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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강/457강) 의식, 분류 231219

정인순 2024. 5. 29. 10:27

456강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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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하림

456강-YouTube강의(의식 예레미야 5:4-5)20231219-이 근호 목사


제456강, ‘의식’. 여기서 말하는 의식(意識)이란 무의식(無意識)의 반대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말로 하면 ‘안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을 못하지만 살아있는 한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저것 알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의식으로 알면 의식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어떤 행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뭘 알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의식적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 그때는 본능대로 움직인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계산하거나 따지지 않고 육신의 욕구대로 그냥 움직이죠. 그때는 의식 차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식 차원이 아닐 때는 벌 세우고 이런 게 의미가 없어요. 본인이 따져서 행동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나오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어린아이가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좀 크면 아이가 무의식에서 드디어 의식으로 나아갑니다. 요모조모 따질 줄 알죠. 따지는데 어떻게 따지느냐? 요게 나한테 이익이 되겠느냐, 손해가 되겠느냐, 그렇게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뭐로 마중 나가느냐 하면 의식가지고 마중을 나가요. 하나님 말씀이 드디어 왔다. 마치 택배 배달받듯이 말씀이 왔다. 벌써 의식하죠. 의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준수하고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잘 돋보일 수 있고 그리고 말씀을 지키면 내가 얻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충분히 채워준다는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서 휙휙 돌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도 내가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추려서 골라서 받게 돼요. ‘말씀을 내가 지키면 뭐 해줄 건데요?’라는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까지 성의를 표했으면 하나님 쪽에서도 가만있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주실 것이라는 생각, 이 전체가 ‘의식’하는 거예요.

자, 어린아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어린아이는 의식하지 못해도 필요한 것은 부모가 알아서 주십니다. 이걸 하나님과 연관시키면 우리가 어린아이 같아서,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니까, 어린아이 같아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불필요한지 아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백성이 지옥 갈만한 것은 안 주십니다. 그런데 천국 갈만한 것은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식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좀 컸다고, 크면 의식이 있으니까, 의식을 다른 말로 하면 ‘자립성이 단단히 갖추어져 있다’, ‘독자적이고 독립 성향이 강하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의식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린아이같이 보시고 무엇이 필요하냐 안 필요하냐를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돋보이는 것대로 그것을 추려서 자기가 의식적으로 가려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는 하나님의 본래 취지가 있는데 그걸 받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취지와는 완전히 배타적이고 충돌되는 대립이 되는 그런 쪽으로 점점 본인을 굳혀가죠.

이런 일이 오늘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에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5장 4절,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우준하고 비천해서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취지, 뜻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5절에 보면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 말씀이 진리라고 여기고 듣거나 받거나 해야 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아요. 왜냐하면 나름대로 하나님의 길과 법을 그들이 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예, 잘 압니다.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6절에 보면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갓난아이 같으면 갓난아이에게 부모가 뭘 요구하질 않아요. 그리고 갓난아이에게 나쁜 걸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 나쁜 걸 주지 않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좀 컸다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을 자기 욕망대로 한번 가보겠다고 나서니까, 하나님 보기에는 어린아이 같아야 되는데 자기가 성인이고 어른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말씀도 내가 잘 알아서 내가 처신하겠습니다, 하는 쪽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을 받을 때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요? 말씀을 받을 때. 그래서 다음과 같은 걸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 통해서 말씀을 주게 되면 그들은 시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 이유를 알아요. 항상 인간은 스스로 서면 안돼요. 주의 은혜로 살아야 돼요. 그런데 언제부터 좀 배부르고 하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어디가 천국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하나님 뜻을 빙자하되 자기 뜻을 고집부리는 겁니다. 자기 뜻이 하나님 뜻이라고.

그 내막을 보게 되면 본인의 그 잘남, 자랑거리가 깨질 생각이 없어요. 계속 자기는 잘난 맛에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깨어버려요. 이게 사랑이에요.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안 듣는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철수하는 게 아니고, 그 말씀대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그런 환경 쪽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일관되게 밀어붙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다시 옛날을 되돌아봐야 돼요. 아, 그때. 그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 고집이 왕고집이었구나. 뭣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내 인생 내가 개척한다고, 주께서 선하게 인도하는데 자기가 자기에게 목자가 되고 말았어요. 목자는 따로 있는데 자기가 목자에요.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 인생을 개척하려고 나서는 그 시건방진 것, 그런 인간이 하나님께 와장창 깨어질 때 도리어 그들은 눈물 흘릴 게 아니고 진정으로 제대로 하나님께 고맙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인간의 의식이 이처럼 인간에게는 문젯거리입니다.


457강-YouTube강의(분류 요한계시록 3:1)20231219-이 근호 목사


제457강, ‘분류’. 분류라는 것은 섞이지 않도록 따로따로 가려내는 것을 분류라고 합니다. 섞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지구가 일찍이 있고 사람들은 이 지구가 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하는 겁니다. 양과 염소로 분류하는 겁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 분류하는 것이고 나쁜 고기, 좋은 고기를 분류하는 거고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합니다.

이 분류작업을 ‘심판’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분류작업에서 이미 끝난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이야기해요. 인간의 자리는 자기가 선택할 자리가 없어요. 하나님이 정하신 딱 두 자리 중 하나입니다. 사망이냐, 생명이냐. 이것을 달리 이야기해서 요한복음 3장에 입각해 보면 어두움에 속했느냐, 빛에 속했느냐.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어두움도 아니고 빛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주 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짜릿할 정도로 이야기해요.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과 생명책에 명단이 빠져있는 사람, 딱 두 종류입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이 있고 생명책 명단에 없는 사람은 어느 책에 있느냐? 행위책에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책이 달랑 두 권으로 남습니다. 섬뜩하죠? 섬뜩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분류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흔쾌히 이걸 용납했겠어요, 아니면 방해하겠습니까? 아주 강력하게 방해를 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을 본인의 의지로 결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선악과 나무를 따먹고 그 지식을 확보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선악으로 심판하는 것은 주님 소관이기 때문에 심판받는 대상인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선과 악의 지식을 가져버리면 본인이 가진 지식가지고 본인을 재판하는 경우가 벌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각해서 심판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너를 심판하는 그러한 지경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따먹지 마라 했거든요. 그리고 선악과 나무는 악마를 노리고 악마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준 거예요. 상대가 악마 상대였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악마 심판에 중간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을 자기의 볼모로 삼는 거예요.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 아시죠? 전쟁하면서 하마스가 뭐를 볼모로 잡았습니까? 이스라엘 민간인을 볼모로 잡았잖아요. 하나님이 007이고 악마가 범인이라면, 007이 총을 쏘려고 하는데 범인이 본드 걸을 갑자기 납치해가지고 자기 앞에 딱 세우면서, 나를 죽이려거든 네가 사랑하는 네 여자까지 죽이고 난 뒤에 날 죽이라 하고 여자를 딱 볼모로 잡잖아요. 악마가 인간을 볼모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을 포기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을 놓쳐버리면 자기 가슴팍이 정면으로 다 보이기 때문에 자기 가림막이 사라져요. 인질이 없는 거예요, 인질이. 참 이거 보통 문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인간들은 자꾸만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심판합니다. 내가 나쁜 짓 안하고 바르게 살면 그거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교회 안 나가다가 나가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거 하나님 안 보이십니까? 이정도 착하면 됐죠, 뭐 어떻게 더 착합니까? 저도 착함과 악함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압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는 구별 못한다는 거예요. 너는 구별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선과 악의 지식을 갖고 있는 이상 너는 선악을 구별 못해요. 선해도 악이고 악해도 악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 중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면 좋겠습니까?

아까 생명책 이야기했는데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나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꼭 껴안고 있어요. 자기 자신을. 마귀가 인간을 안 놔주듯이 인간도 자기를 꼭 껴안는데 인간은 자기 이름을 앞장세우면서 그 이름 뒤에 진짜 자기가 숨어있는 방식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나옵니다.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데라 하는 것은 원래 그 지역의 이름이니까 별 의미 없는데, 그 사데 교회가 무슨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으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 교회에요. 사데 교회 스스로 지은 별명이 ‘우리는 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 이름 뒤에 온 교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겁니다. “그치 그치? 우리 다 살았지, 그치?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다 살았잖아.”라고 그 이름으로 전부 한통속이 돼서 모여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그 이름이 누가 분류한 이름이냐?” 네가 산 사람 되고 싶어서 네가 스스로 너를 분류시킨 이름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죽은 자 쪽은 싫고 산 자 이름이 내 이름에 맞다고 난 그걸 선호한다는 겁니다. ‘나 죽은 자 되기 싫어. 나 살아있는 자 되고 싶어.’라고 한 거예요.

사데 교회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거 취소.” 그거 취소하라는 거예요. “살았다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너의 그 이름, 살았다 하는 이름 그것은 너희들끼리 서로 의견이 모아져서 한 이름인데 나한테는 안 통한다. 그 이름 무효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 있는데 내가 이름 지어줄게. 너희는 죽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장 1절.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2절에 보면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네 평가 중지하고 내 성령이 교회에게 하는 평가를 받아들여라. 실상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다. 그걸 굳게 하라는 말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산 자의 이름이 아니고 죽은 자의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갖고 있고 선악은 자기를 좋은 쪽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인간은 쉬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자기를 좋게 봐요. 항상. 자기를 좋게 보는 인식을 주께서는 그러니까 너는 죽은 자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뜻은 뭐냐? 생명책이에요. 생명책인데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이 말은 생명책 자체가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내 행위는 죽은 것이고 죄악된 것이니까 내 행위를 포기하는 거예요. 내 행위를 포기하고 주님의 행하심만 붙드는 걸 가지고 이겼다고 하는 거예요. 사데 교회 그때.

이 말은 사데 교회 근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선악과 지식을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걸고 도박, 게임, 투자, 투기, 비트코인, 뭐 온갖 거 다 하죠. 자기 이름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확인해주기 위해서 행하는 사람밖에 없을 때, 그들에게 이겨라. 무엇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으로 구원받았다. 이게 바로 이긴 자요,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 뒤에 주의 이름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책에 이름이 살아있는 참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