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4:20-21 / 거룩 공간
거룩 공간
이근호
2024년 5월 29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20-21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즐겁게 만족스럽게 주신 오늘 말씀이 인간들에게 공포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 수준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한다면 천국에서 탈락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이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사는지 살피게 됩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구원에 자신감을 갖추기 위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나약성과 힘든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것을 감안하는 기준을 제시해주시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한다는 사람들을 견눈질 하기도 하고 모방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에 의하면 어느 정도 거룩하고 정결한 수준이 아니라 매사에 완벽한 거룩을 유지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 기가 죽습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조치는 잉미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그저 일방적이고 전면적인 심판을 감행해버리시는 겁니다. 사적인 능력과 재주를 보시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성과를 보지 않습니다. “인간이냐? 그러면 저주받아라!”입니다. 인간들이 취할 그 어떤 조치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는 묻지도 따지지 않고 덮쳐진 거룩으로 만끽할 것이라는 겁니다.
따로 손질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러한 거룩이 덮쳐지는 것은 유월절 정신의 일관성에서 비롯된 겁니다.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하는 것은 공간적입니다. 그 공간 안에서는 무조건 저주받아야 합니다. 이 저주성은 히브리인들과 함께 있던 집에서 그른 어린양도 예외가 아닙니다.
단 그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내어 문설주를 바르는 것으로서, 심판하는 천사로 하여금 “이 집은 이미 심판을 감행되었으니 그냥 넘어가자”하는 식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월절 사건이 터지는 공간의 특수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이란 이 주어진 공간이 저주스러운 심판장으로 가득 채워짐을 내용으로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들은 사적인 미래상과 공동체의 지속적인 유지책에 염두에 두고 각가지 문제점이나 허물이나 사고친 것에 대해서 용서받고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통과의례’같은 겁니다. 인생에 있어 중대한 경조사를 맞이하게 되면 나쁜 과거를 해소하고 새로운 장래를 맞이하기 위해 죄 같은 것을 씻어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 씻음 받아 죽어서는 멋지고 행복한 영원한 장래를 획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성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저는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정결이나 거룩은 개인적인 자질의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만들어진 공간 구성을 말합니다. 이사야 6장 초반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빨려들어 갔습니다. 거기서 천사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보입니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2-3) 이 거룩으로 온통 덮쳐진 광경을 보고서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 개인의 온전함을 위한 조치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이 거룩이 덮쳐진 공간성을 유지하는 힘이 성전에서 나오는 겁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이런 취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바깥에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올 때에 다윗은 왕은 벗은 몸으로 많은 일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힘써 춤 추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 6:13-14)
이 춤추는 것은 부인인 미갈이 못마땅해서 남편되는 다윗왕에서 따지고 듭니다. 왕의 체통을 잃지 말아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윗이나 백성들이 언약궤 앞에서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가 해체되는 경우를 맞이해야만 합니다. 무서운 거룩됨에 마주하게 된 자는 더는 자신에게 관심없습니다.
바로 아브람과 야곱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런 거룩을 맞이한 바가 있습니다. 이 덮쳐진 거룩 안의 내용은 율법 전부가 한 인격화으로 완전하게 완성된 그 안에 있을 때나 효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8:2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출 28:36-38)
대제사장 이마에 있는 패가 바로 ‘여호와께 성결’입니다. 이 말씀이 대제사장의 인격적 완성을 내다보게 됩니다. 즉 거룩하게 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가득 차게 될 곳이 바로 성전 안의 공간이요 ‘거룩의 공간’입니다. 참된 거룩한 공간은 예수님 손 안에서 이미 완료되어 있습니다. 이 완료된 교회를 위해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지적사항에 걸려 초대가 옮겨져야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공간은 예수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한시도 하나라도 미흡하거 모자라거나 하자 있는 교회가 된 적이 없습니다. 마치 노아 홍수 한가운데 떠 있는 방주와 같은 겁니다. 그 거룩한 공간 밖에는 무조건 저주입니다. 이 바깥의 지옥성에 대해서 이사야는 끝부분에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 66:2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로 형성된 공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제대로 하는 기쁨과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정대은
44강-스가랴 14장 20-21절(거룩 공간) 24052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4장 20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아멘.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방금 읽었던 이 내용으로 끝이납니다. 이 내용을 보게 되면 “그날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성결이다.” 성결이라는 것은 거룩하다 그런 뜻이죠. 모든 것이 성결하다는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아주 즐겁게 신나게 기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근데 이 말씀을 대하는 모든 인간들은 이 말씀 자체가 공포스럽기까지 할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거룩을 요구할 것 같은 느낌. 모든 면에서, 말방울까지 거룩하니까, 거룩하지않은게 전혀 없다는 하나님 마지막 때에는 그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말은 결국은 조금이라도 흠이있고 티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그런 뉘앙스로 우리에게 다가오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감이 확 떨어지는거에요. 도대체 어디까지 성결하고 어디까지 완전해야되고 거룩함에 만전에 만전을 기한다 할지라도 모든 행동에서 거룩이 유지될 수 있는지 걱정이 늘어지게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이 말은 여전히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본인이 의도하는대로 만회하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면서 뭔가 부족을 느끼고 자기가 보기에 온전한 그리고 완전한 거룩이 아님을 본인이 직감해서 걱정이 늘어지는거에요. “이래가 천국가겠나?”
물론 하나님께 열심히 하는 것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소홀히 했다던지 위반한게 있는게 있을 때 그쪽으로 하나님이 치고 들어온다면 내가 뭐라고 변명해야 되고 그러면 나는 결국 천국에서 탈락해서 지옥에 쳐박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공포스러움이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부담으로 작용하는겁니다. ‘모든 것이 거룩하다’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게돼요. 어떤 완전한 거룩이 전체가 다 거룩하고 조금이라도 거룩하지 않은 것은 천국에 못온다. 그런 취지로 이 말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요, 이렇게 여러분들이 단박 보게되면 여기, “여호와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에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며, 말방울까지 성결이며, 그리고 예루살렘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 앞에 성물이 될 것인즉”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연결시켜서 어떤 상황을 그려주냐 하면, 거룩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따지는 것이 아니고 공간안에, 완전한 모든 공간, 거룩의 공간 자체가 되어서 그 공간 안에 들어온 사람은 그 거룩을 만끽하고 있다는 느낌을 이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이게 어려우면 더 쉽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대규모 간장이나 된장담는 기업체 있잖아요. 대규모로 하는데. 그런 사람들, 그것도 제례 간장, 제례 된장을 담는 걸 보게 되면 옛날 한옥 뒤에 넓은 터가 있고 거기에 장독들이 수백개 쫙 놓여있는 것을 보실 수가 있을겁니다. “우리 회사는 이렇게 간장을 제례식으로 합니다.” 그 장독. 그 장독들 하나하나 마다 거기에 메주가 맛있는 된장을 위해서 숙성되고 있습니다. 그렇니까 오늘 유다에 있는 모든 솥이, 다른 말로 하면 장독이. 하나님의 거룩으로 숙성되고 있다는, 그렇게 본다면 이거는 개개인이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는거에요. 동일한 현상이.
어떤 현상? 그 공간에 들어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개인의 자질이나 인격 일체 묻지 않고 이 공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개개인이 거룩이 뽀글뽀글뽀글뽀글 이렇게 거룩이 올라오고 있는거에요. 이러한 경우가 이미 스가랴 이전에 출애굽기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유월절이었어요. 유월절은 그 개인에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남자냐 여자냐, 키가 몇센치냐, 어느학교 나왔느냐, 그런 것 일체 묻지 않고 한꺼번에 하나님께서 심판이 주어졌지요. 그 심판은 거룩한 심판입니다. 이 거룩한 심판 앞에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버틸 위인이 없고 그 거룩한 심판 앞에 어떤 인간도 살 자격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조로 거룩이 주어졌어요.
그래서 그것을 전제로 해서 주님께서는 뭘 했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 그게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라라. 그러면 너희 가정은 이미 장자가 죽은걸로 여겨서, 하나님께 심판 받아 죽은 걸로 여겨서 “이미 이집은 죽었다. 어이 천사, 넘어가자.” 넘어가는 이걸 유월, passover라하는데 넘어가는거에요. 피를 보고 넘어가 준데요. 피를보고 넘어가는거에요. 그것이 바로 양의 피를 발랐던 그 히브리인들 한집 한집이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를 담는 솥이라고 여겨보세요. 솥. 장독대. 거룩을 숙성시키는 장독대라고 여겨보자 이말이죠.
그러면 그게 유월절 사건인데, 유월절 여기에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스가랴 같은 경우에는 이미 성전이 마련되어있고 그 성전의 거룩한 효과를 차별없이 그 성전에 있는 그 공간에 성전이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누구나 다 누린다는 식으로 이게 주어지지만 유월절 같은 경우에는 성전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그 유월절 이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가 지시한게 있습니다.
“너희가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불러내어라. 왜 불러내냐고 묻거든 이렇게 답변하라. 내 백성을 너로하여금 내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 불러낸다고 이야기 해라.” 섬김을 받기 위해서. 그러니 이 말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쪽에서 착공하시고 준공을 하시는데 그 방식은 자기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자기가 간택하고 포착해서 강제로 데려오는식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구축하는거에요. 성전, 시작 아이디어 조차도 주님께서 시작했고 거기에 성전에 포섭되는 사람들도 주님께서 섬길사람을 일방적으로 찾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을 일방적으로 채택할 때 원리가 뭐냐는거에요. 원리가. 그 원리가 신약에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언약적 약속, 또는 언약적 관계가 원리가 돼요. 근데 그 언약적 관계가 뭐냐하면,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버림받겠습니다. 이거는 정말 충격이에요.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십자가에서 버림받겠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인간들은 거룩을 소지하기를 원해요. 왜? 자기 인생을 만회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이 엉망진창이고, 어느누구 인생이든 고생스럽잖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뜻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데 어떻게 내인생이 만회되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쪽에서 내 죄를 씻어주게 되면, 내인생은 다시 만회될 수 있다’ 그러한 꼼수를 쓰죠.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의 힘으로서는 용서받을 길이 없는데,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여러분 용서받았습니다.” 이 공식, 이 공식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버림받겠습니다.’가 빠져있어요. 그러니까 한 50년 60년 교회나와도 한번도 복음을 들어본적이 없는, 뭐만 듣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내인생 만회되는가, 그것 꼼수만, 온통 그것만 신경쓰고 산거에요.
스가랴 오늘 마지막 본문은 그것을 완전히 묵살해버립니다. “위험해요. 피하세요.” 이게 성립이 안돼요. 인간세계에서는, “오오 위험해요, 피하세요.” 이게 성립이 돼요. “차옵니다, 빨리 피하세요.” “아이고 당신 큰일날 뻔했네.” 이런 이야기 내용, 이러한 사실들이 이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매일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위험해요 피하세요. 까딱하면 당신 어려움에 처할 뻔 했습니다.” 자 이런 멘트, 이런 말에 그 취지가 뭡니까?
당신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면 안돼요. 포기하면 안돼요. 당신은 실패하면 당신 기분나쁘잖아 그지? 그러니까 당신은 실패하면 안돼. 최선의 노력을 해서 당신을 지켜야돼. 이것 자체가 뭐냐하면 공포요 무서움이고 두려움이다 이말이죠, 이게. 전혀 복음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제가 대전 강의에서 인도 철학을 언급했고 불교도 언급했지만 이건 기독교도 마찬가지고요, 왜 이세상의 모든 종교, 이슬람도 마찬가지고, 모든종교, 토속종교 마찬가지고, 인간은 왜 이렇게 종교를, 신을 찾느냐? 찾는 이유가 뭐냐하면 통과의례 때문에 그렇습니다.
통과의례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힘든 공간에 살고 있는데 이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어떤 만든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지옥가서 고생하라고 만든게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서 사랑의 나라 천국을 극락이라해도되고 천국이라 해도되고, 거기에 살기 위해서 뭔가 다른 세계를 마련했다. 마련했는지를 누가 본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마지막 기회라는 그런 희망이 있어줘야 힘든 세상을, 세파를 이길 수 있는 보람과 그 의지가, 의욕이 생길게 아니겠습니까.
남자들은 특히 그 결혼한 여자들 보고 막 이렇게 비아냥되고 어떤때는 놀리고 깔보죠. 자기 부인보고 “니는 뭐 걸핏하면 뭐 비네” 이렇거든요. 그거는 심지어 자식들도 그 엄마한테 엄마의 나약함에 대해서 속으로 비난해요. “엄마는 좀 이성적으로 해결하려고해. 자꾸 빌지말고.” 군에 갔다고 새벽기도 하면서 빌고, 제대 7월달인데 한달동안 무슨 사고나면 안된다고 빌고.
그러면 남편이 이래요. “당신 그렇게 한다고 애가 뭐 어디 잘 되는줄 아나? 나 봐. 사나이. 아들 군에 보내면 죽었다 치고 그렇게 대담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이제 부인이 이야기하죠. “당신은 원래부터 자식사랑 안했잖아.” 당신이 낳았나? 내가 낳았지. 그저 뭐 비는거에요. 어서 위험한 군에서 벗어나서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신의 눈 앞에 보호받는 대상으로서 우리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지속적인 공동체가 되기를 그 지속성을 유지하기를 인간은 본능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이게 재수가 더러우면 안되잖아요. 그때는 뭔가 정화되는 정화작업이, 씻어주는게 있어야돼요. 그걸 종교라고합니다. 그러면 종교는 어디에 집중되는가? 경조사에 집중돼요.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결혼할 때, 그리고 뭔가 병들었을 때, 그리고 죽을 때. 종교적인 행사, 목사, 중, 무당 불러다가 집중적으로 그땐 돈 아끼지 않고 집중적으로 거기다 투입해서 지금 턱걸이, 지금 굉장히 변곡점에 이르는거에요. 상당히 인생에서 중요한 지점에 있어서는 신의 도움이 특별히 여기서 가해져야 된다는 거에요. 기도원에가서 특별히 기도한다든지 이런거.
그러면 왜 인간들은 신을 찾는가? 신만이 죽지 않는다는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종교가 나왔던 거에요. “신은 좋겠다. 죽지도 않고. 나, 너, 신 따라 잡을 거야.” 그래서 그게 종교에요. 신들이 사는 그게 천국이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종교에서는 뭐가없느냐 하면, “하나님 주의 뜻이면 저 버려도 괜찮아요.” 이게 없어요. 왜? 실제로 버려도 좋아요 하다가 실제로 버림받으면 내가 너무나 공포스럽기 때문에.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이유도 없이 태어날때부터 공포와 무서움속에서 태어나는겁니다. 그 무서움을 해소하려고 각 자기가 믿는 종교에서 될수 있는대로 거기에 매진하고 몰입하려고 하죠. 기성 종교에 불만을 가지고 기성종교에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에게 이 공포심이라는 것은 한결같습니다. 빠진적이 없어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인간들은 자기자신이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뭐 성경도 보고 구약성경 신약성경 보고 이렇게 하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은 자기 위주의 단독 세계에요. 자기만의 세계에요. 자기가 자기를 움켜쥐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진짜 거룩을 알았던 다윗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6장 14절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6장 13절부터,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이래 되어있어요. 여기서 다윗이 춤을 추는데 그냥 대충 춘게 아니고 힘써, 온 힘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춤을 췄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춤을 춘 모습을 보고 다윗의 부인 미갈이 아주 가슴이 찢어집니다.
사무엘하 6장 20절에,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어떻게 체통을 한꺼번에 버리십니까. 백성들이 임금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춤을 추려면 내앞에서 추면 되는데 내가 하찮게 내가 지시하고 명령해야될 나의, 왕비의 하찮은 여종앞에서 당신은 옷을벗고 춤을 췄기 때문에 이 왕비인 나의 권위를 남편된 당신이 나를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당신이 그런 쉬운, 가벼운 하찮은 인간으로 처신할 줄은 내가 상상도 못했습니다. 늘 임금이라면 백성앞에서 무게있게 행동하는것이고 그게 처신하는 것이 권위가 사는데 당신의 오늘 행동은 전혀 권위없는, 그리고 천한, 내 지시에 따라야될 천한 시중들이 당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그럼 나는 뭐가됩니까? 우스운 남편에 우스운 왕비가 되는데 내 면이 살겠습니까?”하고 남편의 벌고벗고 춤추는것에 대해서 비난했어요.
그런데 다윗은 이건 뭐냐? 자기만의 세계가 해체되었다는 축하파티를 백성들과 함께한거에요. 그동안 자기만의 세계, 자기뿐인 세계. 이게 공포를 유발한 거에요. 내가 어떻게, 내일은 어떻게 될거고 앞으론 어떻게 될 것인지, 이 공포 두려움과 무서움에서 떨쳐 버릴수가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죽는데 신은 좋겠다 안죽으니까. 그러나 인간은 죽잖아요. 죽고난 뒤에 내신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냥 궁금한게 아니에요. 좀 알고 싶다가 아니라, 공포와 더불어서 두려움과 더불어서 이걸 바들바들 떨면서 기다린다니까요? 인간은.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 자기가 기쁠 때 웃음처럼 그 웃음에 같이 웃기를 원하는 거에요. 근데 인간들은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웃을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그런가? 자기와 분리가 안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살아 가는 것은 한마디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기가 잘한 것으로 남한테 인정받으려는 거에요. 여기서 어떤인간도 못벗어납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으로 남한테 인정받으려하는겁니다.
그러면 인정을 못받으면 어떻게 하는가? 무서운거에요. 두려운 거에요.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는 생각에, 자기가 낙담하게 되는겁니다. 그것을 빨리 만회하려고 시도할거에요. 때로는 자기가 만족스러울 거에요. 하지만 인간의 모든 만족은 불만족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딜레마에요. 이것 딜레마입니다. 여기에대해서 어떤 해결책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벌벌떨면서 받아들이는 거룩은 자꾸 거룩을 소지하려고 해요. 하나님의 성결과 깨끗한 것을 소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지해봤자 소지한 순간 또 불만족스러워요. 더, 더, 더 소지해야되는데. 더, 더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무한입니다.
그러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유치원 애가 엄마가 잠깐 출타해가지고 집에서 돌보고 있는데 티비에 교육방송에 나오는 수퍼윙스라는 애들 한글가르치는 프로그램 그게 나와요. 한글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보니까 우리 손자가 거기에 집중해요. 거기에 무슨 한글을 가르치냐 하면, 비상벨을 눌려요. 이 “비, 상, 벨, 을, 눌, 려, 요” 일곱자를 가르쳐요. 어떤때 비상벨을 눌려요가 의미가 다가오는지를.
애가 비상벨을, 따라하고, 따라해라 하니까 따라하고 이랬어요. 그걸 제가 보고 느낀 것은 비상벨을 눌려라는 일곱자를 알면 구원받습니까? 인간은요 자기가 잘한 것으로 남한테 인정받으려하기 때문에 자기 잘한 것 없으면 그 옆에것은 몰라요. 자기 잘한것에 몰두해요. 그 잘한 것 못하면 남보고 무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애같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냐? 하나님은 고급호텔에보면 그런 음식을 제가 먹어본적은 없는데 고급호텔에보면 접시에 음식 담길 때 그냥 안나와요. 돔으로 뚜껑을 덮어서 딱 오거든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공간을 줘요. 공간을. “비상벨을 눌려요” 이것 안다고 해서 서울대학 안넣어줍니다.
서울대학 시험칠 때 “비상벨을 눌려요 글로써보세요.” “썼어요.” “합격” 이런 것 없다고요. 계속 계속 수평적으로 추가적으로 지식을 자꾸 늘어나야 되는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그렇게해가지고 인생이 만회되는것도 아니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는게 아닙니다. 그냥 덮어버리는거에요. 뭐로? 하나님의 거룩으로. 거룩이라는 뚜껑으로 그냥 덮어버려요. 뚜껑으로. 그러면 뭐 뚜껑 덮인 사람이, 그러면 뚜껑 덮이면 구원 받겠네요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럼요 뚜껑 덮이면 구원 받죠. 뚜껑 덮였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거는 이사야 6장 5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6장 2절부터 보게되면,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천사가 이사야 선지자를 가르치는게 아니에요. 천사는 지금 누굴 가르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천사는 누굴 쳐다보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날개짓하면서 날개 다른 두 쌍은 자기 발 가리고 나머지 중간에 있는 몸통에 있는 날개가지고 하면서, 계속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해요.
그 공간을 하나님이 조성했고 그 공간에 누가 포함이 되어있느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여기서 도망쳤습니까? 벗어났습니까? 내뺐습니까? 아니죠. 그 공간에 거룩을 한꺼번에 만끽하는 순간 더는 이게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이게. 왜냐하면 그 공간은 내가 어떻게 천국가는 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성전을 스스로 만들어버렸다는 그공간에 이미 자기가 거기에 끌려들어온 거에요. 그 공간에.
사적인 문제가 탈락한겁니다. 나는 처음부터 더러운 인간이고 들어와서도 더러운인간이에요. 천사 하나가 제단에 숯불가지고 입술을 지지죠. 하면서 뭐라하느냐하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하는거에요.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이사야가 선지자이지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죄는 여전했다는거에요. 그러면 이사야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사야, 또는 하나님과 천사와 이사야 사이에 있어서 천사도 쳐다보고있고 하나님도 쳐다보고있고 이사야 쳐다보는 것은 뭐냐하면 이사야가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니라 이사야에 묻혀있던 그 입술, 그 입술이 어디서 나온 죄 사함이냐 이말이죠. 그건 제단에서 나왔거든요.
그러면 그 제단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핵심 엔진부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죠. 그 제단에 나오는 그 율법의 이야기가 레위기에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과 레위지파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이 거룩이라 하는 것은, 거룩의 조건은 뭐가되느냐하면 뭐 하나님쪽에서는 영원한 죄사함의 제단에서 다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겠죠? 그렇다면 인간쪽에서는 뭐가 되느냐? 그게 이사야 66장 20절에서 24절에 나와있습니다.
다소 긴데 제가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 21절에 방금 제가 언급한 내용이 나옵니다. 21절,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이사야 66장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을것이라는 이 말씀은 바로 출애굽기 28장 36절에 제사장의 복장 중에 하나가 머리에 정금으로 패를 만드는데 그 패에다가 뭐라고 쓰느냐 하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자를 새겨서 제사장 머리 위에 이렇게 패를 만들어요. 패를 만들면 이스라엘 그 뒤에 38절에, 출애굽기 28장 3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제물에 대해서 죄를 지은것에 대해서 그걸 속건이라고 되어있는데. 죄 지은것에 대해서 대신해서 제사장이 그걸 처리하게되면 그 쓰여있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그 글자와 글자화된 인격, 제사장 인격을 보고 나는 그들의 죄를 용서할 것이라 되어있어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바쁩니다. 왜 바쁘냐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서 자기 죄를 없애서 자기 인생을 죽어서도 완벽한, 완전한 복받는 인생이 되고자 지금 시도하는 중에 있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를 없앨 생각을 하는게 아니고 자기라는 그 정체성을 천국가서도 유지하려는 아주 사투를 벌리고있다는 그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을 주께서 뻔히 아시고, 그거는 거룩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사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에 거룩이 아니에요. 사적으로 소유된 거룩은 없습니다. 공간 자체를 거룩으로 만드는 거에요. 공간자체를.
이걸 개인을 없애고 어떻게 공간 거룩으로 나아가느냐, 그 작업에 의해서 하나님은 무척 바쁘십니다. 인간이 어느정도로 자기밖에 모르느냐 하면, 제가 두 번째 여행지를 빈에 갔어요. 빈에 봐야 될 궁전이 두 개 있었습니다. 벨베데레 궁전, 이름도 어려워. 벨베데레 궁전 그거 하나 봐야되고 그다음에 쉘부른 궁전 그 두 개를 보는데 아침에 9시에 벨베데레 궁전에 갔습니다. 가가지고 이 안에 있는 보물들이나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라든지 유명한 키스라는 그림도 그 안에 있고 있는데 그것 볼마음으로 이렇게 일행들이 부풀어 있었는데 어떤 오스트리아 현지인이 와가지고 말 잘 통하지 않으면서 뭘 내미느냐 하면 휴대폰을 이렇게 내밀었어요.
휴대폰을 내밀어가지고, “휴대폰을 왜 저한테 줍니까?” 우리말로 하면 “아줌마 뒤에 한번보세요.” 자크가 열렸어요. 훤히 열렸어요. 우리 일행중 아무도 몰랐습니다. 벨베데레 궁전에 가면서 소매치기가 휴대폰을 가져간거에요. 근데 그 아주머니가, 한 50된 현지인이 어떻게 그걸 도로 찾아가지고 찾아서 찾아서 일부러 우리한테 주러 온거에요. 그 순간 우리들은 두려움을 느꼈죠. 지금 이 궁전의 아름다운 보물의 그 아름다움은 뭐고 없고 사적인 공포심에 한거에요. 단디 해야돼요. 훤히 이제보니 자크 열려서 훤해. “가져가라”하는 식으로...
그런일이 거의 없답니다. 잃어버리는데 우연히 발견해서 찾았죠. 그다음부터는 갑자기 앞으로 당겨가지고 했는데, 인간은 자기 소유물에 뭐 하나님이고 삼위일체고 구원이고 이렇게 하죠. 그런건 다 빈말이고요. 인간은 자기 소유물에 집착하고 관심을 두지 평소에 하나님의 거룩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내 개인 때문에 공간감을 잃어버리는거에요. 공간감을. 근데 그 공간감이 주는 그 축복에 대해서 이번 여행에 제가 느낀 것은 이번에는 프라하에 갔습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갑자기 밤중인데 저녁때에 비가 막 소나기가 쏟아지는거에요. 우산도 안가져왔는데. 숙소돌아오면서. 그런데 우리는 뭐 걱정도 안했어요. 헤헤거리면서 어디있냐? 벨라라는 지하 마트에서 맛있는 과일 산다고 우리는 뭐 아주 희희낙락이에요.
보세요. 지상과 지하. 지하에는 비가 새질 않습니다. 비가 오질 않습니다. 거기에서 맛있는 과일 사면서 수다 떨면서 사고 나오니까 비그쳤어요. 이게 공간의 고마움이에요. 공간의 고마움. 우산 드는 힘든 수고 필요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공간을 만드는데 그 공간은 자기를 버리는 자 만이 들어올 수 있어요. 이거는 인간의 힘으로 되질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걸 뭐 이렇게 우리가 하라하는 것처럼 말을 하느냐? 아브람이 아브라함되고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에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었다는 말이 무슨뜻이냐 하면 노아 홍수를 생각하면 제일 쉬워요. 노아가 홍수났을 때 무서운 심판있을 때 노아가 스스로 거기서 도 닦고 기도하고 하지 않았어요. 거기서 찬양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기도하고 찬양이 아니라, 노아는 여덟식구는 공간 하나만으로 충분했어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 바깥에는 너무나 참혹한, 인간대 인간가지고 비교했던 모든 비교가 무의미한 니 잘났다 니못났다 니 똑똑하다 잘났다 니 돈많다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전부다 물에 잠수되어버린 무시무시한 심판을 방주안에 이 공간의 고마움속에서만 비로소 느끼는 거에요. 방금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 66장 아까 봤던 이야기에 나옵니다. 거기에, 이사야 66장 21절까지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야기 했고요.
하나님의 성결,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는 공간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 제사장 이마에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되어있고 그 거룩이라는 말을 대제사장이라는 하나의 인격체가 이마 위에 있었잖아요. 그 이마에 새겨진 글자. 성결이 인격과 결합된 분이 예수님이거든요.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이마에만 머물지 않고 그 전체가 하나님의 거룩이 되면서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되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면 그 공간 바깥에 대해서 이사야 제일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날에 모든 자가”, 모든 이스라엘이겠죠. “모든 백성들이 경배하리라”
24절에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방주와 같아요. 하나님에 제사장과 레위인들로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성전안의 세계. 그거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효과가 효력이 작동하는, 효력이 배분되고 할당되는 그 공간. 단지 그 공간안에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거룩한 공간. 그게 언약 안의 공간, 그걸 신약적으로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 공간 바깥에는 뭐냐? 벌레도 죽지 않고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한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이걸가지고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공간적으로 봐야되는데 공간적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돼요.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가 아닙니다. “나는 훌륭하고 우수하고 너는 열등하고”이게 아니에요. “나는 어디에 속해있고 너는 어느공간에 속해있다”로 보는거에요. 만약에 내가 잘났다 못났다가 되면 우리는 나의 만전에 만전을 기한다고 이게 무섭고 두려워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저는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뭐 주석이나 교회에 보게 되면 정말 이거는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일곱교회 나오잖아요. 이걸 해석하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해요. 뭐냐? 우리는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기서 일곱교회 에베소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책하고 지적하시는 이 상황을 우리교회는 만전에 만전을 기해서 철저에 철저를 기해서 우리 이것 이런짓 하지 맙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된 교회로 인정해줍니다. 이런 조로 설교가 되고 이런쪽으로 해석이 돼요.
그거 인도철학이고 불교에요. 세상종교입니다. 그건 통과의례에요.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가 재림까지 통과해서 우리 공동체가 괜찮은 공동체로 바뀌자. 지속적인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 지키면 우리는 합격된 교회가 된다.” 지금 그말 하려고 이 일곱교회 준게 아니에요. 일곱교회를 준 것은 교회가 교회를 진짜 교회를 어떤점에서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예시로 든거에요. 교회가 없어지는 그 없어짐을 통해서 진짜 진짜배기 교회가 없어지는 그 배경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는겁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지금껏 문제 있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교회가 위태한 적도 단 한번도 없었고 교회가 완전한지 않은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데도 일곱교회는 이 지역에 우리가 이 교회 했기 때문에 완전한 교회를 쳐다보는게 아니고 우리 모임, 이 교회가 어떻게 융성하고 잘 되는가 그걸 쳐다본다면 여기 지적 사항 하나도 우리 감당 못합니다.
니골라당 감당못하고요. 이세벨파 감당못하고요. 처음사랑 떨어진 것 감당못하고요. 뭐이거 지적사항이 한두개가 아니니까요. 여기뭐 “니가 온전치 못하다”도 나오고 여기 라오디게아 교회 “니가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가난하고 눈먼다.” 여기 일곱교회 나오는 이 조항들은 인간이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지켜봤자 소용없는거에요. 죽도록 죽는척해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하지 않았어요?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이랬습니다. 죽을 만큼 고생하라 그말을 한게 아니에요. “그냥 죽어버려.” 이뜻이에요.
왜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춤을 췄을때에 왜 그렇게 그냥 대충추는게 아니라 힘있게 춤춘 이유는 뭐냐하면 언약궤 앞에서 백성 따로없고 왕 나 따로 없고 왕비 따로 없다는 것을 다윗이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물론 성신이 임해서 그렇게했지만. 오늘 스가랴의 이 말씀은 어떤거 하나 거룩하지않은게 없고 다 거룩하다는 말은 지금 주님께서 기분 좋아서 이야기하는건데 그러면 우리도 이말씀을 받을 때 기분좋게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 안에서 쓰시려거든 저희를 버려서라도 쓰신다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거룩인줄알고 기꺼이 버림 받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언약관계가 나의 사적인,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나의 욕구를 이겨 접수, 그걸 덮쳤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다 이루었다가 나의 사적인 나의 욕망. “내가 실패하는 인생되면 안되지 무서워”, 하는 이것을 덮쳤기 때문에 그냥 춤추듯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고백. 이것이 성령안에 있고 십자가 안에 있고 우리 예수 안에 있는 진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된 거룩한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었다고 주셨는데 우리는 나의 장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내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내가 잘되는 미래의 상을 손꼽아 기대하면서 나 위주로 이용했던 것,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기쁨을, 하나님의 즐거움을 모독하는 일인지 이제는 충분하게 깨닫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