을 핵심내용으로 담겨 있는 거룩입니다. 즉 제사장들이 매일같이 실시하는 그 제사의 취지가 이스라엘 전체에 확산되는 바로 그 거룩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거룩의 일관성을 제사장들이 보여주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은 인간적인 감정에 휩싸이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편을 드는 식으로 행동했다는 겁니다. 언약과 일치성을 갖출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비-일치성으로 근거로 하나님께서 거룩과 비-거룩을 나누신 겁니다. 다윗이 소년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 민족과 대규모 전쟁을 벌렸습니다.

거기에 개입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에 나서면서 딱 한 가지를 외쳤습니다. 할례없는 자와 할례 있는 자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할례 있는 쪽에 승리를 안겨다 준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사울왕 및 기성 군사들은 골리앗이라는 상대 장군의 덩치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기죽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울왕 쪽이 언약과의 일치성이 없었던 겁니다. 형식적으로는 몸에 할례를 행했지만 실제로 언약이 전쟁성패로 이어지는 현실성을 낳는다는 사실은 인정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단순히 골리앗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라 사울왕과도 싸운 셈이 됩니다. 이는 곧 레위지파와 인간이 결국 합치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의식과 기억과 신체는 영구히 변치 않는 ‘나’라는 이미지를 갖출 근거가 없습니다. 늘 변하고 매일같이 변합니다. 율법의 내용과 합치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노력한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고 영구히 동일인으로 고정화시키고자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시간 따라 소멸되는 하찮은 것이라는 점을 못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을 못받아들이는 이유는 영원히 나 자신을 규정해주는 절대적 기준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기준을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요? 이를 위해 레위언약이 도입됩니다. 레위 언약의 도입으로 인해 구약 이스라엘 제사장은 언약적 제사의 취지와 일치되지 못하는 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죄는 그냥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신약에 오실 예수님의 ‘죄된 몸’에 부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죄 없는 분이 저주를 받는’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서 신약의 예수님은 제대로 언약과 일치되는 몸을 구현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이 ‘새언약과의 일치성’을 보여주게 될 몸을 위하여 새언약에서 능력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새언약 앞에서, 곧 십자가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 완성과 불일치를 나타내는 몸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더는 자신의 몸을 기대하지 않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몸을 주목하게 됩니다. 늘 달라지고 늘 변하는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 되시는 주님의 몸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언약 앞에서 불일치를 보이는 수치스러운 몸이 담겨 있습니다. 그 저주스러운 불일치 몸이 예수님 몸으로 인하여 언약과 일치되는 거룩한 몸이 됩니다. 이는 바로 구약의 대제사장 복장에 부착된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지는 제사장의 언약과 합치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저 제사드리는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희생물이 되시므로서 언약의 합치를 달성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담긴 의의입니다. 이그 그 누구도 그 십자가 앞에서 옛 자아와 몸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희생적 몸과 자신의 언약 불일치성 몸과의 간격을 통해서 영구한 거룩히 증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옷으로 몸으로 여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