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2:7-9 / 맏이의 변천
맏이의 변천
이근호
2024년 3월 6일
본문 말씀: 스가랴 12:7-9
(12: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2: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12: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유일한 참된 인간의 장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은 죄와 구원자의 만남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따라서 메시야가 오는 시점은 인간이 장악하고 있는 그 죄가 최종적 양상을 보일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장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유다 장막’은 뒤에 나오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을 앞서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에서 마지막으로 죄를 보여주는 역할을 떠맡은 지파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같은 유다 지파 내에서도 다윗 왕가와 예루살렘은 다른 유다 지파 영역과는 달리 순서상 끝 지점을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구분의 취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이사야 36:1에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즉 유다 영토의 모든 곳은 앗수르에 의해서 초토화되지만 예루살렘은 아직 점령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까지 마저 접수하려는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185,000명이 하룻밤에 몰살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 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이제 남은 다윗 왕가(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유다 지파 중심으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해서 메시아오하 접선시켜 주십니다. 바로 여기에 최종적 죄악이 구현됩니다. 곧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로 인하여 이 땅은 더는 일체의 의로움이 없음이 확실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싸질러버려도 할 말이 없는 세상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게 되는 상황은 바로 이 ‘최종적 죄’가 드러나는 그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하나님과 더불어 살 ‘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언약에 의한 장자, 곧 맏이의 출현을 조건으로 합니다.
이는 언약을 통해서 맏이가 생겨나고 그 맏이에는 언약의 복이 집중된다는 뜻입니다. 야곱에게는 12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2아들이 12지파가 됩니다. 곧 아들의 존재가 땅의 존재를 말해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중심이 되는 맏이는 이 12 지파 중에 누가 되다는 겁니까?
우선 혈육적으로 먼저 세상에 출생한 자가 맏이가 됩니다. 하지만 언약에 의해서 맏이 자리에 변동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의 본질적 속성은 야곱의 후대 후손들이 맞이하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계속 펼쳐지게 됩니다. 이 전개를 통해서 맏이의 변동이 일어납니다. 르우벤에서 주어졌던 장자의 입지는 ‘존재하는 않는 인물’인 요셉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이유는 기존의 혈육 서열 중심의 세계에서 제거당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곧 ‘없는 존재’로서 보여주는 희생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에게 없던 시절에 낳은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 서열 속으로 집어넣게 됩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48:5) 이로서 요셉 지파는 장자로서 타 지파와는 달리 두 배의 땅을 상속받게 됩니다. ‘땅 있음’의 차원에서는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서는 아예 땅을 가져서는 안 되는 지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4) 레위지파는 율법의 원형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면 장자 직위의 변천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땅 자체가 북쪽 요셉지파를 대표가 된 이스라엘과 남쪽에는 유다 지파를 대표 지파로 한 유다 나라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들 둘 다 땅을 갖고 있어도 그 땅에서 지은 죄로 인해 땅에서 멸망되고 맙니다.
하지만 언약대로 주어질 완전한 장자는 혈육적인 족보가 아니라 지상의 혈육과 무관한 족보와 연계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애초에 하나님께서 설정한 계획이었습니다. 그 족보가 바로 멜기세덱 족보입니다. 지상에 땅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멜기세덱의 기능은 레위지파와 연결되는 듯 했지만 결국 레위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바꿔지게 되는데 이는, 왜 지상에 인간은 땅을 가질 자격이 없는가와 관련해서 최종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히 7:11-15)
즉 이 세상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일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만나는 겁니다. 그 시공간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은 마태복음 2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포도원 일꾼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할 일없이 놀고 있는 일꾼들은 한꺼번에 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 흐름에 맞추어 한 사람이 모집합니다.
그리고 제일 나중에 온 사람은 단 한 시간만 일했음에도 하루 온 종일 노동한 품삯을 받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포도원 주인이 주시는데 이는 자신의 노력과 품삯 사이에 그 어떤 공평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맨 나중에 온 일꾼은 압니다. 세상에 이런 포도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곧 이는 기존의 땅이 있다면 그곳에 땅 꺼짐 현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뿌리가 이 인간의 땅에서 뿌리채 뽑혀나가는 사태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오신 장자요 메시야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분이 오셔서 이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 뒤편은 메시야께서 악마의 머리를 꽉 밟고 있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이쪽 역사 무대는 인간들이 각자 자기 장부를 만들어서 꼼꼼하게 자기 망하지 않기 위해 복잡한 방도를 취하는 동네입니다. 즉 자기를 위한 영화를 찍는 세상입니다. 아프지 않고 망하기 않고 죽기 않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이 일상의 할 일이 되는 세계, 바로 이것의 죄의 극치입니다. 바로 이런 세계를 주님께서는 결국 심판하시는 겁니다. “사단아, 네 사람은 네가 데려가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몸이 주님과 죄가 만나는 장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스가랴 12장 7-9절(맏이의 변천) 24030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스가랴 12장 7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아멘.
여기 등장하는 지명이 우리 보기에는 동일한 장소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세밀하게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7절에 등장하는 것은 유다 장막이고 두 번째 등장하는 것이 다윗의 집이고 세 번째 등장하는 것이 예루살렘 거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곳이 그곳이고 그것이 그것이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여기에 세 가지를 명백하게 구분 지어 놓았습니다.
구분 지어 놓고, 시작은 유다의 장막부터 시작해서 그 본질, 끝부분에 가게 되면 “예루살렘 그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고” 또 8절에 보면 “그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유다의 장막, 약간 넓은 범위죠. 유다 장막 안에 다윗 집 있고 그다음에 그 다윗 집 안에 예루살렘이라는 시티, 도시가 그 안에 있는데 그 도시가 어디하고 연결되느냐? 하나님의 최종 작업의, 최종 목표 지점과 연결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주면서 순서 따라오라는 겁니다. 거기가 거기가 아니라 내가 지적한 대로 내가 이끄는 대로 유다 장막부터 먼저 차근차근 밟아서 다윗의 집, 예루살렘 거민 이렇게 밟아 오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 계시는 곳과 만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순서를 정했는데 이 순서를 정한 거기 첫 번째 등장 하는게 유다의 장막입니다. 장막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집도 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시절에 임시 거주지가 장막입니다.
장막의 특징은 걸핏하면 후딱 짐싸고 거기 있던 현장을 뜰 채비를 갖추는 거주지가 돼요. 비행기가 매 순간 이륙할 준비를 갖춰야 되듯이. 비행기는 항상 뜨는 기계에요. 하늘을 뜨기 위해서 이 땅을 벗어나기 위해서 있는 게 비행기지 그냥 돌아다니면 경운기죠. 그러니까 뜰 준비를 하고있는 거에요. 장막. 이 말은 뭐냐? 이 세상과 엮일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왜 이 세상과 엮일 필요가 없느냐 하면 마지막에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지만 이 땅과 아주 단호하게 결별 선언하고 다른 살림을 땅에서 떨어지면서 하늘나라 만들고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시는 겁니다. 그 절차, 그 순서를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장막, 장막 중에서도 장막이라 하는 장막 절기가 있습니다. 절기가 있는데 그 세 가지 절기 중에서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쉽게 하면 이래요. “자살하지 말고 복음 안고 떠나라” 자살은 복음 안으면 안돼요. 복음 안고, 복음 알았으면 이 땅에서 볼일 다 봤어요. 다 봤습니다. 장 보러 갈 때 시장에서 거기서 거주하려고 장 보러 가진 않죠. 대충 살 것 사고 드디어 파장일 때 물건 들고 집으로 가면 되죠.
볼일 다 봤으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셨고 뒤따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에요. 이게 절기입니다. 절기의 마지막 절기는 떠나자. 떠나자 절기. 근데 떠날 때 그냥 떠나면 안 돼요. 이 절기가 장막절은 7월 달에 있는데요. 7월 15일 날 있는데 7월 10일 날 뭐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동안 살면서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단 하루에 대제사장이 대표로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에 가서 대표로 거기 가서 수송아지 피를 언약궤에다가 피를 바르면서 한꺼번에, 단번에 회개하든 회개하지 않든 모든 죄를 일소에 씻어 주는 그날이 속죄일 정도가 아니고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대속죄일이 7월 10일이고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장막절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대속죄일과 장막절을 이렇게 연결 시키면 이거는 꼭 꼬리 달린 별, 혜성 같아요. 앞에 있는 대속죄일이 머리 부분이고 뒤에 따라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는 보따리 싸는 시간이 일주일 동안 이어지고 있는거에요. 그게 장막절입니다. 또는 초막절이라고 이야기하죠.
스가랴 14장 16절에도,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역시 스가랴의 제일 끝부분에도 초막절을 지키라고 되어있습니다. 볼일 다 봤잖아. 이 세상 기웃 기웃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근데 그냥 떠나면 안되죠. 죄 사함이 다 되고 난 뒤에 죄 사함을 받은 그 피를 품은 채 이거는 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부력. 비행기가 뜨는 부력을 품게 된 거에요. 가뿐하게 뜰 수 있는거에요. 기쁘게.
그런데 그렇게 될려면, 그 장막이 유다 장막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순서를 주께서 만들어주는 순서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는 거에요. 왜 유다 장막과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을 구분 지었는가에요. 다윗이 유다 지파에요. 예루살렘은 유다 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한꺼번에 유다 장막, 유다 동네, 유다 구역 이러면 끝날 것을 그걸 세밀화 시키는 그 연유가 뭐냐? 이유가 뭐냐? 그걸 아셔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그것 뭐 죄 씻음과 관련되어있다.” 우리는 쉽게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원래 죄 씻음은 레위 지파 담당이지 유다 담당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레위 지파가 등장 해야 될, 레위 지파로 “죄 씻음 받고 너희들은 떠나라”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왜 스가랴 이 대목에 와서 이스라엘 역사의 끝 대목에 와서 유다가 왜 레위 지파를 제치고 유다 지파가 장막의 대표로서 등장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유다 지파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자체가 멸망했음을 유다 자리에서 최종적으로 보여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시편 78편 67절 69절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냥 읽어 볼게요 67절.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왜 유다냐?’ 할 때는 뭐까지 더불어 먼저 알아야 될게 뭐냐? ‘왜 요셉 지파냐?’ 부터 알아야 되죠.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전개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셉 지파를 대표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양쪽으로 남북으로 나뉘는데 북쪽이 먼저 망해요. 북쪽이 먼저 망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게 유다 지파에요. 왜 유다 지파는 남아있는가? 유다 지파 때 와서 멸망하는 이유가 최종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멸망에 이유를 최종적으로 그걸 발현하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임무를 유다 지파가 담당하게 됩니다. 북쪽은 애초에 날아가고요. BC 722년에. 그 뒤에 150년 후에 BC586년에 남쪽 유다가 망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유다 지파가 망한다 하면 되는데 왜 오늘 본문에서 유다 지파 장막, 다윗의 집, 그다음에 예루살렘을 왜 따로따로 구분 지었는가? 그 이유는 이사야 3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36장 1절에,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되어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앗수르가 쳐들어 왔을 때 유다 땅을 완전히 다 점령했어요.
견고한 성들, 요새들을 점령을 다 했다고요. 초토화 시켰어요. 그런데 앗수르의 공격에 어디까지 하느냐 하면 유다 땅은 다 짓밟았는데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은 앗수르 군대가 차마 접수하지 못했어요. 접수하다가 18만 5천명 졸지에 다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그다음에 망하는, 다윗의 집이니까 이거는 왕이거든요. 왕가 날아가고 예루살렘 성전 불타는 것은 앗수르 다음에 나타난 제국 담당이에요. 그게 바벨론 담당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연결 시켜보면 뭐냐 하면 유다, 다윗의 집이니까 왕가. 다윗의 왕가, 가문. 그다음에 예루살렘. 이 순서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망하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연유와 이유를 순서대로 보여주는 거에요. 이게 굉장히 여러분 어렵게 들리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망하는 순서대로 구원이 된다는 거에요. 망하는 순서대로. 벚꽃 지는 순서대로 지방대학이 망해요. 그리고 마지막 서울에도 벚꽃 져요.
아이들이 없어서 지방대학부터 망하기 시작하죠. 유다부터 망하면서 망하는 순서대로 주께서는 이렇게 순서를 짓는 이유가 망해야만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망해야만 구원됩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 있고, 망할 때 그냥 망하면 안 돼요. 망하는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면서 망할 때 그 망하는 접점 지점이 구원되는 지점. 하나님, 죄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만나는 지점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방금 그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유명한 임마누엘이에요.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셨는데 임마누엘 뜻은 하나님과 사람과 함께 하는 거에요. 만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예수라는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예수라는 이름이, 마태복음 1장 21절에,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가 예수님이 아니에요.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의 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요.
죄가 최종적인 죄가 자기 백성을 통해서 드러내는 조치를 꾸준히 해 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초점은 이제 어디로 옮겨가는가? 이스라엘 통해서 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죄의 노선을 따라서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니까,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어요. 야곱에겐 아들이 열두 명입니다. 그거는 뭐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는 어렵지 않죠. 거기서부터 살짝 어렵게 돼요. 야곱의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됩니다.
오잉?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다, 그거는 어렵지 않아요. 아들 열두 명 많이도 낳았구나. 열두 명 있겠지.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된다? 그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아들 놓고 아버지는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이 야곱의 열두 아들은요, 야곱의 내부에 있는 야곱의 본질적 속성을 열두 아들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따라서 펼쳐내는 거에요. 야곱이 지닌 본질을.
그럼 야곱의 본질은 뭐냐? 야곱의 본질은 야곱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야곱 언약입니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다. 어렵지 않아요. 누구 집에 아이가 3명 있다. 그게 뭣이 어려워요. 그런데 그 어떤 집의 아이가 3명인데 3명이 세 지파가 된다. 이 말은 뭐냐? 그거. 그게 무슨 이야기냐? 약속의 땅을 열두 지파가 분배받게 된다. 뭐 각자 노력했겠지. 아닙니다. 각자 노력한 게 아니고 이미 죽어 없어진 야곱의 속성이 시간이 지나고 공간을 확보하면서 죽은 야곱의 속성이 비로소 표출되고 구체화되고 이게 역사화 되는거에요.
역사적으로 이게 깔리는 거에요. 역사의 지면에 언약이 쫙 발려버리는 거에요. 케이크에 흰 크림 발리듯이 쫙 발려버리는 거에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 신기하죠.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알아요. 약속의 땅에 열두 지파가 들어갔다. 이스라엘 된다. 그래서 뭐? 우리는 “뭐 하나님이 그렇게 했겠지”라고 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신기하게 안 느끼면 안 돼요. 이게 신기하게 느껴져야 돼요. 한 개인이 개인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 야곱 개인 안에 하나님이 같이 들어있다는 거에요. 임마누엘처럼.
이게 이스라엘의 특수성입니다. 그다음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면 열두 지파가 골고루 땅을 분배받았겠지” 아닙니다. 골고루 공평하게 땅을 분배받은 게 아니에요. 열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가 곱빼기 땅을 받았어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다고 하면서 그 땅을 분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업이라 하고, 그걸 기업이라 하고, 그걸 상속이라 하는 거에요.
언약의 상속분, 언약으로 주어진 유산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게 있다는 말이고, 그 땅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그 땅에서 일어난 변화는 하나님의 뜻이 이런 뜻을 갖고 있다는 변화를 통해서 이게 노출되는 그 지평이 뭐냐?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면, “그래서 뭐?” 이러잖아요. 중요한 것은 곱빼기가 있다는거에요. 그 곱빼기 있는 지파가 뭐냐? 요셉 지파에요. 요셉 지파는 지가 뭔데 다른 지파는 자기 지분밖에 없는데 왜 거기는 두 지분을 갖느냐? 요셉 지파를 뭐라고 하냐면 장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드디어 야곱의 아들 가운데 장자의 자리에 변천이 일어나는 거에요. 장자는 맏입니다. 맏이를 장자라고 하죠.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드디어 낌새가 펼쳐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에게 일어난 그 절차가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들을 자기 백성 만들어서 장자가 제시한 그 노선 따라, 절차 따라 올라오게 하기 위해서 장자부터 먼저 샘플로 장자에게 어떤 변화를 유발하게 하시는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그 요셉이 뭐 잘한 것 있다고 장자냐? 요셉은 꿈을 꾸었고 그 꿈에 의하면 요셉은 야곱의 가정에서 없는 존재가 되었어요. 왜? 형제들이 요셉을 제거했습니다.
요셉 이름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왜? 죽여버렸으니까. 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추방했으니까. 아버지 몰래 아버지 속여서 추방한거 거든요. 옛날에 제가 60년대인가 70년대에 우리 집에 TV가 처음 들어왔어요. 60년대 TV 있으면 동네 유지입니다. 김일이 헤딩으로 레슬링할 때 달 처음 착륙할 때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미국에 흑백 드라마가 나올 때 그 드라마 이름이 뭐냐? ‘제 5 전선’이에요.
제 5 전선인데 이게 원어가 미션 임파서블이었습니다. 빰빰빰빰 하는 노래가 전주로 나오는데, 미션 임파서블을 보면 매일 본 내용들은 기억 안 나도 제일 먼저 나오는 시그널 부분 그 장면은 반복해서 잊을 수가 없어요. 비밀 미션을 사명을 부여 받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테이프는 5초 후에 자동 분해 됩니다. 그리고 이 사명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때는 몰랐죠. 지금은 우리가 알지요. 하나님께서 장자를 어떤 식으로 대우하느냐 하면 이 역사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걸로 해주는거에요. 요셉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더라도 요셉의 이름은 없는 이름으로 삼아버리는 거에요. 그 요셉이 결국 희생자의 이름으로 죽은 자의 이름으로 애굽에서 노예로 팔려 갑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 집안에서 삭제된 이름이, 없는 이름이에요. 없는 이름이 나중에 뭐냐? 장자로 돌아옵니다.
창세기 48장 5절, 아버지가 요셉보고 하는 이야기,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 이것은 아버지가, 아버지 이름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아버지가 요셉보고 이야기하기를 약속해요. 여러분 야곱이 있다는 것은 자기 사견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는 거에요. 야곱은. 그래서 야곱 이야기가 곧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너는 그 두 아들은 이제 니 아들이 아니고 내게 속한 열두 아들과 대등한 레벨, 자리를 할당받을 것이다.” 그러면 요셉 지파는 두 몫을 받는 거에요. 그래서 창세기 48장 22절에 보면,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곱빼기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생각해야 하냐면,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잖아요. 열두 아들이 있다 이 말이죠. 열두 아들이 있으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장자가 누구를 장자라 하냐면 먼저 태어난 자를 장자라고 해요. 아버지에 기력을 처음으로 만든 생산물이 장자거든요. 그런데 역대상 5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장자 르우벤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 아들 요셉의 자손으로 돌아갔다.”라고 되어있어요.
벌써부터 열두 아들 가운데서 장자의 이동이 드디어 낌새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누가 장자냐 하면, 나머지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당한 쪽이 장자의 명분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제일 큰 땅을 차지하는 것이 유다 지파가 아니에요. 요셉 지파에요. 자 그러면 일단 생각해봅시다. 약속의 땅에 열두 지파가 들어갈 때 누가 장자냐?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약속에 의해서 야곱 언약에 의해서 누가 “땅을 곱빼기로 가진 쪽이 장자다” 하고 결정이 되겠죠.
그러면 요셉 지파에서 곱빼기가 되어버리면 열두 지파를 유지하는 데서 한 지파가 빠지게 되죠. 그 빠진 지파가 뭐냐 하면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민수기 18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레위 자손은 땅이 없어요.
자, 여기서 하나님께선 장자를 이중으로 대비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땅이 있는, 땅을 분배받은 입장에서의 열두 지파의 서열, 장자 서열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이 땅은 하나님의 영원한 땅이 아니고 다른 곳에 땅을 만든다면 어느 쪽이 하나님의 장자 쪽으로 가는데 있어서 어느 쪽과 연계가 되느냐 하면, 땅이 없는 레위 지파가 장차 올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준비해 둔 하늘나라의 땅과 관련된 지파에요. 레위 지파가.
그 지파가 최종적으로, 최종적이니까 신약이죠.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그 대목이 바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나옵니다. 7장 11절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특징은 뭐냐? 지상에 땅에 없는 데가 하늘나라 땅이에요. 지상적으로 봐서 땅을 많이 가진 것은 하나님의 야곱 언약에서 장자가 누구냐는, 땅 많이 있음과 없음으로 요셉 지파가 장자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근데 요셉 지파는 우리가 알다시피 유다 지파 이전에 먼저 북쪽 나라, 북쪽 나라가 요셉 지파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요셉 지파가 BC722년 제일 먼저 앗수르에 의해서 그냥 날라가버려요 망해버렸어요. 없어요.
없을 때 멸망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없어진다고요. 땅이 있었는데, 엄청난 넓은 땅이 있었는데 땅이 없어졌어요. 땅이 없어졌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 받은 백성은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촘촘하게 그걸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장자를 주면서도 장자를 소멸시키는, 장자를 지상에서 이동, 인간의 육신적인 르우벤에서 그다음에 희생을 아는 요셉으로. 요셉에서 그다음에 어디로 가는가? 아까 시편 78편 요셉을 택하지 아니하고 유다로 택했다고...
요셉을 통해서 유다로 택하면서 이 노선은 뭐냐?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멸망하느냐를 보여주는 그 지파의 순서에요. 그럼 이스라엘 멸망 당한다면 결국은 이스라엘은 멸망 당했다는 말은 이 땅에 한 평의 한 치의 땅을 가질 자격이 없다. 이유는 뭐냐? 장자는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서 주께서 미리 멜기세덱의 계열을 통해서 장자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하늘나라의 장자의 실체가 하늘나라의 하나님께서 맹세로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문제가 땅에서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는 거에요. 땅에서 올라가려면 땅에 있는 언약의 율법안에 있는 택한 백성은 망해야 될 이유를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구원받을 이유가 아니고 망해야 될 이유요. 왜냐하면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죄가 뭐냐를 보여줄 특별한 사명을 띄고 이 땅에서 나타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죄가 뭔지를 보는거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서 멜기세덱 반열에 따라서 등장한 지파가 히브리서 7장 13절에 보면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절,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아까 11절에 레위 계통이라고 이야기하고 여기는 레위 계통을 대신해서 유다 계통을 이야기하고 이 유다 계통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유다 계통이 최종적으로 바통을 이어주는데 하늘에 있는, (지상에 있는 게 아니에요), 멜기세덱과 땅과 하늘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지파로서 주께서 준비한 지파는 유다 지파입니다. 지금껏 이야기 들었으면 여러분의 반응은 이거죠. “그래서 뭐, 그래서 뭐?” 그래서 뭐에 대한 답변은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유다 지파가 유다 지파를 통해서 드디어 하늘에 이를 수가 있는 거에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실현은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만 유다 지파를 통해서 이어지는 거에요.
근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게 한 그 나라가 유대교, 유대 나라에요. 유대 나라에 와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죄는 유다 자손의 손에 의해서 보여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러면 이 사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거에요. 유다 자손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최종 죄가 드러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0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 마태복음 20장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거는 유명한 건데 한번 쭉 빨리 읽어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다 줄여버리면 “천국은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으니.”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포도원 이야기를 하실 때 제자들이 “포도원? 그럼 포도 있고 포도 농사하려고 하면 일꾼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걸 주님께서 그대로 사용해요. 포도원이 있는데 포도원에서 아침 열 시에 열두 시에 오후 세 시에 오후 다섯 시에 네 명의 일꾼을 순서대로 보여줍니다.
순서가 중요해요. 순서대로 보여줍니다. 순서대로 보여주는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나중에 일하고 난 뒤에 품삯을 줘요. 품삯을 주는데 제일 아침에 오는 사람부터 품삯을 주는게 아니고 제일 나중에 한 시간, 퇴근 시간이 여섯 시 거든요. 공무원이에요. 퇴근 시간 딱 한 시간 일하고 품삯을 받는 제일 마지막 다섯 시에 온 일꾼에게 품삯을 줍니다. 품삯을 줄 때 그 품삯을 받은 일꾼은 뭐가 일어났느냐? 싱크홀이 일어나요. 땅 꺼짐 현상. 어떤 땅 꺼짐 현상이냐?
이런 포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포도원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포도원입니다. 한 시간 일했는데 하루 일당 다 주는 포도원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포도원.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자. 맏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천국입니다. 이 땅에 천국이 와서도 인간 자체가 유대인 유다 나라 자체가 예수님과 직접 만났던 유대인들의 자체가 이미 그들은 지상의 천국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천국은 없습니다. 없다는 표현을 저는 싱크홀 현상, 땅 꺼짐 현상을 제가 언급하는 겁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은 뭐냐 하면 역사의 뒤편을 인간들은 몰라요. 왜? 그들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어요. 있기 때문에 있는거에요. 있으니깐 그들은 자기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천국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걸 주님께서는 천국 이야기하면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포도원으로 설명해 버리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0장 16절에,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순서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순서는 인간이 있는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순서에요. 이거는 언약에나 나오는 순서에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요 이 땅에서는 없어요. 일부러 둘째가 첫째, 에서 둘째, 야곱이. 야곱이 에서의 장자를 차지하는 것은 천국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이 천국이 없는거에요.
왜? 인간의 역할은 죄가 무엇인지 하는 역할을 하면 인간의 역할은 끝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인간이 존재하는 자체가 곧 죄가 존재한다는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종교를 만들고 기독교를 만든 이유가 그 기독교를 통해서 인간은 죄에서 못 벗어 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독교를 만든 거에요. 교회를 만든 거에요.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인간은 이 역사의 무대 뒤편을 몰라요. 뒷배를 모른다고요. 역사 뒤쪽에는 뭐냐? 시편 110편 1절처럼 하나님이 주께서 악마를 밟고 있는 일이 일어나요. 역사 뒤편에. 역사라는 커튼 뒤편에는 지금 주님께서 악마를 밟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거는 하나님의 역사 뒤편이에요. 장자가 가 있는 곳입니다. 장자는 역사 뒤편에 있는 게 아니고 역사 쪽에 와있어서 모든 인간을 떼놓고 홀로 역사 뒤쪽으로 갔어요.
역사 뒤쪽에 갔더니 이미 마귀는 예수님 발아래에 있는 겁니다. 발등상이 된다는 말은 지긋이 즈려밟고 꽉 밟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역사 이쪽에 무대 이쪽에 있는 인간들은 장자를 그들의 존재와 연관된 장자를 기다리고 있어요. 진짜 주께서 준비한 장자는 인간에 의해서 희생자가 되어서 인간 손에 제거된 상태인데 인간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맏이를 보내줄 것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자기 손으로 보내놓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어요. 자기를 구원할. 여러분 이걸 한 번 생각 해 봅시다. 요셉 형제들도 그렇고. 요셉 형제도 마찬가지거든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멸망했던 유대 나라 예루살렘 다윗, 왕들 왕족 다 마찬가지에요.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질문은 간단해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라는 질문. 답변은 제가 해드릴게요. 아플까 봐 발작하고 죽을까 봐 힘들어하는 것. 이게 인간의 일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아플까 봐 발작하고 죽을까 봐 힘들어 하는 것. 그럼 이런 목적을 위해서 인간들이 하는 것은 뭐냐? 자기가 빈틈없이 꼼꼼한, 자기 체크. 이게 자기 장부를 만들어요. 자기 장부. 이 장부가 어수선하고 지저분해요. 행여나 실수하게 되면 아플 수도 있고 행여나 실수하게 되면 벌 받아 죽을 수도 있거든요. 매일 일상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아파선 안 되고 죽어선 안 된다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무대, 역사 이쪽에서 무대에서 인간이 자기 영화를 찍어요.
남에게 보여주는 자기 영화를 찍어요. 그 영화 찍으면서 남들에게 인간처럼 보이려고 장부에다가 꼼꼼하게 체크 다 합니다. 가계부 쓰고, 행동 일기장 쓰고, 뭐 꼭 쓴다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자기 반성하면서 “오늘도 내가 흠 잡힐 일은 없었겠지? 혹시 흠 잡힐 일이 있더라도 내가 사과하면 상쇄되겠지?” 얼마나 꼼꼼한지요. 얼마나 자기 체크에 철저한지요.
그런데 저기 무대 뒤쪽에 주님의 장부는요. 아주 지저분하지 않아요. 깔끔해요. 얼마나 깔끔한지 제가 성경 구절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장부는 너무 깔끔한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26장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쓸 만큼 쓰시고 사탄에게 반납해요. “너희 집에 가”하고 내줘 버려요. 이 땅에서 불신자들이 꼭 필요한 이유를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쓸 만큼 쓰고 “너희 집에 가라” 돌려 보내는 거에요. 가룟 유다를 원망 하는게 아니고 미워 하는게 아니고 주께서 쓸 만큼 쓰고 돌려줘요. “니는 마귀 소유잖아.”하고 돌려 주는거에요. 얼마나 장부가 깨끗합니까? 저주받을 자는 저주받게 하고 구원받을 자는 구원 받게 하는 것. 그게 주님의 생명책, 어린양의 생명책 장부가 깔끔해요.
뫼비우스 띠처럼. 쌍둥입니다. 역사 안쪽과 뒤쪽이. 똑같이 되어 있는데 한쪽은 우리 예수님은 악마를 밟고 있고 우리 쪽은 악마가 지금 날개치고 설치고 있고, 물론 주께서 그렇게 허락했죠. 왜? 지옥 갈 자를 모집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역사 뒤편과 역사 이쪽을 주께서는 구분하셔서 결국은 마지막에 유다 장막에서 완성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역사 이쪽에는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과 이스라엘 유다 집에 속한 자기 성도를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역사 이쪽에 무서운 심판을 가한다는 이야기가 오늘 스가랴 끝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장자 되셔서 다 처리하시고 악마를 짓밟고, 나머지 시간의 흐름은 이 역사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사정없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겁니다. 그 심판 할 때 여기 보면 “그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망했던 죄지었던 유다 민족. 죄지었던 유다 족속. 그 유다 족속은 다른 지파와 달리 최종적으로 인간은 왜 망하는 것이 마땅하냐?
‘아, 인간 자체가 죄 구나.’ 그걸 유다 지파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그 남은 유다 지파의 최종 남은 자가 십자가 사건 때 직접 메시아를 만나서 메시아를 살해하고 사형시켰던 그 민족이 유다 족속이에요. 그런데 그 유다 족속이 죽음으로써 더 이상 인간은 이 땅에서 어떤 하늘나라와 상관이 없습니다. 없는데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이 인간의 세계는 역사, 이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 빈 공간, 싱크홀이 나요. 푹, 뿌리가 뽑혀버린, 그 뿌리가 뽑힌 그 자리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는 인자의 장자, 메시아의 맏이가 어떤 식으로 대우받는가를 출현되는 임마누엘 자리에요. 만남의 장소가 푹 꺼져버린 자리에요. 우리 뿌리가.
따라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이름은 푹 꺼진 우리의 이름은 푹 꺼져있어요. 내 이름은 사라지고 주께서 말하기를 “너한테 어떤 일이, 죽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 이름을 모르는 이름이다.” 내 이름으로 살던 자리는 빠져버리고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이 그 만남의 장소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다윗의 족속, 유다 족속이고 예루살렘의 거민이고 다윗 족속의 계열에 있는 거에요.
마치 우리가 뭐와 같으냐? 유다 지파가 망해버린 그 이스라엘에 이방 여인, 아무 연고도 없는 이방 여인 룻이 왔는데 그 룻이 시집간 집안이 룻기 1장,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이렇게, 유다 지파인데 룻기 마지막에 보면, 룻기 마지막에 4장 16절에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을 투입해서 다윗의 계열을 이어버립니다. 이방 여인은 뿌리가 없어요. 없는 민족입니다. 요셉 같아요. 하지만 장자가 등장하는 계열은 이방 계열을 통해서 오는 것, 이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만이 하늘과 연결되는 만남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바로 그 사람이 이 땅에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죄를 알기에 우리를 통해서 죄 없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절차로 하늘과 연계돼 있고 연결을 하는데 성공 했는지를 우리 속에 뿌리 없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일하심이 계속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