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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강, 459강) 마음, 심판의 양편 240206

정인순 2024. 5. 29. 10:29

458강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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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하림

458강-YouTube강의(마음 잠언 6:19)20240206-이 근호 목사


제458강, ‘마음’. 잠잘 때는 의식 못해요. 깨어있을 때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잠잘 때 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죽은 사람도 의식할 수가 없어서 죽은 사람한테는 모든 경찰 조사가 끝납니다. 종결처리 해버려요. 그리고 의식이라는 것은 의식이 있는 대상을 향하여 그 사람을 문책한다든지 아니면 책임을 요구한다든지 또는 격려를 하든지 칭찬하고 뭐 이런 것입니다.

그럼 이 의식이 뭐냐? 성경에서는 의식을 마음이라고 해요. 그러면 방금 한 말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마음이 살아있다.’ 의식이라는 것은 마음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마음이 살아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집중 공략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공략해요. 살아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마음을 집중해서 지목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의 입장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는데요. 인간의 마음을 인간 본인이 다룰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난처한 입장입니다. 인간의 의식을 인간이 어떻게 조정할 수가 없어요. 통제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아십니다. 아시고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현재 네가 다루지 못하지만 내가 네 마음을 다룬다. 그 다루는 방식이 율법이나 계명을 줘서 그 마음을 다뤄요.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성경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잠언서 6장 16-19절을 보면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두 가지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세 가지요,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네 가지,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다섯 가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여섯 가지,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딱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밝혀주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이 말씀에 대해서 네가 지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노출시키고 폭로시켜버려요, 이 말씀이.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의식적으로, 마음을 인간이 다룰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이 육칠 가지니. 싫어하는 것이 여섯 가지, 일곱 가지 되니’라는 말씀이 딱 들어오는 순간, 자기 마음을 하나님이 싫어하지 않는 마음이 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해버려요. 이거 가짜죠. 이게 인간 마음이 얼마나 교만하냐, 간사스러운가가 탁 들통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기 위함이에요. 인간의 마음은 본인이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마음을 중립으로 가져가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알았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이제는 선을 행할 거냐, 악을 행할 거냐 그건 내 마음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조정하기 나름이다.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조로 인간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문제 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특히 여기 16절에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라는 이 잠언서 6장 16절의 말씀을, 뉘앙스를 딱 들어보세요.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나 너 싫다는 뜻이에요. 난 네가 밉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 밉고 너 싫어. 그런데 너는 너를 안 미워하지? 너는 너를 안 싫어하지?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은 원래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의식이 있고 마음이 있으니까 의식이 있고 마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고요. 두 번째, 살아있는데 착하게 살아있다고 자부합니다. 그 의식은 내가 손댈 수 없는데. 주님 앞에 그냥 노출되는 거예요.

병원에서 엑스레이 찍을 때 엑스레이 기사가 제일 당부하는 게 있습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냥 딱 서 계세요. 자꾸 움직이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엑스레이입니다. 내가 찍어줄 테니까 내가 사진 찍을 테니까 그냥 가만있어. 내가 쏘는 대로 네가 거기에 대한 반응이 사진에 현상되어 나올 거야. 그 현상 내용이 뭐냐? 잠언서에요. 잠언서이고 성경 말씀입니다.

‘아, 나한테 이런 게 있었구나.’ 이러면 돼요.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애초부터 착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구나.’ 이러면 된다고요. 하나도 어려울 게 없어요. 주께서 사진 찍듯이 말씀을 딱 찍어버리면 그다음에 여섯 가지, 일곱 가지니, “교만한 눈과” 17절에 교만한 눈이 나오잖아요. ‘맞습니다. 제가 교만합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거짓된 혀와” ‘거짓된 혀는 제 주특긴데요. 그거 어떻게 알았죠? 제 주특기가 거짓된 혀에요.’ 남 속여먹는 데서 오는 즐거움, 쾌감 그 재미로 사는 거 아닙니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를 흘리게 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존재하면서 남한테 피해 안주는 방법이 없어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주위 사람들 다 피곤합니다. 나 때문에 피곤합니다. 힘들어해요. 인간은 자기의 의식된 마음이 괜찮은 줄 알고 있어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사람을 바늘로 콕콕 찔러요. 장희빈 사극 봤죠? 장희빈이 인현왕후 저주하기 위해서 짚으로 인형 만들어놓고 막 바늘로 찌르듯이 왜 그런 짓 합니까? 장희빈 자기는 살고 너는 좀 죽어줘. 이것 때문에 그짓을 하잖아요. 이건 뭐 장희빈한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다 그래요. 식구가 네 식구라면 나 빼놓고 세 식구가 나 때문에 힘들고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들고. 그게 식솔이고 식구라는 겁니다. 식구란 이름, 가족이란 이름이 그런 이름이에요.

그다음에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그냥 ‘떡 먹어라’하면 ‘에이, 맛 없다. 안 먹는다.’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엄마가 ‘얘, 선반 위에 떡 얹어놨는데 절대로 너 먹어서는 안돼.’ 하면 벌써 그 떡은 다 날아갔습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도 그랬거든요. 하지 말라면 기어이 내 마음은 타인의 마음을 위반하는 데서 독자적인 자기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범죄한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럼으로써 타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다음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하나의 조직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의 공동체가 되면 패 가름, 어느 것이 힘이 세고 어느 것이 권력자인가 봐서 딱 갖다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소외된 사람이 어떻게 되든 간에 힘센 사람에게 아부를 해야 되고 그 사람 편을 들어야 내가 신상에 안정성을 꾀하게 됩니다. 그래서 뭐 힘센 사람이 ‘저 사람 나쁘지?’하면 ‘예. 나쁘고 말고요.’ 서슴없이 자기가 본 것 말고 과도하게 해서 같은 한 패를 먹음으로써 비난하는 겁니다. 야구 같은 것 응원할 때 홈구장에 있는 응원단은 상대방 편에 가서 응원하면 그건 안되죠. 욕 얻어먹습니다. 항상 내 편, 내 편을 조직하면서 자기의 안정성 있는 존재의 바탕을 마련하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다음에 같은 뜻이에요.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누가 더 세냐. 누가 나한테 더 도움되는 사람이냐. 누가 나한테 나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냐.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고 미워하는 건데 세상에 어떤 인간도 여기서 벗어날 인간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이렇게 지적하시거든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내 손으로 치료가 안되니까, 치료하려고 엑스레이 사진, 말씀으로 탁 찍었다고 보면 돼요. 시작은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내 마음, 내 의식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이게 구원의 시작입니다.


459강-YouTube강의(심판의 양편 시편 119:67)20240206-이 근호 목사


제459강, ‘심판의 양편’. 분류작업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딱 마음에 와닿는 게 있어요.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 쭉정이하고 알곡.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리고 진노의 그릇과 사랑의 그릇. 그렇게 분류하게 되면 뭐가 문제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좋은 쪽에 두려는 경향이 본인에게서 삭제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고기하고 나쁜 고기가 있는데 어느 누가 나쁜 고기 되고 싶습니까? 그러니까 성경 해석 초장부터 잘못된 거예요. 이것을 탈피해야 되는데 탈피할 수가 없어요. 나쁜 건 남이 가져가고 좋은 건 내가 갖고 싶은 인간의 탐욕적인 마음을 본인이 어떻게 극복할 수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마음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문제성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 이런 이야기하면 눈이 번쩍 한다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언의 아니면 말로도 어떤 압박감을 막 주죠. ‘천국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자기 혼자 김칫국 마시면서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압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일종의 시위, 데모를 하는 식으로 강력한 철야기도부터 해서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발점부터가 성경해석을 들어갈 자격도 안되고 볼 자격도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해석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분류를 하는데요. 인간과 말씀 사이를 분류해버려요. 천국과 지옥이 아니고 인간과 말씀 사이를 분류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과 이쪽 편에 말씀, 이렇게 분류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도 그걸 몰랐어요. 본인이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라면 이미 분류에 의해서 이쪽 천국에서는 제외된 존재에요. 그 자체가 인간입니다. 처소에 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14장에서.

그게 이미 구약에 나옵니다. 시편 119편 67절, 그리고 71절, 두 절을 보게 되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고난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말씀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고난이 주어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좋은 편에 두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말씀이 다시 우리로 하여금 좋은 편에 못 서게 분류를 시키는 거예요.

네가 성경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모든 구원의 능력은 말씀에서 나왔다’ 하는 그 자리에서 너를 시작케 하기 위해서 너는 너의 모든 뜻과 상치되는 상황이 너에게 들이닥쳐야 된다. 그걸 두 자로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천국 가려고 하고 좋은 고기 되려고 하지, 인간은 고난 쪽에 서려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고난 쪽에 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편하게 천국 가고 싶지, 고생하면서 천국 가는 거 싫어해요. 하여튼 고난 자체가 우리 생리에 안 맞아요. 힘들게 사는 것 자체를 우리가 자꾸 거부하고 싶어요. 힘들게 사는 거. 열심히 돈 벌고 공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고생하려고 합니까? 편하게 살려고 돈 벌고 공부하고 하잖아요.

고난을 누가 원합니까. 원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말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쓸데없이 말씀을 쥐려는 자의 손을 때리는 거예요. ‘건방지게 네가 말씀을 가져? 저리 안 가?’하고 떼놓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없는 고난의 상태에 돌입되는 겁니다. 고난의 자리에 딱 들어가니까 야, 자동적으로 말씀이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뭘 아느냐 하면 ‘내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쉽게 말해서, 나만 생각했더니. 나 잘되는 것, 나 편한 것과 나 구원받는 것만 생각했더니만 주님은 내 편이 아니고 말씀 편이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예수님은.

누가 구원받습니까? 말씀대로 되지 뭐. 간단한 문제에요. 나 구원받습니까?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지옥 가는 겁니까? 말씀대로 고난받을 때 구원받는 거예요. 말씀이 먼저 와서 내 중심을 해체시켜 버려요. 부숴 버려야 돼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안 돌아가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그전까지는 나는 내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게 그릇 행했죠. 뭔가 착각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세상이 내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러면 세상은 자기 소기의 목적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고생을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수모도 감당하리. 이것은 자기의 각오고 자기의 오기죠. 그것이 바로 그릇 행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자기는 고난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에요. 고난은 말씀을 위해서고 고생은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생과 고난이 다른 겁니다. 실컷 고생하고 지옥이나 가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지옥 가는 거예요.

시편 119편 71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니까 고난당하기 전까지는 주의 율례를 모른 채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주의 율례는 관심 없이 자기가 자체적으로 어떤 법칙을 만들고 이만큼 고생했으면 이만큼 기도 악바리로 했으면 주께서 양심 있으면 응답은 해주시겠지.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건 자기를 위한 법칙이에요. 남을 위해서 합니까? 이웃을 위해서? 아니에요. 그런 법칙을 만들고 그 법칙에 따라서 자기가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는 것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 내에 자기가 만든 법칙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고난이 아니고 스스로 자처해서 고생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 자학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한창 고난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고난주간이었던 모양이죠. 고난주간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제자들과 술 잡쉈어요. 술 잡쉈다는 이야기 나와요. 술 잡숫고 음식 먹고 ‘실컷 먹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란 듯이. 그러니까 딱 걸렸어. 너희들 딱 걸렸어. ‘지금 세례 요한 제자들도 고난받는데 당신과 제자들은 지금 완전히 잔치 분위기다. 남들은 지금 고난받기 위해서 자기 금식하는 거 안 보이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유대인들의 특징은 그겁니다. 하나님 앞에 내 할 도리를 해야 그 결과가 주어진다고 본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고난이 오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라고 본인이 그걸 만들어요. 장만을 해요. 알아서 스스로 자기를 때린다고요. 스스로 자책하면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모든 티를 다 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고난? 고난은 딱 하나야. 나를, 신랑을 잃어버릴 때 고난이야.” 아무리 잘 먹고 부자가 되도 고난이에요. 수입이 늘어나고 몸 건강하고 무탈해도 고난이에요. 예수님 없으면 모든 게 고난이다. 반대로 아무리 몸이 아프고 돈이 없더라도 나(예수님)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잔치다. 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부가 아니고 신랑이기 때문에.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한테 말씀의 완성이 들어있습니다. 주의 율례가 예수님한테 꽉꽉 다 담겨있어요. 내 쪽에는 없어요. 주님 쪽에 있어요. 주의 율례를 다 이루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고 복입니다. 그 주님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철저하게 무시당해도 상관없어요.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주님 되기 위해서 저한테 제 뜻대로 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분류를 할 때, 내가 어디 갈꼬? 천국? 지금 이것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쪽과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에게 버림받았으니까, 인간에게 버림받은 쪽과 인간 쪽을 분류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으로 분류해서 주님이 주님 되는 그 고난이 우리에게 도달한다면 뭘 해도 우리는 천국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