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13:3-8 / 상처와 상처

정인순 2024. 5. 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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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상처

 

이근호
2024년 3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13:3-6

(13: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13: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문제가 자신에게 있다고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항상 자율적으로 살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이 없는 입장에서 ‘선지자 놀이’도 일종의 취미처럼 간주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은 충동에 한 몫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민족 가운데서 애굽에서 구출하는 공개적인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 민족 내에서 가짜 선지자에 대한 처벌이 사정없이 처리되도록 율법으로 지시내려져 있습니다.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신 13:6-9)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율법의 효력을 살리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활용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 놀이를 한 자를 그들의 가족 손에 의해서 칼에 찔려죽게 하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시대상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더는 선지자가 필요없는 시대, 곧 종말이 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종말에는 선지자의 말을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와 참된 메시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들에 의해서 꾸며낸 선지자는 마지막 종말 때에 결국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가짜 선지자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은 율법의 차질없는 적용에 따라서 합당치 않는 자는 필히 다 죽어야 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이 자신의 육을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이 알려지는 때가 곧 종말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이면 마냥 기다리면 오는 때일까요? 아닙니다. 종말은 인간의 육의 본색과 하나님의 영의 본질이 마주치고 충돌되면서 등장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활동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합세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 육의 그 한도를 드러낸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가룟 유다의 태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는 일관되게 ‘자기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자기를 위해 사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아니라 ‘육’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보여셨지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인간 곁을 떠났습니다. 이상한 일은 바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그런 무(無)-관계에서 비로소 관계가 성립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띄게 여기저기 나타나셔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호소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육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성도는 자신이 ‘육’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육’이란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육’의 특징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삽니다. 십자가 사건의 영속성 안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사도는 제시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그렇다면 저희 자신을 위해 살면 나오는 열매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즉 인간은 자신이 육이기에 이런 육의 특성을 본인이 저지할 수가 없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 놀이한 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들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 가룟 유다의 후손들 같습니다. 도무지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1:28에 나오는 말씀은 무슨 상황일까요?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여기에 ‘구원의 빙거’, 즉 ‘구원의 증거물’이 되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들은 누구이지요? 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사는 존재인지를 알게 된 자들입니다. 마치 십자가 옆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강도 같은 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바로 이 모습이 가짜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들에게는 비로소 감사하는 분이 있고 고마워하는 분이 있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분이 생겼습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들은 인간들의 모든 것이 율법에 막히고 그 율법에 의해서 저주의 대상임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아무리 스스로 잘났다고 인물 내세우는 자도 엑스레이 사진으로 찍으면 그저 희고 검은 자국들만 비쳐나오듯이 주님의 십자가 상처 앞에서는 할 말을 잃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시 38:11)

바로 주님의 상처에서 나온 효력이 육을 장악한 악마의 위세까지 덮쳐서 감사와 찬양과 감탄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이 십자가 현장으로 이끌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스가랴 13장 3-6절(상처와 상처) 2403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3장 3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아멘.

방금 우리가 읽었던 이 상황. 상당히 이상한 상황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이방 민족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냐? 이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모든 선지자가 자신의 거짓을 자백하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는 선지자가 더는 선지자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 이스라엘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이방 민족에서는 이 대목을 보고 도리어 이상하게 여깁니다.

언제 인간이 선지자 믿고 선지자 기대 걸고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잖아. 사람은 자기가 판단해서 살아가지 “선지자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그걸 묻지를 않죠. 물론 이방 민족도 신이 있지만 신은 아쉬울 때 부르는거고요. 아쉬울 때. 자기가 답답할 때 이렇게 찾아가지고 뇌물 바치면서 “이번 일만 잘 되면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하는 식으로 그런식으로 신을 이용할 생각이지 전적으로 신의 뜻을 기대하고 산다는 것은 우리 이방 민족한테는 오늘 본문같은 내용에서는 당최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이게 이스라엘한테는 말이 돼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가 오면 최종적인 구원자가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구원자가 오게 되면 더는 선지자가 필요치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겁니다. 일반 이방 민족, 이스라엘 아닌 사람한테는 선지자가 없어도 내 마음대로 살았고, 메시아가 와도 내 마음대로 살았고, 메시아가 있어도 없어도 그건 관심 없고 나는 시작도 내 마음대로 끝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이게 이방 민족의 특징이거든요.

근데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늘 의존하던 그 역사는 전에는 선지자들의 말을 귀 담아 듣고 선지자의 말을 위반하면 우리에게 큰 탈이 난다, 낭패 난다, 우리나라 망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의지하다가 마지막 되게 되면 이제는 선지자 대신 메시아의 말을 듣고 살면 되는 그런 시대가 오기 때문에 더는 선지자가 필요 없는 시대가 종말이죠. ‘끝’이다 이 말이죠.

우리 일상생활에서, 교인도 마찬가지고 성도도 마찬가지고, 저는 교인과 성도를 구분 짓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고 교인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 하면서 수시로 자기의 직장 일이나 자기의 일에 매진하면서 “이스라엘이 왜 애굽에서 나왔지?” 그걸 가끔 이렇게 생각해 봅니까? 생각 안 할 거에요. 뜬금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옛날에 한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겠지. 아주 옛날에, long long ago. 아주 먼 옛날에 그런 일 있었는데 지금은 내 직장일 잘 다니고 내 하는 일 잘하면 되지 뭐 왜 그들이 애굽에서 왜 나왔지?” 이렇게 되어 버리죠.

애굽에서 왜 나오냐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의 일상에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그 이야기가 스며들지 않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일기장 쓸 때 “오늘은 뭐 3월 26일 오늘은 날씨가 맑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한번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생각한다.”그런 일기장을 쓸 턱이 없죠. “오늘도 엄마가 숙제 안 했다고 혼냈다. 다음부터 숙제 잘 해야지. 일기 끝” 이래가지고 끝나잖아요.

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왜 나왔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이 하나의 기관차, 화물열차라고 보면 거기에 담긴 게 있어요. 세상의 시작과 세상의 마지막 때 마지막이 이스라엘 역사라는 그 객차에 실리게, 화물칸에 실리게 되어있어요. 삑삑 하고 기차가 달리면 이게 목적이 있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마지막 때까지 그들은 기차가 달립니다. 물론 그 기차가 순순히 마지막 때 그냥 골인하는 것이 아니고 쳐박지만요.

이스라엘 역사가 끝장났을 때 그때가 바로 이 세상의 마지막 때거든요. 1972년도에 괌에 남태평양 요꼬이 소진이라는 일본사람인데 1972년도입니다. 그 근처에서 괌 근처에서 새우 잡이 하는 어선이 뭐 강에 보니까 어떤 남자가 초라하게 허름한 남자가 강에서 고기 잡으려고 있더라 이 말이죠. 그래서 가서 “이상하게 이 밀림에 사람이 살 수가 없는데 왜 살지?”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니까 일본 2차대전 패잔병이에요. 1945년 이미 전쟁 끝났습니다. 끝났는데 그 사람은 괌 28년 동안 밀림에서 혼자 착각을 한 거에요. ‘나가면 미군한테 잡혀 죽는다.’

바깥에 전쟁 끝났는데, 종말이에요. 벌써 전쟁은 종말이에요. 끝났어요. 끝났는데 혼자 지금 황도에 군인이 되어 가지고 미군하고 싸운다고... 홀로 그러고 있어요. 결국 그 사람은 일본에서 그래서 데려와가지고 일본에까지 데려오니까 그 사람이 아직도 자기의 종말적 인식을 갖지 못하고 종말이, 전쟁은 안 끝났다 인식을 가지고 ‘세상은 아직도 전쟁 중이야’라는 인식을 가지고 발발 떠는 거에요.

미군이 나를 조사하고 난 뒤에 필히 나를 죽일 것이라는 그것 때문에 발발 떨고 있었던 겁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뭐 브라질에 가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메시아가 오게 되면 모든 것 끝났어요. 끝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미, “그거 알아서 뭐 하는데?” 알아서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은 다 소모되었어요. 그 시대는 끝났어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서 내가 천국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자.” 근데 그렇게 계산하는 시대는 이미 훌쩍 지나간 이야기, 그 옛날에 훌쩍 지나갔어요.

선지자도 필요 없고 선지자가 더는 없습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없으니까 그 당시,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선지자가, 아직도 선지자 노릇 하고 있는 사람은 패잔병 되는거죠. 그 패잔병을 오늘 본문 예언에 의하면 “너희 이리 와. 선지자야?”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진짜 너 선지자 맞아?” “밥 먹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여기에 2절에 보면,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절에,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부모가 불러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그 거짓말하는 자기 아들을 3절 끝에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칼로 찔러버리는 거에요. “이게 어디서 시대도 분간 못하고 구라치고 있어. 끝났어, 야. 끝났어. ‘이게 신의 뜻이다, 이게 하나님 뜻이다’. 아니야. 그 말 한 자체가 니가 가짜라는 뜻이야.”

그런데 왜 부모의 손에 의해서 선지자 노릇하는 아들을 죽게 하는가? 그거는 신명기 13장 8절에 보면, “너는,” 가짜선지자를 말하죠. 가짜 선지자, 8절에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이게 뭐냐 하면 가족에 의해서 여기 6절에,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같은 친척이나 가족이 쓰잘데기 없는 예언 하거든 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봐주지 말고, 애석하게 여기지 말고 또 경찰 온다고 숨기지 말고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먼저 니가 먼저 손대고 다른 백성들로 하여금 돌로 쳐죽이도록 해라 했어요. 신명기에.

그러니까 이 신명기의 이야기가 어느 나라 이야기냐 하면 이방 나라 이야기 아니에요. 이스라엘 이야기라고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선 구원하시되 애굽에서 그들이 탈출 해야 되는 가를, 출애굽 되어야 비로소 이스라엘 되는 그 경과에 대해서, 그 원칙에 대해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꾸 놓치는 경향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아니면요, 모든 나라는 이스라엘 아니면 나머지는 모두 이방 나라에요. 이방 나라가 예언을 하든 뭘 하든 간에 남한테 피해 안 입히면 “그냥 너는 너대로 사세요”하고 그만두면 돼요.

세상에서는 무당도 많고, 점쟁이도 많고, 무덤까지 파내는 파묘도 있잖아요. 흙을 먹으면 “이 흙 봐라. 이게 흙이 안 좋아.” 이런 거. “무덤 여기 쓰면 4대가 저주받아.” 그런 구라치는 사람도 있고, 쇠말뚝을 박아가지고 태백산맥 박아가지고 “한국 민족 망해라”하는 그런 일본의 정책도 있고, 있어요. 그러나 그 뭐? 그 뭔데요 그게? 뭐 그거 취미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쇠말뚝 박고 무덤 파내고 점치고 타로점하고 이런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집니까? 안 달라져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여호와와 알라신의 전쟁이 아니에요. 하마스 이 사람들은 귀신 들려가지고 알라신을 믿어요. 근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안 믿습니다.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11퍼센트는 아예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난 죽으면 죽었지 군에 안 간다. 나머지는 뭐냐? 돈의 힘을 믿는 거에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기술, 군사 기술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하마스 작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기 내부에, 아직도 여호와냐? 여호와가 우리한테 밥 먹여줘요? 하나님 믿는다고 해서 살림살이 나아진 적 있습니까? 살림살이는 허경영이가 책임지는 거지 뭐, 다른 사람은 책임 못 져요. 그래서 우리가 성도라면 이스라엘에게 주목해야 돼요. 이스라엘의 그 특수성, 특이성. 좋게 말해서 특이성, 특수성이지만 그냥 우리 세상스럽게 말하자면 괴이함. 참으로 괴이한거에요. 자기 아들 뭐 취미 삼아 이렇게 “예언 함 해보까?” 그래서 sns에 예언하고 “2050년 전에 망한다.” 이거 뭐 재미 삼아 올릴 수 있잖아요. “쳐 죽여라.” 이게 뭐에요, 이게.

그냥 심심해서 해 봤다는 데 그걸 왜 쳐 죽여야 돼요? 이거 납득이 안 되잖아요. 여기 4절부터 5절에 보면, 심문을 합니다. 쳐 죽이기 전에. “니 뭐야? 선지자야? 뭐 털옷도 입지 않고” 뭐 이렇게 예언할 때 뭔가 위장한 거에요. 예언자로 위장하니까. 그렇게 이제 심문을 한 거죠. 심문을 하던지 안 그러면 모스크바 테러범한테 고문하듯이 해가지고 “뭐야 너.” 하니까 5절에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 아냐.” 여기 말할 때 “나는 선지자 아니야” 하고 그냥 말하면 실감이 안 나요.

벌벌 떨면서 “나는 선지자 아니에요.” “그럼 뭐야 너.” “농부에요.” 그러면 왜 너 선지자 흉내낸다고 뭐 이렇게 선지자가 남하고 특이한 문신 같은 거 신체적으로 뭔가 있을 때 먹어주거든요. 그 당시에 이방 종교에서는. 무당들이 뭔가 신내림 있어 줘야 먹어주고 한국에 기독교 감리회, 그리고 성공회, 천주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그리고 조계종, 그리고 러시아정교회. 이 종교에 공통점이 있어요. 유니폼을 입는다는거에요. 유니폼을. 원불교는 유니폼을 안 입어요. 약간 높은 사람은 유니폼 입고.

유니폼을 입어요. 왜? 특이하게 보이기 위해. 그러니까 이거는 유니폼 정도가 아니고 몸에 상처를 내는거에요. 선지자가 특이한 신의 계시를 말하기 위해서는 고립되는 삶을 스스로 도모해서 일상의 자기 밥벌이에 분주한 사람과는 너무나 초월적인 삶의 흔적을 자기 몸에다가 그걸 운반하고 다니는 것처럼 뭘 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먹히니까. “너 상처 뭐야” 하니까, “이거요? 친구한테 부탁해서 찔러라 해서 친구한테 부탁해서 난 상처”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본문을 지금까지 이렇게 설명했는데 설명을 해도 우리가 오늘날 이 본문을 보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이런 거에요. “그게 꼭 죽을 일인가? 사이비 선지자가 있었다. 그래서 뭐? 안 믿으면 되잖아. 그것 무시하면 되잖아.” 우리 주변에 점쟁이 많고 뭐 무당 있어도 우리는 그 사람보고 “왜 이래요, 나가세요.” 뭐 이렇게 간섭 안 하잖아요. 시끄럽게 굴면 조용하라고 신고는 하지만 뭐 그렇게 해꼬지는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니까요.

문제는 이겁니다. 빌립보서 1장 28절,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아요.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내가 전한 말은 멸망 당할 자에게는 멸망 당할 자 맞구나 하고 그걸 노출 시키는 증거가 내가 전하는 복음이고,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오, 니 구원 받겠네”라고 드러내는 증거가 역시도 동일한 말, 동일하게 전하는 사도의 말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정말 이상한 거에요. 이게 “그렇다”하고 넘어가면 안 돼요, 여기서.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 보기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어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치면서 나를 믿지 아니하면 지옥 가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 얻는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 아무도 안 믿었어요. 놀라운 사실은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잡을 수야 잡을 수 없고 찾아야 찾을 수 없는 사라진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거에요. 구원받을, 눈에 뭐 봐야 뭐 붙들고 믿든지 할 건데 정작 당사자, “나를 믿어라”하는 당사자가 날라가버렸어요.

없어졌어요. 사라져버렸어요. 평소에 살아계실 때 그렇게 예수님 자신이 기적을 베풀면서 병도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물 위를 걸으면서, “와, 놀랍다.” 이게 더 효과적 아닙니까? 그게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잖아요. 그런데 부활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부활한 분은 어디갔지? 안 와요. 없어요. 부활했다는 소식 있고 없어졌어요. 그러면 뭐냐? 만사는 그냥 오케이. 그냥 옛날 그대로 물결은 잔잔해져 버렸어요. 없어요. 없는데 사도 바울이라는 분이 등장하고, 사도가 등장하고 사도 바울이 등장해서 하는 말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인간은 사람이 아니고 육이라는 겁니다. 육.

이 사도 바울의 이 거침없는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인간은 육을 만들어 놨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만든 사람과 인간의 육의 차이점이 뭐냐? 사람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서 요즘 이야기하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요. 주님을 위해서.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나’라는 게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나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는 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사라져버리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분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그분을 위해서 보이는 내가 있다는 거에요. 이 관계성. 그것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냐?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에요. 그러면 멸망하는 사람은 육, 천국 가는 사람은 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보기에 인간이, “자기 인간이다, 사람이다, 나도 육체가 있다.” 이걸 가지고 가짜라는 겁니다. 가짜.

사람이 길 가는데 사도 바울이 와가지고 “어이, 가짜. 김가짜, 박가짜. 가짜 좀 봅시다.”하면 가짜 되게 기분 나쁘겠죠. “내가 왜 가짜인데?” 사도 바울에게 “당신이 뭔데 니가 뭔데 가짜니 진짜니 당신이 판단해?”하면 사도 바울 같으면, “스가랴 13장 봐. 너 선지자야 아니야?” “아니야.” “아닌 게 어디 선지자 노릇을 해.” 칼로 죽여버리는 거에요.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일이 이방 나라에게 허락도 없이 완전히 끝까지 확장된 거에요. 왜? 마지막 때기 때문에.

이방 나라는 마지막 때 이미 제껴 난 거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마지막을 보여줬으면 그 마지막은 이방 나라 전체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수십 년 전에 우리가 박사 동네에 살았거든요. 박사 동네 그 위에 올라가면 대구 쪽에 가면 음양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음양이라는 그 마을에 어떤 아주머니가 놀음하는 남편하고 되게 싸워가지고 화가 치밀어 오른거에요.

애가 둘이나 되는데 남편은 축사하는데, 가축 키우는데 하여튼 화가 되게 나가지고 농사짓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농약 있으니까 농약을 그냥 마셔버렸어요. 농약을. 화가 나서. 그런데 그 아주머니께서, 그 부인께서 농약을 마시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마시기 전에 하나 까먹은게 있어요. 뭐냐 하면 자식들 생각 안 하고 농약을 일단 먹었어요. 먹고 보니까 아, 이거 내 죽으면 자식들 불쌍해 죽겠거든요. 그래서 허겁지겁 어떻게 119를 불러가지고 갔는데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죽었어요.

자, 이 부인, 이 아주머니의 문제점은 뭐냐? 이스라엘을 생각 안 한 거에요.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하여 산 겁니다. 놀음하는 남편, 자식들, 그 남편 믿고 끝까지 진짜 고생고생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인생이 너무나 좌절되고 절망적인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왜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느냐? 왜 재미있는 일 없고 속상한 일만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으니깐 남편이 또 대들겠지요. 그러면 여자가 더 바가지 긁겠죠. 그러면 그 여자, 그 부인 입장에서는 뭐냐? 왜 내가 좀 좋은 남편 만났으면 나쁜 부인이 안되잖아요. 왜 세상은 나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상황이 몰고 가느냐 이 말이죠. 그게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게 그 아주머니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아주 사정없이 냉혹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5장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오로지 눈만 뜨면, 눈 감아도, 꿈에도 마찬가지, 눈을 감든 뜨든 24시간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사는 기쁨과 재미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이거는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이거는 가짜라는 거에요. 가짜니까 없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해당 되는 이 이야기가 스가랴에 보면, 이스라엘 쪽에서는 뭐냐? 바로 거짓 선지자가 바로 이런 육적인 식으로 한 거에요. 그러면 오늘 본문 스가랴에서 거짓 선지자가 자기의 모든 본색이 들통 나가지고 “나는 선지자 아니라예. 나는 그냥 농부인데, 그냥 뭐 선지자 하니까 멋있어 보여가지고 상처 내가지고 한번 또 털옷도 입지 않고 해가지고 뭔가 광야에서 헐벗은 모습으로 외치는 그 폼 한번 잡았어요. 그러니까 그냥 객기라 생각해가지고 너그럽게 봐주면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게 이방 나라고 이스라엘에게는요 사람이 봐주고 안 봐주고를 못하고 그 안에 그들에게 율법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집어넣은 법이 있는 거에요. 다른 민족은 그게 없어요. 근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이 이스라엘 속에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이. 율법에 의하면 이런 자는 칼로 죽어야 돼요. 돌로 쳐죽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앞뒤를 한번 맞춰 보세요. “그럼 목사님, 사람치고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없어요. 모든 인간은 남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했는데 결국 실패로 끝났고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말고 이방인들은 그냥 그것이 마땅한 것처럼 그냥 살아가는 거에요. “육이라 했든 인간이라 했든 뭐 관심도 없고 나는 내 편한 대로 산다. 끝. 아 속상하다. 농약 마시면 그만.” 여기서 그러면 모든 선지자치고 선지자 같은 선지자 없어요. 모든 인간은 제대로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선지자도 없습니다. 그게 내 육이 가짜고 이 가짜의 힘이 율법을 지키지를 못하게 만든 겁니다. 이 육이요.

내가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육한테 못 이기는 거에요. 이 육의 속성을 나는 날 위해 살겠다는 이 속성을 내 힘으로 꺾을 수가 없어요. 내가 처분하지도 못하고 꺾지를 못합니다. 교회에서 백날 이스라엘 이야기 들어도 소용없어요. 눈만 뜨면 “아, 뭐 재미나는 것 없나? 뭐 신나는 것 없나? 태국한테 3:0. 그거는 뭐 됐고. 그다음에 또 다른 팀 또 싱가폴 팀 있고, 그다음에 감독은 박항서가 감독 되나?” 뭐 이런 것 해야 재미가 나잖아요.

가짜의 특징. 여기서 가짜인지 진짜인지 판결하는 하나의 팁을 드리겠습니다. 가짜의 특징은 뭐냐? 의미를 자꾸 미래로 미루는 게 가짜에요. 최종적 의미를 자꾸 비겁하게 미뤄요. “지금은 모르지만 내년되면 알걸? 내년되면 모르지만 십년뒤면 알걸?” 자꾸 미뤄요. 왜 미루느냐. 지금 자기 자신을 괌에 있는 28년 동안 내 행복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육이 엉망진창이든 육이 뭐 죄지었다 하든 간에 나는 나를 사수하는게 필생의 나의 임무고 사명이고 그게 내가 살아야 될 이유라고 여기고 있는 거에요. 내 몸 하나 지키는 게.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욕 하지마. 나처럼 이렇게 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봐봐. 없어. 누가 있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 각자 지 하고 싶은 대로 해.” 제가 설교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그게 이방 민족의 본색이고 이거는 인간의 본색이잖아요. 뭐 고린도후서에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아는데, 그 구절 있는 것 아는데 글쎄 좌우로 그런 인간 자체가 없다니까요. 인간 자체가.

여기서 가룟 유다의 등장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유대인이에요. 이스라엘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겁니다. 가룟 유다의 자살이 중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 사건에 구심체에서 관련된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은 게 아니었어요. 가룟 유다라 하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가룟 유다의 육이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자기 육을 통제하거나 조절하거나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거에요.

가룟 유다 안에 누가 들었는가? 사탄이 들어갔어요. 악마가 들어갔어요. 이방 나라에는 안 나타나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계시, 율법이 있을 때만 악마의 정체가 드러나지 이방 나라야 뭐 그거는 가만있어도 밥인데 뭐 신경 쓸 것도 없잖아요. 악마가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는 게 악마의 필생의 역작이었습니다. 없애 버리는 거에요. 왜 악마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가?

인간의 가장 수치는 내가 없어지는 게 제일 수치에요. 제일 부끄러운 거에요. 죽는 게 아파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내가 있다가 없는 게 부끄러워서 못 죽어요. 그래서 가룟 유다는 이왕 인 거 내가 나를 없앴다는, 부끄럽지 않은, 자기 끝까지 내 인생은 내 관할 하에 내 알아서 처리했다는 이거 하나 건지기 위해서 가룟 유다는 자살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 자살이 중요한 이유는요, “가룟 유다처럼 꼭 자살해”가 아니라 그 아줌마처럼 “농약 꼭 마셔라”가 아니라 아줌마는 농약 마시기 전부터 그 아줌마는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산 거에요. 결혼도, 애 둘 놓고 뭐 가축하든 농사를 짓든 오직 평소에 하루하루 일과가 매일같이 자기를 위해서 살았어요.

자기를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게 자살로 마감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이미 그거는 나의 육은 마귀에 농락당하는 마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에 있던 겁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해결책 없음이에요. 인간에게는 해결책 없습니다. 내 육을 내 마음대로 못해요. 내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지가 알아서 구원하지 그런 것 없습니다. 스가랴는 거짓 선지자 죽여라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마지막 때 제대로 된 인간 없다.” 그걸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치고 가짜밖에 없기 때문에 진짜 인간은 없음을 하신 이유가 뭐냐? 진짜 상처를 가짜 선지자의 상처와 대조시키면서 등장하는 거에요. 진짜 상처. 지가 선지자로 위장하고 있는 상처 말고 소위 “인간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산다.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하는 그 집단 전체가 상처를 낸 그 상처를 받아내기 위해서 상처 없으신 분이 이 땅에 오신거에요. 모든 인간은 육이고 성령 받은 영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시편 38편 11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메시아가 상처를 받는데 그 상처를 주변 사람들도 물론 예수님께 상처를 주었지만 심지어 가족이, 일가친척이 예수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지가 뭔데 지가 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왜 전하는데? 뻔히 다 아는데. 뻔히 다 알거든요. 그러면 신명기에 아까 봤던 신명기 13장에 의하면 “일가친척도 못 알아보는 그러한 선지자는 일가친척이 먼저 나서서 손대서 죽여버려라”하는 그 계명이 있어요. 따라서 예수님은 일가친척이고 뭐 그 동네 사람이고 뭐 간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주님께서는 배척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예수를 돌아가실 때 단 한 명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다 까발리면서 돌아가셨어요.

자, 그렇다면 아까 빌립보서 1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을 믿는 자는 천국 가는, 구원받는 증거가 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이 육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 보니까 끝났어요. 육은 내가 통제가 안돼요.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철저하게 뭐 하나님을 믿든 예수를 믿든 그거는 다 하나의 겉절이고, 그냥 핑계고 결국 마지막은 천국 가는 것도 나를 위하여 지옥 안 가는 것도 나를 위하여. 하여튼 “나를 위하여 예수 믿어서 내 잘 되기 위해서 천국 간다.” 이거 하나는 변함이 없어요. 이거 가짜죠. 이거 가짜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구원의 증거가 뭐냐? 바로 그것이 바로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것이 바로 구원의 증거에요.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이 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영에 의해서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비로소 엑스레이 앞에서 엑스레이 촬영 엑스레이 앞에서 내 잘난 얼굴은 다 날라가고 갈빗대하고 시커먼거하고 흰거만 보이듯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육입니다”하는 것이 발각될 때, 그게 바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 자체가 그렇게 발각된 허술한 그 자체가 구원의 증거물이라는 거에요. 구원받은 자의 증거물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밑에 강도가 이런 고백을 한 거에요. 강도가 어디까지 따라왔는가? 세상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하다 하다 결국은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되는 일이 없어. 결국 남은 것은 남 때려죽이고 그것 뺏어가 “니는 죽든 말든 나는 살자”하는 노골적인 자기 행위를 보여주고 그 결과는 하나님에 의해서 무사히 체포되어가지고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데 사형 현장까지 동석하도록 하나님께선 복을 주셨어요.

십자가가 보이는 데까지 질질 끌고 온 거에요. 십자가가 보이는 데 까지. 똑같이 강도짓 한, 같은 친구인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친구라 한다면 이건 영화 나홀로 집에 나오는 두 도둑 친한 친구. 아마 친구 같아요. 왜냐하면 처음에 둘 다 예수님을 욕했으니까요. “남 구원한다 해놓고 우리 구원하면 우리라도 믿어 줄게.” 이런 식으로 둘 다 조롱을 했어요. 조롱을 하다가 죽는 마당에 갑자기 한 쪽 강도가요, 마음에 어디 변화가 일어난 거에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맞다. 저분은 의인이지. 저분은 의인인데 왜 저 의인이 왜 이 죄 많은,” 자기 죄를 아니까. “죄 많은 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지?”

물론 그 사람이 이사야 52장을 아는 건 아니에요. 그까지 알겠어요? 이사야 52장 14절에 보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상상해 내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해버렸어요. 모든 인간들이 잘나기를 원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그게 사는 재미고 그게 나를 위한 행복이라고 여겼던 행복의 밑천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과 전혀 별개로 그분은 죄 없는데 완전히 모든 얼굴이고 몰골이 망가져 버렸어요. 놀래버렸어요.

그다음에 53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누가 저 사태를, 누가 이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겠는가? 이거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은 그동안 육의 내부에 있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 육이라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은 바로 외부에서 온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비로소 마귀와 함께 있는 이 사실까지 엑스레이 앞에서 크게 조명을 환하게 다 노출시키는 겁니다. 깔끔하게 노출시켜요. “니 지경이 이 지경이다. 그러니까 니는 니 원대로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왔잖아”하고 까발리는 겁니다. 모든 사태를.

그 사태를 까발리는 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영의 열매라, 성령의 열매라 하는거에요. 22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걸 이게 긴데요. 저는 간단하게 압축하겠습니다. 그저 고맙고 그저 감사하고 그저 기쁘고 그리고 그저 희한하고. 이걸 가지고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왜 세상 사는 재미가 그렇게 없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고마워할 사람이 없어요. 내가 감사할 사람이 없어요. 감사할 분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에게만 감사하고자 하고 자기에게만 고맙고 자기 애쓰고 노력하는 나를 대견해하는 그런 식으로 그런 육적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그것이 강도처럼 가짜였습니다. 진짜는 바로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라는 것을 이게 기쁨과 감사와 사랑 속에서 고백이 되어지는 거에요.

이 능력은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꼼짝 마라 했던 악령의 힘이 아니고 바로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의 힘이 되게 되면 내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내게 어떤 일도 주께서 이끄시고 주께서 예수님 증거하라고 조성해놓은 아주 치밀하게 세밀하게 조성해서 마련해 주신 다 주님의 솜씨 속에 우리가 놓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눈에 누가 참된 선지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믿습니다” 하기 전에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는가를 깨닫는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