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2:10-14 / 생명의 보관함
생명의 보관함
이근호
2024년 3월 13일
본문 말씀: 스가랴 12:10-14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2: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2: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2: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자식이 죽는데 안 울 부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은 바로 인간을 울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시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1장에서 애굽의 전국에 통곡하고 애통하는 밤이 찾아오게 됩니3다. 그것은 각 가정마다 장자가 죽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에 대한 면제 받은 자들이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맏이가 죽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대단히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은 이스라엘에게는 유보된 사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을 때, 전에 출애굽 당시에 애굽인들 모든 가정에 통곡한 그 사태를 그들도 맞이하게 됩니다.
왜 이토록 냉정하게 하나님께서는 ‘자식 잃은 슬품’을 야기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걸까요? 그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원천을 인간들의 혈육에 대한 애착으로 차단시켜 온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꾸준히 인간 세상에서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그런데 사람들, 특히 불신자들은 이렇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 자세를 드러내었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단호하게 거부해왔습니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 살아가는 명분을 수립해 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 명분이 바로 같은 혈족과 혈육을 의지하고 구성하는데 전심을 다해왔던 겁니다.
부모는 아내를 의지하고 아내는 남편과 자식을 의지하면서 나름대로 이 세상에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챙겨온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따로’라는 말을 연이어 11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세상 명분이 결코 자신들에게 들어닥친 사태를 막아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장자를 살려낸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명분을 특별히 제공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왕직+제사장직’ 구조로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과 나단은 왕직에 해당되는 족속이며 레위와 시므이는 제사장직에 해당되는 족속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규합한 혈족도 이스라엘이 망하는 날 다같이 따로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제사장’ 직능을 통해서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마저 혈육 동질성으로 결집되어 각 개인들이 여기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명분인 줄 알았습니다. 이로서 막혀버린 하나님의 은혜의 원천을 하나님께서 방치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벌리는 전쟁의 원조는 ‘멜기세덱 출현’과 관련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복의 근원 아브라함은 소돔 지역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 사병(私兵) 318명을 주축으로 하여 기어이 조카 롯을 건져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다른 생각은 합니다. “왜 우리가 굳이 이겨야 하지?” 해답은 멜기세덱이 갖고 나옵니다. 그는 셀람의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그야말로 원조 ‘왕+제사장’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어디에서 알려지지 않는 바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늘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번 전쟁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붙여주신’ 전쟁이기에 복을 받아 이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승리의 몫은 멜기세덱으로 돌아갑니다. 이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는 이 분의 등장을 위해 지상의 왕+제사장 직능자들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의 두드려진 인물이 요시야 왕입니다.
그는 300여년 전부터 예언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왕하 13:2)
즉 그는 예언의 인물입니다. 실제로 요시야는 이 예언에 합당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왕하 23:15-16)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요시야만큼은 왕+제사장 직능을 성공적으로 이어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백성들이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대하 35:21-24에 보면, 인간들의 기대는 좌절됩니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 35:21-23) 모든 계시의 성사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뿐입니다.
요시야의 일이 대단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나라가 유지하는 명분을 제시하게 된 것뿐입니다. 그들은 더는 울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는 통곡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기대되는 방식의 예언 성취는 실패로 끝납니다. 이 취지는 이런 겁니다. “죽지 아니하면 구원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명분은 본인이 죽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명분은 예수님의 성과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따라서 에벧에돔이 언약궤 보관함 역할로 복을 받는 겁니다. 오벧에돔은 더는 자신으로 인하여 본인이 사는 방식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보관함으로 복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통곡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더는 자신의 존재이유와 명분이 십자가로 인하여 박탈당함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참으로 십자가를 보관하는 자는 매일매일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점으로 인해 늘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쉬지 않고 통곡하는 자세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스가랴 12장 10-14절(생명의 보관함) 2403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총을 주신다, 은혜를 주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 은혜를 주시는 현상이 어떤 현상이냐? 그분을 바라보면서 애통하기를 마치 자기 자식을 잃어버릴 때 애통하듯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가 그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상황이 집단으로 애통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한다 했어요. 여기 따로가 열 한 번 나옵니다.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 족속 따로, 그리고 남편과 아내도 따로 하고 나단 족속 따로 하고 레위 족속 따로하고 아내 따로 하고 이렇게 해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이 통곡하는데 따로 따로 통곡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그동안 하나님의 독자, 하나님의 아들에게 집약된 어떤 일이 은총의 핵심이고 초점인데 그것을 소위 이스라엘이 그걸 가려왔던 거에요. 그 가리는 방법이 뭐냐? 집단화 된 겁니다. 따로 된 게 아니고 우리 함께, 함께, 함께 열 한 번의 함께. 따로 열 한 번 보다도 함께를 열 한 번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그들은 같은 인간, 옆에 있는 인간, 같이 한 가족, 동족, 혈육, 사람 그러한 혈족이라하죠. 또는 혈육. 여기에 그들은 무척 의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자기 개인적으로 무슨 인생사에 가정사에 문제가 있으면 항상 사람의 같은 일가친척과 동족과 여기에 같은 민족끼리 의지하고 협조를 구하고 그들에게 기대를 하는 그런식으로 이스라엘이 그동안 꾸려왔던 거에요. 뭐 이스라엘 뿐이겠습니까? 인간치고 다 그렇죠. 인간은 자기 혼자 살고 싶지만 자기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서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자기하고 얼굴이 비슷한 같은 가장 가까운 친족과의 협력을 통해서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고 자기 지키는 것을 유지해 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같은 혈육을 통해서 혈육을 단결해서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거에요. 근데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이 독자, 우리 주님은 외로워요. 혼자 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분은 이 땅에 와서 머리 둘 곳도 없이 굉장히 외로웠고 뭐 제자들 해 봐야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 제대로 이해 못 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추종자라고 자처하면서 따라 다녔지만 결국은 예수님께서 하나, 둘씩 던지는 그 말씀에 그들은 하나, 둘씩 다 떨어져 나간 겁니다.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낼 때 오병이어 행했을 때 그거는 사람들이 엄청 몰려 왔잖아요? 남자만 오천 명이니까 목회를 해도 오천 명 교회가 어디 있어요? 그것도 남자만 오천 명인 것 같으면 대교회 목회한 거에요. 근데 주님께서 추가적인 말씀을 서서히 본질에 가까운 말씀을 던지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이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이 떠나는데 한꺼번에 확 다 떠나버린 거에요.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의 생존,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유력한 자를 찾아다니는 그 육적인, 혈육적인 버릇을 그걸 누구한테 써먹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도 통하리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겨서 자기가 원하는 그 생존과 그리고 천국 가기, 영생 얻기를 아울러 다 도모했던 겁니다. 그걸 추진을 한거에요. 뭐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이 인간의 본성을 인간 스스로 내팽개칠 수가 없어요.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기본적인 것은 인간은 홀로 남는다는 것. 오늘 본문에는 열 한 번의 따로가 있지만, 따로 되어서 홀로 남는다는 것을 인간은 절대로 그러면 자기의 생존에 불리하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거기서 육적으로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게 있어요. 터져 나오는 게 뭐냐? 애통이고 그게 바로 통곡입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애통하는데 어느 정도 애통하느냐?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독자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을 때 애통하고, 또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제일 마음이 많이 간 것이 첫 번째 아들에게 마음 제일 갔잖아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죽었을 때 대성통곡하고 둘째 셋째 죽는 것 보다 맏이가 죽을 때 크게 울지 않습니까? 크게 우는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향하여 지적하는 것은 아들 죽었다고 왜 우냐는 거에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죽는데 니가 왜 우느냐는 겁니다. 참 하나님께서는 냉혹하죠? 아브라함한테는 있는 아들도 갖다 바치라고 했습니다. 아들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아버지보고 “니 자식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리라”고 요청했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근데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어요. 이거는 아주 특이한 현상입니다. 울지 않았어요. 근데 누가 울었는가? 출애굽기 11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첫 번째 난 게 다 죽었으니까 울지요.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너희 하나밖에 없는 또는 자식이 있더라도 제일 첫 번째 난 장자가 죽는 것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왜 우느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훅 들어와 버리면 인간 입장에서 그런 하나님의 요청에 할 말이 없죠. “장자가 죽었는데 왜 니가 울지?” 아들하고 니하고 몸이 따로따로 노는게 인간인데 자식이라고 해가지고 몸이 동일한 몸이 아니잖아요. 엄마 자고 애 자게 되면 몸이 두 개잖아요. 따로다 이 말이죠. 따론데 걔 죽었는데 왜 엄마가 우느냐 이 말이죠. 따로에요. 따로 잠을 자는데, 따론데 왜 이걸 하나라고 생각하고 왜 우느냐는 거에요.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혈육의 확장에 그동안 의지해왔던 겁니다. 누가? 애굽 사람들이요. 그런데 그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장자 안 죽었어요. 장자 안 죽었으니까 그들은 믿음 좋은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마지막 때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출애굽 때 애굽 사람이 아들 잃었다고 대성통곡을 하는 그러한 것을 이스라엘에게 그동안 안 일으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망할 때까지 지연시킨 겁니다. 나중으로 미룬거에요. 애굽의 장자 죽을 때 “아, 고소하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어 그래. 우리는 어린양의 피를 쫙 발랐잖아. 우리는 믿음 좋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렇니까 애굽 사람이 자기 아들 죽었다고 통곡할 때 히브리인들은 그 통곡에서 제외, 면제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자기들이 나중에 자기 차례 올 것을 모르고 면제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주님께서 애굽 사람에게 묻는 것은 “니가 왜 장자 죽었는데 왜 우느냐” 하는 거에요. 그것은 장자와 너가 혈육적으로 한 통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 하나처럼 움직인다는 그것이 아들 죽었다고 엄마가 안 울 수 있어요? 내 몸에 난 자식인데. 우는 게 그게 반문할 거리에요? 우는 게 뭐가 나쁩니까? 우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면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이 혈육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를 방해한다는 생각을 너희들이 해 봤냐?” 이 말입니다. 바로 그게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에요. 애굽 사람들이 장자 죽을 때 울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희 아들 죽어도 울지 않아야 그게 이스라엘 답다는 거에요. 왜? 왜 그래야 되는데? 그거는 너희 안에 왕 더하기 제사장 직능, 제사장 기능이 너희 안에 삽입돼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이렇게 되게 되면 오늘 설교 이야기할 게 굉장히 많아져요. 왕 직능. 왕이라는 것. 하나님이 보낸 그 독자가 왕이시고 그리고 제사장이고 그리고 선지자입니다. 그 왕과, 선지자는 나중에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전파하는 거니까 먼저 중요한 것은 왕 더하기 제사장. 왕인 동시에 제사장 되시는 분이 독자로 오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또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했을 때 그 함께 했다는 말이 뭐냐? 어떤 기능을 가지고 함께 하는 거에요. 그 기능이 왕 기능과 제사장 기능을 가지고 함께한 겁니다. 그 함께한 결과가 뭐냐? 애굽 사람들의 가족들을 다 울게 만들었어요. 그들이 울었던 이유는 ‘우리 가족은 하나잖아’라는 가족은 하나라는 그걸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울음을 터뜨리게 만들어요. “하나가 아니야. 너희들은 전부다 따로따로야.” 오늘 따로 열 한 번 나오죠. “너희들 다 따로따로야.” 따로 따론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따로따로 일하시는 그 일의 방식을 너희들이 그동안 혈육적으로 단결하고 혈족으로 같은 동질성을 이루어야 우리가 살만하다 우리는 살 수 있다고 하는 그 생각이 그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훼방해 왔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에요. 가족끼리 하나가 되어서 뭉치고 어려울 때마다 가족을 찾고 어려울 때마다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훼손하고 왔고 기피 해 왔다는 겁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불신자들의 문제가 뭐냐?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는데 불신자는 죽을 때까지 “뭐 죽을 때 콱 죽으면 되지. 속 시원하게 내 죽는다.” 이렇게 큰 소리 치고 죽거든요. 그러면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것은 다 어디 갔습니까? 햇빛과 공기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은혜는 그 불신자한테는 어떻게 그걸 받아들이죠? 자기가 뭐 세금 내서 하나님께 햇빛 받고 공기 받았습니까? 발걸음을 세셔서 인도해줬잖아요. 50 살다가 50에 죽었다는 말은 5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냥 키워왔잖아요. 60에 죽는다면 60까지 키워왔고 70에 죽는다면 70 키워왔다면 그 은혜에 대해서 평생 70, 60, 50 살면서 은혜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태도와 어떤 마음가짐을 내세웠냐 이 말이죠. 불신자들이. “나는 하나님 안 믿거든요.” 지금 이게, 하나님 믿고 안 믿고 지금 그걸 따지는게 아니고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해서 니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는 겁니다. 불신자에게. 신자도 마찬가지지만, 불신자에게 묻는거에요. 그러면 불신자는 뭐라고 하느냐하면, “그동안 나는 하나님 몰랐습니다.” “왜?” “나는 이 가족끼리, 혈육끼리 같이 있는 이것이 나의 명분이기 때문에, 사는 명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명분. 사는 이유.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아무리 하나님 믿어라 해도 안 믿는 이유는 나름 명분이 있었던거에요. 사는 명분. “나는 내 자식 잘 키우고 내 가족 잘 건사하면 나는 이 땅에 50년 60년 70년 살만한 자격 되고 그만한 권리 있다.” 이게 본인이 갖고 있는 명분입니다. 그 명분과 하나님이 독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보여줬던 왕과 플러스 제사장 직능과 이게 일치되느냐 하는 겁니다.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여줍니다. 일치되지 않아요.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 제사장 직능이 있는 이스라엘과 그 외의 모든 민족 가운데 전쟁을 유발시킵니다. 그 전쟁의 최후의 전쟁. 최후의 전쟁이 11절에 나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므깃도 골짜기. 므깃도 골짜기를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아마겟돈. 아마겟돈의 뜻은 뭐냐? “아!” 영어로 하면 the. “그 므깃도 골짜기 말이지?”라는 뜻이에요. 아+므깃도. 아마겟돈이에요. “아, 그 므깃도 골짜기?” 므깃도의 골짜기는 아마겟돈 전쟁이라는데 므깃도 골짜기는 인간이 혈육을 도모해서 자기 동족과 동질성 있는 혈육을 모으는 것을 평소에 자기가 존재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는 그 사실을 내 쪽도 아니고 다른 종족도 동일하게 명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흩어지는 모든 민족들아, 그거는 자식들의 명분들을 다 끌어모아서 한바탕 자기 명분과 명분끼리 전쟁을 해서 다 같이 망하는 골짜기가 므깃도 골짜기,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인간이 의지하고 싶었던 바깥 사항이 인간의 개인을 파멸시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에요. 바깥 사항, 바깥 사항은 명분과 명분밖에 없는 바깥, 그것도 인간이 살려고 애쓰는 명분밖에 없는 그 명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다 가로막게 만들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복음과 모든 것에서 강하게 배제하고 얼굴을 강제로 돌리게 만드는 것. “나 그 하나님 말씀 없이도 나 떳떳하게 지금껏 하자 없이 당당하게 살았다”고 하게 만드는 그 존재의 명분. 그 명분들 끼리의 투쟁해서 다 같이 망하는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에요. 어떻게 들어보시니까 여러분 교회 나오기 전에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 나름 명분 있었죠? 그 명분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뭐냐?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가 나의 명분으로 자리 잡은 거에요. 왜? 인간은 가정 없이는 시작을 안 하기 때문에. 태어난 가정 출신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전쟁, 아마겟돈 전쟁 해가지고 빠방, 자기들끼리 다 망하게 만들어요. 일종의 월드컵이에요. 월드컵. 축구 싫어하는 민족 없거든요. 전 세계 220국이 참석한다고요. 예선전부터 해서. 예선전은 뭐 포기한 나라도 있지만, 축구 하나는 전부 다 미쳐있어요. 아무리 영어, 중국어, 일본어 말 안 통하죠? 메시 하면 다 통합니다. 손흥민 하면 영국 가면 다 먹고 살걸요? 손흥민 알면. 이게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이 땅을 행복하게 살게 만드는 그 무엇. 축구.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날 교회는 안 가도 축구장에 가는 거에요. 유럽에. 일본은 교회 거의 없어요. 일요일 날 어디 가느냐? 야구장에. 왜 하나님을 믿지 않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가 살고 싶은 이 욕구를 같이 힘을 합해서 같은 동질성끼리 모여서 힘을 합해서 혈육이죠, 가까운 가족들, 혈육부터 시작해서 힘을 합쳐서 살아있는 것을 계속 살게 하고 싶은 욕구, 이걸 가지고 그들은 내가 사는 이유고 명분이라고 보는 겁니다. 더불어 살면 그 안에 나도 살 수 있다는 게 명분의 요점이에요. 핵심 요점이에요. 따로는 싫어요. 오늘 따로 열 한 번 나온다고 했죠. 따로는 싫어요. 자, 그렇다면 이 므깃도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이 므깃도 전쟁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걸 따지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보게 되면, 사무엘하 6장 12절,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이 하나님의 궤를, 이 대목을 제가 보면서 전에부터 제가 마음에 해석이 빠진 게 있어 깨름칙한 게 뭐냐면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에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는데 그 하나님의 궤가 얼마나 무서운지 사무엘하 6장 6절에 보면,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궤가 무지무지하게 위험한 상자에요. 그 위험한 상자가 웃사가 일부러 모독하려고 만진 게 아니고 그 언약궤가 소에서 떨어질까 싶어 만졌는데, 만졌다고 죽여버렸어요. 도대체 만질 수도, 만지면 죽으면 만질 수도 없는 게 되거든요.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70명이 죽었어요. 이 말은 뭐냐? 어떤 점에서 이렇게 위험한 것을 오벧에돔은 어떻게 그걸 자기 집에 들여놓을 생각을 했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위험한 시한폭탄 같은 건데요. ‘취급주의’ 막 써 놔야 돼요. 만약에 잘못해서 손자가 까불다가 죽어요. 그 위험한 것을 왜 하느냐? 그것은 오벧에돔이 자기가 죽어 마땅함을 알기 때문에. 언약궤의 취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벧에돔은 언약궤를 통해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거에요. 그게 뭐냐? 오벧에돔은 생명의 보관함이에요. 집마다 태극기 보관함 하나씩 있죠? 생명의 보관함. 따라서 언약 없이는 그 생명이 없이는 나는 이래도 저래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그 생명, 언약궤의 언약의 생명에 대하여 나로부터 명분이라는 명분, 사는 이유는 홀라당 다 탈피되고 휘발되었다는 거에요. 이게 복이에요. 제가 아까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주사” 그다음에 뭐냐? “그들이 독자를 보고 애통하고 통곡한다” 했어요. 아들을 보고 애통하고 통곡하는 그 자체가 이것이 은혜에요. 왜? 그동안 내가 나름 존재의 이유 찾고 이 세상 살아가는 명분 찾고자 하는 그것이 독자,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그게 홀라당 다 거짓되고 다 날라가 버린 그것이 바로 복의 결과라는 겁니다.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나 저렇게 망가지나 그것은 아무 의미 없고 도대체 나는 누구를 보관하는 보관함이냐?’ 이게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자, 이것이 최종적인 결론이라면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게 바로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신약에서는 아마겟돈 전쟁이지만 그 이스라엘에선 그게 므깃도 전쟁이 되고 그 므깃도 전쟁의 원조, 이스라엘 전쟁의 모든 원조가 창세기 14장 14절에서 18절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14장 보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에 족속이 아홉 족속 있는데 다섯 족속하고 네 족속으로 두 패가 나눠졌어요. 네 족속이 다섯 족속을 공격해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다섯 족속 안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는데 그 소돔과 고모라에 누가 살고 있었는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조카가 있으니까, 남의 전쟁에 끼고 싶진 않지만 말려든 거에요. 어떤 의미에서 감히 불신자 아홉 족속이 감히 언약도 없는 주제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복의 근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내린다”는 그 감히 손 대면 안 되는 아브라함의 식구를 건드린 셈이 되어버렸어요.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에 아넬의 형제라 하는 그들과 약간의 동맹을 맺으면서 자기 집에서 키웠던 삼백 십 팔명의 사병을 데리고, 개인적인 병사를 데리고 밤중에 그들을 쳐서 거기서 롯을 건져 냈습니다. 이것까지는 그냥 사적인 전쟁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뭔가 아브라함이 낌새를, 이상한 낌새를 느낍니다. 전쟁에 이겨서 조카를 건졌기는 건졌는데 “왜 이기지? 우리가 왜 이기지? 이기면 안 되는 전쟁이잖아. 왜 이겼을까?” 왜 이겼을까 하고 있는데 누가 먼저 마중을 나왔느냐 하면,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아브라함이 왜이기지? 이거는 전쟁의 시작을 내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붙이시게 한 거에요. 붙이셨는데 그 붙이시는 출발점이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매개에요. 하나의 중개 수단에 불과하고 정말 전쟁의 시작은 멜기세덱부터 시작하는데 그 멜기세덱이, 그냥 세덱이 아니에요.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땅에 뿌리가 없는 사람이에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어요. 그러니까 살렘이라는 동네에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이 일으킨 그 삼 백 십 팔 명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살렘 왕도 누군지도 모르고 멜기세덱이 있는지 없는지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복의 매개자가 복의 근원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전쟁의 성격과 취지에 부합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원천, 전쟁의 원천자가 시작자가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만나러 나와서 복을 내린거에요.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아 네 존재가 있느냐?” “네” “그러면 네가 없어지는 것이 이 전쟁의 최종 목표다”는 겁니다. “네가 없어지는 것.” 죽는 것이 그렇게 무서워요? 팔, 다리 잘라 지는게? 다시 안 살려고? 성경의, 신약의 결론은 이거에요. 사람이 하루하루 사는 것을 지금 마지막 삶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좋아해야 하는 이유가 지금이 마지막 날이라면 내일 되면 이제 내가 없어져요. 그게 오늘 전쟁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전쟁은 뭐냐? 현재 내가 존재하는 내가 어떻게 내가 없는 세계로 조속히 그곳으로 넘어가느냐. 그 기쁨이에요. 무거운 인생 짐을 다 벗어 버리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그거 뭐 주께서 시기는 순서에 따라서 주님 마음대로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한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있음은 자꾸 죽음과 관련되어있고 없음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 동원해서 더 살고자 한 자는 그 이야기 듣고 다 가버렸어요. 다 갔다고요. 차마 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이 열 두 제자였습니다. 차마. 본인도 가고 싶어서 들썩했지만, “그래도 한번 추이를 보자. 그래도 계속 한번 보자.” 이래서 안 떠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 생명의 말씀 있음에 뭐 소리 했지만 주께선 “내가 너를 택했기 때문에 안 떠난거야.” 그리고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근데 지금 너희들은 니 명분과 존재 이유를 떡 하나 걸치고 예수님보고 자기 곁에 있어라고 하니까 이 전쟁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기어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떠나고 다시 찾아오죠. 떠나고. 헤어지고, 예수님과 헤어지고 다시 올 때 그 헤어질 그때의 아픔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통곡이라고 하는 겁니다. 헤어지면서 그냥 헤어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 하나님의 독자. 하나밖에 없는 독자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나의 명분 때문에. 되지도 않은 명분, 되지도 않은 존재 이유 때문에. 평소에 살아갔던 그 습관과 버릇 때문에. 자기 폼 내려고. 살아있으니까 폼 내야 되지 않습니까? 뭐 폼 내려면 모자도 써야 되고. 이런 것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말은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요. 아버지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얼른 자기 몸을 죽어서 아버지께로 가는 진짜 영생 얻는 단 하나의 방식을 제자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겁니다. 제자들은 통곡하는 것이 기쁨이에요. 통곡이 기쁨이고, 자기에 의해서 창에서 찔린 그분을 보면서 이제는 창에 찔린 그분의 몸과 자기 몸을 주저하지 않고 바꿔버려요. 옮겨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의 보관함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언약궤이고 오벧에돔은 그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그 사람이 오벧에돔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자기의 사는 명분을 자기가 챙기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그동안 이야기하는 것은 “니가 선택한 거처는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열왕기상 13장 2절에 어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요. 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이 하나님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선지자가 실패한 선지자거든요. 근데 지금 이대목에서 13장 초반에는 실패한 선지자가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이름이 와서 여로보암이 가짜 단을 벧엘에다가 딱 했어요. 저 북쪽에 하나, 그리고 남 유다와 북쪽 사이에 경계선에 가까운, 판문점이죠. 판문점에다가 단을 하나 딱 세워 놨어요. 그 당시에 솔로몬을 거쳐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기 때문에 북쪽 여로보암 왕도 알아요. 왕이 제사장의 수장 역할을 책임져야 될 자리가 왕 자리라는 것을 알아요. 왕 플러스 제사장 자리가 왕이 겸비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자기가 쌓았어요. 하고 남쪽으로 그땐 성전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솔로몬 성전으로 망명한다든지 또는 거기에 찾아서 술래하는 사람을 가로막기 위해서 이렇게 대신 단, 이것도 똑같은 하나님이잖아 하고, 여기 제사장 있잖아 하고 막아 놓은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다윗의 집에, 남쪽 유다 계통으로 다윗의 계통으로 아들을 낳는데 이게 아들이 언제 낳을 아들이냐? 300년 후에 낳을 아들이에요. 이름까지 미리 다 정해져 있어요. “요시야라는 이름을 낳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요시야. ‘그 요시야가 이 단을 부술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열왕기하 23장에 보면, 그것이 예언되어 있어요. 23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왕이라 하는 것은 300년 후의 요시야 왕입니다.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게 그대로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예언 그대로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말씀대로 되었던 거에요. 300년 후에. 그러면 이 말씀대로 된 요시야 왕은 성공적으로 왕과 제사장 직분을 제대로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대하 35장 21절에서 24절에 보면, 물론 요시야 왕이 유월절도 크게 드리고, “이 세상에 요시야 왕만큼 하나님 말씀 순종한 사람이 없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나 그 대목을 본 사람은, “그래, 요시야 왕이 드디어 하나님이 보기에 다윗 언약에 진짜 합당한 최후의 인물, 더 이상 다른 왕은 나올 필요가 없어. 완벽하니까.”라고 생각할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역대하 35장 21절부터 보면,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살, 우연히 쏜 화살이 요시야 왕이 맞아서 그 왕이 부상을 입고 예루살렘에 와서 병이 중해져서 죽었어요. 하, 이걸 대목을 보는 사람들은요 너무나 허망함을 느끼는 거에요. 요시야처럼 이렇게 훌륭한 왕이 왜 하나님께선 아까워서라도 죽이지 말아야 되는데 왜 죽이시느냐 하는 거에요. 성경 보는 사람마다 이거 왜 죽이냐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왕과 하나님의 전쟁은 창세기 14장에 멜기세덱,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은 모든 인간을 배제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에서 배제해버리고 계시에 부합되는 최종적인 인물은 장차 하나님의 독자, 독생자만이 이 계시를 완성하기 때문에 그 중간에 왜 인간들은 왕과 제사장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느냐를 보여주는 그 역사가 망한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요시야 왕이 진짜 자기의 말씀의 프로세스에 접근하려고 했지만 느고, 이집트 사람의 장군이 갈그미스 전쟁이라 해서 위에 바벨론을 치려고 올라갔어요. 왜냐하면 그때 바벨론과 앗수르가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요시야 왕이 바벨론 편이 되어서 이집트를 앗수르 전쟁하는 중간에 협조하겠다고 있는거에요. 그럴 때 이 느고가 하는 말이 뭐냐? “지금 내가 전쟁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니까 아저씨 좀 비키세요. 나 당신하고 싸우려는게 아니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느고의 말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요시야가 듣지 아니해서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럼 요시야는 그 당시에 완전히 기억되는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요시야에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그 이스라엘이 결국은 초점, 다 총화적으로 모아지게 되면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대로 왕과 제사장 직을 수행해도 그게 인간의 육신이 있는 한, 혈육이 있는 한 또 하나의 본인이 존재해야 될 명분과 이유로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그걸 빼버리기 위해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기어이 통곡하게 만드는 거에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죽는 게 아까움에 대해서 통곡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통곡의 오류에요. 인간은 통곡하고 회계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방금 요시야가 죽던 므깃도에서 죽는 이것을 일반화시키면, 마지막 때 일반화시키면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은 백성들과 국민들의 명분을 모아, 수집해서 자기가 대신해서 백성들을 국민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이것이 바로 이 인간이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하려고 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존재하려고 하는 명분으로 이게 수립되어있거든요. 적립되어 있어요. 이것을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서 인간은 살 어떤 명분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 먼저 그 전쟁에 샘플로 보여준 것이 므깃도 전쟁입니다. 이 므깃도 전쟁 요시야 할 때 오늘 스가랴에 보면 그 당시에 훌륭한 왕이 죽었으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대성통곡했겠습니까? 그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스가랴 12장에 나오는 본문의 말씀이에요.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이제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따로따로 다 통곡할 것이다. 그런데 그 통곡한다는 그 자체가 복이 되는 이유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가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먼저 해요. 복음이 결론이고 결론이 복음이니까. 사도행전 2장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일은 저지르기는 니가 했는데 그 너희들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잘못한 너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 할 때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걸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니가 존재하는 명분은 왕 플러스 제사장. 그 직능이 성령으로서 너희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너희는 하나님의 생명의 보관함으로 있는 존재하는 그것이 하나님 쪽에서 주어주신 복이요 예수님이 죽으신 유일한 성도의 명분인 겁니다. 사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항상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는 그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없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이 제대날짜, 매일이 제대날짜가 되는 곧 제대되지요. 제대날짜가 매일같이 주어지니까 매일같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왜 우리가 그동안 불신자였으며 왜 우리 하나님 말씀을 귀찮아 했는지를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었음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그저 가족이 있고 같은 혈육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동족이 있고 국가가 있으면 나름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