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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강, 469강) 모든 것과 전체/ 취소 240416

정인순 2024. 5. 29. 10:38

468강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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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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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하림

468강-YouTube강의(모든 것과 전체 디모데전서 2:2)20240416-이 근호 목사


제468강, ‘모든 것과 전체’. 모든 것하고 전체가 같은 뜻이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차이가 납니다. 모든 것은 인간 쪽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긁어모아 보는 거예요.

눈에 띄는 것을 다 긁어모아 보면, 옛날 사람들이 눈에 띄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하고 세월 지나서 오늘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끌어 모았을 때, 과연 그 양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왜냐하면 새로운 것이 계속 발굴되니까요.

분명히 옛날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인공위성을 띄우고 망원경을 만들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은 경우에는 망원경 만들고 난 뒤에, 어? 목성에 위성이 있네? 목성에 위성이 있다. 목성 말고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이 또 따로 있다는 것은 망원경을 발명해야 아는 거예요. 과학사에서 보게 되면, 어? 이건 작은 벌레보다 더 작은 게 있네? 그게 뭐냐 하면 병원체에요. 박테리아. 그것보다 더 작은 게 바이러스고. 이제 바이러스보다 더 작은 게 있을 수 있겠죠.

그래서 인간들 입장에서 모든 것이라고 자부했는데 점점 더 발견이 되겠죠. 그러면 인간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이 기껏 자기가 지금까지 긁어모은 것 가지고 거기서 질서를 잡아 ‘이게 진리다’라고 했는데 새로운 게 발굴되니까 이거 뭐 진리 아닐 수가 있죠.

우리나라 고려나 조선 사람들이 ‘미인은 이정도 되어야 미인이다’라고 내세울 게 있을 거예요. 60년대에 미인하고 70년대 미인이 다 다르죠. 뜯어고쳤으니까 다를 수밖에 없죠. 완벽하게 더 완벽한 미인, 얼굴에 모든 치수가 균형 맞춰진 거 이런 거 생각하고. 실제로 중국의 양귀비 그림 보면 못생겼어요. 그런데 양귀비가 절세가인이라는 거예요. 요새 양귀비 같은 인물 가지고는 어디 예능프로도 못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보는 만큼 그걸 진리라고 여깁니다. 이건 한계가 있는 거예요. 기껏 아는 것이 진리라 해서 목숨 바쳤는데 목숨을 헛바쳤어요. 다 알지도 못하면서 엉뚱한데다 목숨 바쳐놓고 난 진리를 위해서 목숨 바쳤다하면 아이고 참, 개죽음했다 이렇게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 둘을 나눕니다. 디모데전서 2장 2절에 보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여기 ‘모든’이 나와요. 그 당시에 알고 있는 사람들, 계급과 지위 관계없이 다 모든 사람이겠죠.

이렇게 해놓고 그다음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그러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 하나님 뜻이 방해받지 않는다는 말은 ‘지옥 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가 되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게 뜻이라면 세상은 주의 뜻대로 될 거고 그러면 주님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뜻도 도중에 무산될 리가 없고.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났냐? 그러면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국행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모든’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판단하기에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지옥가야 돼. 저 사람은 천국가야 돼.’라는 인간들의 판단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인간들은 이미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중심으로 차별화를 시키는 거예요. 너는 오지 마. 넌 천국 오지 마. 넌 천국 와야 돼. 특히 가족 같은 경우에는 가족보고 자기 아내나 자기 자식보고 ‘너 천국 오지 마’ 이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지옥 가더라도 너만은 꼭 천국 갈 거야.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천국 보낼 거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러한 판단은 자기 입장이죠.

네 입장에서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안 되고 라는 걸 하지 말고 어떤 계층이나 임금이나 어떤 높은 지위나 어떤 계층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라고 했다면 너는 되고 안 되고라는 자격 자체가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사람의 형편을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계층에 있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성격이 어떻든 하나님은 그 사람이 어디에 박혀있든 간에 세상적인 위치와 자격을 논하면서 구원 주고 안 주고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그 자격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구원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이 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이 안 된다면, 그럼 구원된 사람끼리를 뭐라고 하느냐? 그걸 ‘전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체. 그러면 이 모든 것과 전체의 차이점은 뭐냐? 그게 골로새서 4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원받는 사람의 공통점은 어떤 지위에 관계없이 어떤 위치에 관계없이 나 구원 받았다,라는 걸로 구원이 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하층민이기 때문에 구원 안 된다고 하지 마. 귀족들만 구원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조건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 조건만 있으면 구원되는 게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네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그리스도의 비밀 알면 되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나 인간이 지식으로 이것저것 끌어 모아서는 그건 그리스도의 비밀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비밀은 전체를 다 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려줄 때만 그리스도의 비밀이 와요. 이것저것 공부해가지고 긁어모은다고 ‘뭐 이쯤 했으면 내가 뭐 어지간한 비밀은 다 챙겼으니까 된다.’라는 것이 이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대체할 수가 없어요. 열심히 신학 공부하고 성경 공부한다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비밀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고 있던 비밀이에요. 그 비밀, 예수님이 하나의 단독으로 알던 비밀을 성령을 통해서 확대시켜놨는데 그게 뭐냐? 구원받는 사람의 전체. 구원받는 사람의 전체에요.

모든 것이라는 것은 인간이 숫자로 헤아려서 이것저것 챙기면 그게 모든 것이 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라 하는 것은 이건 하나 챙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거 뭐 일자무식이라도 초등학교도 안 나와도 이건 전체의 내용을 아는 거예요. 이걸 ‘계시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1:17).

공부 잘 못하고 성적이 나빠도 충분하게 구원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 속에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알 수 없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은 게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전체에 속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끝으로 구원받은 사람끼리 모든 것이 되어야 돼요, 전체가 되어야 돼요? 전체가 되어야 되겠죠. 전체가 되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도끼리 내놓는 모든 대화나 언어 속에서, 언어와 말 속에서 그리스도의 비밀이 이상스럽게 이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러나 다수가 모이면 ‘나 이것까지 알았어. 나 이것까지 공부했어.’가 나오잖아요. 그것은 아직까지 발굴 중이지, 몰라요. 그러나 진짜 구원받는 사람은 성령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비밀이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내가 이런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해서 이야기하네? 십자가에 대해서 말이 나오네?’ 그렇게 할 때 이건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469강-YouTube강의(취소 디모데전서 1:20)20240416-이 근호 목사


제469강, ‘취소’. 이야기해놓고 취소하면 노쇼(no show)죠. 그건 욕 얻어먹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취소 없는 구원이 없어요. 반드시 취소를 통해서 그 사람을 건집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지옥가기 싫어해요. 천국가고 싶어해서 교회 나오고 나름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시작을 누구로부터 했는가? 자기가 구원받고 싶어서 자기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이거 취소사유입니다. 본인이 본인한테 허락을 맡고, ‘나 이제 결심했어. 나 천국갈래.’ 그런 것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7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인간이 처신한 것과 비교를 시켜놨습니다. 대립을 시켜놨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들었지만 인간이 꾀를 내었다. 죄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래 지었던 정직한 인간은 이 땅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것, 노력하는 것 그것도 어디에 해당되는가? 얍삽한 꾀부리는 데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것도. 이것은 정직한 게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에게 나온 것치고 정직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수작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내용을 오해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맞다. 저거였었어. 저거 믿으면 나 구원받아.’라고 해서 사도 바울의 복음을 손들고 ‘난 이제 믿습니다. 나 이제는 신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슴없이 나오죠. 왜? 들어보니까 나쁜 소리 아니고 좋은 소리고 자기한테 이익이 되니까 마다할 사람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게 되면 이상하게 이게 변질이 돼요. 참 신기해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분명히 복음을 전했거든요. 분명히 복음을 전했는데 11장에 나오는 거 보니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 태어나버렸어요.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 보면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했어요.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참 이상하죠. 분명히 11장 4절에 보니까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또 우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현상이 이상한 게 아니고, 그거 뭐 당연한 거 아니야? 원래 그래. 복음 전하는 현장에 원래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 이유에 대해서 아까 말씀드린 전도서 7장 29절 보면 여러분 이해되시죠.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리도 들어야 돼요.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들추어내는 작용을 복음이 하는 거예요. 복음이.

이미 우리 속에는 꾀가 있는 거예요. 우리 속에. 꾀가 있는데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꼼수를 부릴 줄 몰랐어요.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 좋게 좋게 생각한 거예요. ‘아, 복음 전하면 믿으면 되지, 뭐. 아이고 고맙다,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지, 복음과 내가 맞닥뜨릴 때 내가 얼마나 얍삽한 생각을 하고 내 이익만 챙기는 식으로 복음을 곡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게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걸 당연시 여겨야 돼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야 이 거짓 사도들아, 너희도 복음 받았고 나도 복음 받았는데 나한테는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고난의 연속이다. 너희들 그렇게 복음 때문에 고난 받아봤어? 복음 때문에 고난 받아봤냐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생각해야 돼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복음 이야기할 때 고난 이야기했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하면서 나를 따라와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서 내가 죽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감안 안하고 지식으로 확보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 때 그렇게 복음을 허술하게 대충 믿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많았어요.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서 20절에 나오는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 양심이라 하는 것은 복음과 관련된 양심입니다. 뭐 착한 양심 그런 게 아니에요. 복음에 대해서 모든 걸 걸었던 그 양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가운데(파선한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더 이상 사도 바울과 일행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공격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탄에게 붙잡히도록 내어줬다는 거예요. 더 이상 복음 전파하는 데에 방해물 안 되도록 그런 조치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전혀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아니죠. 좋다고 진짜 복음이 최고라고 따라다닌 사람이에요.

따라다닌 사람인데 무엇과 틀어졌고 뭐가 문제냐 하면 복음이라는 그것이 지식이 아니고, 디모데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디모데에게 왔을 때 디모데는 복음 때문에 자기의 영광, 자기 위신, 자기의 체면, 자기가 빛나는 거, 자기가 높아지는 거 디모데는 고려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복음으로만 충분해요.

복음 전해가지고 교인 숫자 늘리겠다든지 복음 전해서 내가 설교 잘한다, 인기 얻겠다든지 디모데는 이런 게 하나도 없어요. 복음만으로 넉넉하고 그걸로 오케이에요. 그런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겠어요? 디모데와 대비해서 보면? 복음 전해서 자기가 어떤 유명 강사, 또는 복음에 대해서 도사, 신학의 도사, 복음의 전문가, 남한테 인기 강사, 이거는 자기부인이 아니잖아요. 써먹을 용도로 복음을 안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필수적인 게 뭐냐? 너는 아니거든. 이게 바로 취소다 이 말이죠. 그래서 너는 아닌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류하는 거고 복음에 대해서 곡해하는 인간들을 분류해서 내쫓는 그 기능이 복음 자체 내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자, 끝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걱정이 또 늘어지죠. ‘가만 있어봐. 가만 있어봐. 그럼 내 인생은? 내 미래는? 나도 요새 십자가 자기부인 영 전혀 없는데, 나 알렉산더 쪽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겠죠.

여기 디모데는 특징이 뭐냐? 예언에 따라 살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씀 지키면 사람이 한계가 있어서 스스로 좌절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말씀이 나를 떠나지 않아요. 그것도 365일 동안 말씀만 연구하는 게 아니고 하루 24시간 온종일 뭐 묵상하는 게 아니고, 이상하게 순간순간 말씀이 나를 질책하고 ‘그쪽 아니야. 그쪽 길 아니야. 그거. 그거는 세상 사람들 넓은 길이야.’하고 지적해줄 때, 내 실력이 좋아서 말씀 붙드는 게 아니고 주님 실력이 주님의 예언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믿는 내 의지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그 순간에 소급해서 다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말씀이 전부구나.’ 순간순간 그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