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11:1-3 / 환경과 환경성

정인순 2024. 5. 26. 10:15

 

 음성 동영상 Youtube

환경과 환경성 

 

이근호
2024년 1월 31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1-3

(11: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11:2)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11:3)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것은 내 세울 근거로서 주변 이방 나라에게 자랑이 될 만한 물자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집중되었다는 것을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자랑스레 여겼습니다. “당신은 영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나의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붙이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왕상 5:6)

바산의 상수리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고급진 목재들이 이스라엘이 크게 강성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증거들이 되었습니다. ‘요단의 자랑’이란 요단 근처에 우거진 살림들이 있어 짐승들이 넉넉하고 마음놓고 살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신다는 것으로 간주하게끔 했습니다.

“보라 사자가 요단의 깊은 숲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에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자리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출두하라고 나에게 명령할 자가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렘 50:54)” 그런데 이런 좋고 주변에서 부러워할 만한 환경을 하나님께서 철수해서 이스라엘을 해체시키겠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연환경을 통해서 그만큼 건방지고 교만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건방짐과 교만의 결과가 오늘 본문에서 보면, 목자들이 곡하듯이 울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환경이란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여깁니다. 이게 인간의 잘못입니다.

자기 하나를 계속 살리고 지키고 번창하기 위한 용도로 환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환경에 관여하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인간은 환경을 대하면서 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환경만 마트에서 물건 담듯이 담아내면 된다고 여깁니다. 자, 이러한 태도가 무엇이 문제일까요?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은 인간이 ‘버림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환경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남들 보기에 자신이 결코 망하지 않고 성공한 존재로 비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환경성(環境性)’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는 환경성과 더불어 함께 삽니다. 이 환경성을 관찰하고 계산하고 분석하면서 자신이 관여함에 따라 이 환경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과 이익과 나에게 도움이 될까를 고려합니다. 그러나 진짜 환경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숨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즉 보이기는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환경에 속해 있으신 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즉 인간은 자신들이 ‘환경’이라고 여기는 그 ‘환경성’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시편 51:5에서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을 ‘죄의 자식’으로 봅니다. 다윗은 비로서 환경성에서 환경으로 나아가게 된 겁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 장군의 죽음을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될 일이지 결코 자신의 의지로 될 일이 아님을 압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다윗의 자신의 뿌리가 죄라는 사실을 우리아를 살해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다윗은 현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목자’가 곡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양’이라는 이러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필히 목자가 제대로 된 목자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는 인간들은 ‘목자’니 ‘양’이니 하는 환경은 인간들이 원하지도 않을 뿐더라도 그 세계에 들어설 자격도 권한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목자나 양을 본인들이 골라 잡을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목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형식으로 등장됩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 49:24)

이 예언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요셉지파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49:10에서는 이스라엘 왕이 유다지파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목자를 하나님은 ‘반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유독 두 지파가 두각을 드러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요셉지파부터 목자기능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민수가 13:6,8에 보면,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여호수아)”라고 나옵니다.

12지파에서 하나씩 정탐꾼을 미리 약속에 땅에 보냈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여긴 자는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 요셉 지파의 여호수아 뿐입니다. 처음에 갈렙은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갈렙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헤브론 땅을 허락합니다. (수 14:13)

여호수아가 목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목자’라는 위치가 없으면 이스라엘은 결코 ‘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나름대로 이스라엘의 목자 역할을 충실했지만 그도 알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온전히 차지할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놓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수 24:20)

하지만 막상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섬기게 됩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기를 위한 환경’으로 주변을 이해하기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결코 ‘환경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방인처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환경이 인간을 버림받기 하기 위한 환경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몸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며 이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는 사람은 ‘예수님 피로 태어난 새로운 자아’가 예수 안에 따로 성립되어 있음을 압니다. 이들만이 예수님을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목자로 보는 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십자가가 내부에서 작용하는 주님의 환경에 속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스가랴 11장 1-3절(환경과 환경성) 24013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1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아멘

여기 등장하는 레바논, 바산의 상수리나무, 그리고 요단의 자랑 이런 용어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왜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거론하는지 조차 우리가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레바논의 백향목, 바산의 상수리나무, 그리고 요단의 자랑. 요단의 자랑이 황무했다는 말은 요단이 어떤 자랑거리를 갖고있었다하냐면 굉장히 수풀이 우거진 풍성한 강가에서 풍성한 삼림으로 거기에 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풍족함을 드러내는 그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가 황무하게 황무지로 빈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가 선지자의 계시 안에 들어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보고 뭐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걸 이해하란 말인가를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낯설죠. 낯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형성했던 그런 물질적인 그 요인들이 이스라엘 주변의 것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티를 내는 그러한 상당히 부러움을 사는 괜찮은 그러한 재료들이었어요. 주변에.

여기 레바논은 이스라엘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로 수입된게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성전 지을 때 꼭 필요한 자재가 백향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뭐로 구성되어있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어로 구성되어있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전의 가치를 모독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무시했을 때 그다음에 나오는 똑같은 질문,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치장되어있는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치장되었다.”라고 이렇게 다른 표현이 나오는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한번 해체해보자. 이스라엘것이 있는가? 없어요. 외국의 괜찮은 자재들 다른나라의 풍성했던 그런것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집합된거에요.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는 이스라엘것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요소들을 이스라엘 속에 모이게 했는데 그걸 하나님께서는 축복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다른나라한테 압박을 가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너의 제일 자랑거리 좋은 것을 이스라엘에게 상납해.” 라고 배후에서 주선을 하신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우리의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특혜를 입었다는 것을 유지를 해 줘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시큰둥한거에요. “뭐 하나님이 도와줬다는데 우리가 뭐 다른나라하고 별다르게 뛰어나게 좋은건 없잖아”라는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의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니가 그렇게 나온다고? 좋아. 그렇다면 내가 너 해체할게. 니 이스라엘 중에서 네것 있더냐? 레바논의 백향목 없으면 니가 성전 만들어졌어 안만들어졌어?” 이렇게 묻는거에요. 성전을 불태움으로써 레바논의 백향목이 이스라엘것이 아닌데, 남의 것인데 마치 저 남의 레바논의 백향목이 내것이라고 여겼던 그것, 그 건방짐, 그 안일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해체하면서 그들의 자만을 같이 들추어 내는겁니다.

백향목이 오늘 본문에 넘어졌다는거에요.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은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고 바산의 상수리나무” 이 바산의 상수리나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한창 잘나갈 때 곱게 뻗은 그 나무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이 함께있다는 티를 낼 때 그런 고급 목재를 수입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그렇게 했던 그 이스라엘. 근데 그 이스라엘로 그 바산의 자랑거리 나무로 치장되었던 이스라엘은 이제는 그것마저 다 불태워지니까 이제 남은 것은 곡할 것 뿐이다 그런뜻입니다.

요단의 자랑이라하는 것은 아까 말씀 드린것처럼 ‘요단은 아주 숲이 우거져서 거기에는 풍성함을 드러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이 이처럼, 요단 지역의 풍성함처럼 우리는 풍성하게 하나님께 혜택을 입고 있다,’라고 그걸 평소에 자랑질을 많이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이제 황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환경을 줬는데 니가 완전히 버려버렸잖아.” 이런뜻이에요.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가 만든 인간을 다룰 때 어떻게 다루는가의 원칙이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주신 것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은 그걸, 에덴동산도 마찬가지고, 받아놓고는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것처럼 여기는 것. 그런 인간이거든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방법은 준 것 다 뺏아가면 되는겁니다. 주신 것을 다 뺏아가면 돼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 어 어, 저거 내껀데” 뭐 이렇게 생각할 거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신약에 와서 미리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논리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요. 미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너희들이 환경을 주게 되면 이 환경과 더불어 본인이 살려고 애를 써요. 적응해서 살려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어렵게 말해서 환경이 있으면 사람은 그 환경에 대해서 적응하면서 자기가 환경에 대해서 이해하는게 있어요.

그걸 어려운 표현으로하면 환경이 아니고 환경성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저 환경을 내가 붙들기 위해서 내쪽에서 할게 뭐가있지. 어떻게 내가 바르게 살면 이 환경이 지금껏 해왔던것처럼 나를 지켜주고 나의 가치를 높혀줄까? 할 때 이미 그사람은 착각하고 있는거에요. 주신 환경을 내것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것. 이게 인간한테는 하나님이 주신 원래 뜻하고는 상관없다는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환경을 주실 때 진짜 환경 주신 것 안에서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원래 원했던 하나님의 맞는 인간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버림받아야 돼요. 젊은사람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딱 정해서 이야기하라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버림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는거에요. “왜 내가 버림받아? 내가 뭐 못났어? 내가 뭐 잘못한게 있어? 없는데 나는 세상에 맞춰 살려고 나름대로 얼마나 애를 쓰는데. 그런데 내가 원래부터 버림받았다고? 그건 말도 아니야.”

이게 어디 젊은사람뿐만이겠습니까? 복음을 모르는사람들 다 그렇고요. 더 놀라운 사실은 복음을 들었던 사람도 몰라요. 복음 이용해서 안버림 받을려고 애를쓰고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반대로 해석하는겁니다. “뭘 믿으면 될까요? 하나님. 뭘 지키면 됩니까? 어떻게 하나님 마음을 맞출려면 하나님 시켜주세요. 뭘하면 하나님 마음에 딱 맞아가지고 내가 하나님한테 버림 받지 않을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그 질문자체가.”

하나님의 뜻은 너는 버림 받았다 하는 것을 알라고 하는데 우리는 버림받지 않을려고 결사적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있습니다. 친구들 동창회할 때 동창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십년간 지나고 나이 한 서른돼서 쭉 모이잖아요. 그 모일 때 친구 하나하나씩 약속된 까페에 오게되면 전부다 거기서 평가내리고 분석합니다. 저사람 버림받았나 안받았나.

물론 그런 표현은 못하지만 “걔 잘됐대” 또는 “아주 집구석 작살났대, 인생거덜났대 안됐어 저거 앞으로 어떻게 살려는지 몰라”이런거. 이런거 수근덕 수근덕 하면서 “아이고 잘있었나?” 하고 인사하죠. 그런데 잘됐다 못됐다 인생이 힘들겠네 그정도는 할 수 있지만 “너, 신에게 버림받았어.” 이런 이야기는 누가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자체가 버림 받았느냐 안받았느냐부터 출발하는게 아니고 얼마나 잘 적응해서 버텨내느냐 안버텨내느냐 그것가지고 인간의 서로의 가치를 평가하고 비교하고 논하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여기에 3절을 보게되면 오늘 스가랴 예언의 핵심이 나옵니다.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목자가 “에고”하고 우는 소리가 막 우러난다는 말이죠.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다.”라는 이 대목에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그 팔자, 이스라엘의 모든 운명은 이스라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중간에 하나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요. 목자. 목자가 제대로 작동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작동되는거에요.

근데 목자가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그 여파는 이스라엘 전체가 완전히 해체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이런 예언을 할 때 현대인들은 이 스가랴 예언에 대해서 못받아들이죠. 왜냐하면 목자가 내 인생을 대체한다는 생각이 없어요 인간은. 내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하면 인간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자기가 버틸수 있는 환경을 자기쪽에서 환경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까 환경성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에 있는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환경이 무너지지 아니하면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그러한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 보면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환경의 변수가 제한돼있어요. “니가 아는사람 누구냐?” 물으면 뭐 친구 몇 명 댄다고요. “그럼 바이든 니 아나?” “모르는데요.” “푸틴 너 알아?” “모르는데요.” 그 시집간 나이 한 서른된 아가씨한테 주례하는사람이 묻습니다.

“신부는 남편을 사랑하나?” 뭐 이런 것 물어야 되는데, “신부는 젤렌스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거는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거에요. 아무 가정생활하고 관계도 없지요. 왜그러냐하면 나이 서른에 시집가는 그 색시에 있어서의 필요한 환경은 본인이 필요한 것만 뽑았어요. 그 변수가 몇 개가 안돼요. 몇 개 되지를 않는다고요. 그건 나를위한 환경이에요. 이걸 환경성이라고 하는겁니다. 나 살리기 위해서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쏙쏙 뽑아서 있는거에요.

세상에 마트가서 마트 물건 다 사는사람 없습니다. 마트 가서 카트 끌고 필요한것만 담아서 계산해 가는거에요.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계산해요. “뽑을 것 뽑았다. 이것만 하면 나는 산다. 그러면 됐지 뭐.” 끝. “내가 뭐 전체를 왜 알아야 되지?” 전체를 모르는거에요.

그 전체를 모른다는 것은 결국 뭐를 모르느냐하면 진짜 숨어있는 환경. 환경성 말고, 진짜 환경이 왔을 때 하나님이 제시한 목자는 딱 한분밖에 없습니다. 뭐냐하면 이 자연에서 버림받은분이 환경이에요. 버림받은 분이 목자에요. 버림받은 분이. 그러니까 예수님처럼 버림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환경성에 눈이 가려서 환경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프리카 사람 도와달라고 하죠. 도와줘보세요. 그사람 도와준다고해서 진리를 아는게 아닙니다. 잠시 유엔에서, 구호단체에서 먹을걸 얻은 것 뿐이에요. 그들이 아는 환경성이라 하는 것은 잘사는 나라가 나를 도와줘야 마땅하다는 그런 윤리 도덕 체계로 이루어진 환경성이에요.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그걸 이기주의라고 생각안해요. “잘사는사람 우리 때문에 잘 살았으니까 우리 못사는 사람 도와주는게 마땅하지 않느냐? 그게 윤리도덕이고 인간의 존엄성이잖아.”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은 존엄성 가졌습니까?

예수님은 전체 모든 환경 다 아시는분이에요. 다 아시는분이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쓴 잔을 마시겠나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약의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신약의 성도기 때문에 정답은 알았어요. 뭐냐하면 이땅에서 버림받아야 그게 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버림받으려고 나름 내 환경성, 내게 필요한 환경을 꼭 잡고 이걸 안 놓으려고 하는거에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버림받아야 돼?”

“내가 동창생한테 왜 그런 비난을 받아야 돼? 안돼. 나는 니보다 더 똑똑하고 성공할거야.” 이걸 꽉 쥐고 있는거에요. 이런 것 밖에 할줄 모르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주님과 비교해볼 때 “아, 내가 내쪽에서 환경을 생각했구나. 환경의 주인 되시는분이 나를, 환경을 투과해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아무 관심도 없고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얼마나 요령부리고 나한테 최대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나는 성공할거냐?” 이것만 생각했던거에요.

이게 정답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정답입니다. 진리고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스가랴는 그 중간에 있어요. 구약의 말기. 이스라엘 나라 작살났습니다. 그 작살났던 이야기, “목자는 이제 끝났다. 목자는 없다. 목자는 울 뿐이다.” 목자가 없으면 뭐가 없냐? 양이 없어요. 하나님과 양 사이에 목자가 있고 목자가 목자구실 못했으니까 양이라는게 있을 수가 없죠. 양이 없다는 말은 시편 23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그러한 시, 그러한 고백을 할 수가 없어요.

여호와가 목자가 돼야 되는데 아직 그수준까지 이르지 못하니까 자연적으로 그 여호와가 친히 목자가 되어서 끄는 양도 이땅에는 존재하지 않는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목자라는 것이 어디서 생기느냐. 이걸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는데 도대체 목자라는게 왜 생기느냐? 무엇 때문에 생기느냐?

그 말씀 드리기 전에 이 환경성에서 환경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무리 해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자기 환경성을 유지하면서 이 환경성에서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의 환경으로 넘어갈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 내가 만든 환경, 내가 생각한 환경이 하나님 생각하는 환경과 직접 뛰어들고 같이 통합할려고 시도하는 이 모든 시도, 그 모든시도가 다 쭉 실패로 다 끝납니다.

성전 만들어서 예배드리는 것 실패로 끝났어요. 율법 지키는 것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다 실패로 끝났어요. “니가 왜 건너오느냐”는거에요. 니가. “니는 환경성 안에 내 잘될려고 하는 그 마음가짐으로 이 진짜 숨어있는 환경,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로 드러내는 그 환경에 니가 거기로 넘어올 성 싶어?” 안됩니다. 될 수가 없죠.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대해서 여러분 방금 제가 말씀드린 그점을 한번 염두에 두시고 제가 시편 51편을 여러분들게 5절을 알려드릴테니까 그 둘 사이가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51편 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 참 정말 성신받은 다윗이, 다윗이 성신받았으니까 나올 고백이에요.

내가 죄를 지었다가 아니에요. 죄악중에 나를 출생했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나는 죄의 자녀라는겁니다. 죄의 자녀기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내쪽에서 어떤 착한 행동으로도 이게 변경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는거에요. 내가 예수믿고 하늘나라 간다는 이것이 이게 죄악중에 출생한 티를내는거에요. 아, 죄중에 그런죄도 있어요. 예수믿고 구원받으려는 죄가 있어요.

예수님이 이땅에 보낸 것을 주님이 숨어있는 환경이 나타났다는 생각은 죽어도 못하고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주신 환경성이라고 오해하는거에요. 환경성. 매사가 내가 실패하지 않는 존재가 되기위해서 애쓰다 보니까 뭐가 얻어걸리느냐 하면 교회가니까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 그거 하나 얻어걸렸거든요. 이 찬스를 놓칠수가 없다.“ 손들고 예수믿고 앞에 나옵니다. 다같이 박수칩시다. 오늘도 한사람 구원받았습니다.” 박수 착 쳐주고 하죠.

그게 그 교회가 바랬던 환경성이고 그거는 나는 나 나름대로의 내가 노렸던 환경성이고 환경은 없어요. 환경은 몰라요. 왜? 죄중에 태어났기 때문에요. 나밖에 모르는거에요. 나밖에. 우리집안 잘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무슨 말이 그런말이 성경에 그런 말이 없어요. 이게 왜냐? 본인도 모르게 자기 환경성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그냥 노출시킨겁니다.

그래서 이게 모친의 죄중에서 나를 잉태했다는 말은 숨어있는 환경이 환경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그 환경에 내 실력으로, 이 다윗 내 실력으로, 내 율법 지킴으로 내 믿음으로 도저히 그쪽으로 못간다는 고백을 다윗이 쏟아낸 겁니다.

내 힘으로는 그 세계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합니다. 못가니까 다른 출신자를 낸거에요. 나는 죄의 출신이에요. 우리 엄마가 죄에요. 죄의 출신자는 안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른 존재를 만들었어요. 피의 자녀. 피로 말미암아 출생한자를 만들어놨어요. 그게 우리아 장군입니다. 내 죄를 더욱더 죄되기 위해서 내손으로 죽여버린 사나이의 등장. 우리아 장군의 등장입니다.

나는 이래서 두 개의 자아가 된겁니다. 모친의 죄중에서 출생한 ‘나’와 우리아의 피에서, 우리아의 피, 숨어있는 그 환경에서 이쪽으로 통보, 연락을, 연결이된 그 소식이 들려오는 그 ‘나’. 졸지에 두 개의 나가 된겁니다. 그 두 개의 나 사이에 뭐가 있느냐?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 있어버려요. 십자가 사건이 있어버리면 십자가 사건은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나쁜짓을 한게 아니라 너는 날때부터 죄만 짓게 되어있어.” 그런데 이것을 숨어있는 환경으로 보지않고 환경성으로 보는사람은 뭐냐하면. “믿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어떤사람이 어떤사람보고 “너 죄인이야, 너 뭘 해도 죄인이야, 너 뭘해도 이단이야.” 이렇게 한다면 진짜 자기안에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는 사람같으면 “그건 평소에 내가 그렇게 생각 했어.”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멱살 쥐고 “니가 뭔데, 난 이단 아니야.”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게 우습지 않습니까?

본인은 하나님앞에 “맞습니다 나는 이단이고 죄인입니다.” 분명히 해놓고, 하나님이 타인을 통해서 그 소식을 전하니까 이제는 그사람 붙들고 시비거는거에요. “나는 이단아니야. 니가 이단이야.” 이런식으로. 이게 하나의 자아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현상이 벌어진거에요. 내가 건널수 없는 자아가 따로 만들어졌어요. 아주 쉬운 예로 이렇습니다. 어느날 전화가 왔어요. 전화가 왔는데 보니까 누가 전화했는가 뜨잖아요. 보니까 내가 내한테 전화했어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되는이야기 입니까?

이 비슷한 경우는 있어요. 이세상에 비슷한 경우가. 남편이 옆에 있는데 아내한테 전화왔어요. 전화 누가했는가 떡 보니까 남편 이래 되어있어요. 물론 그런경우는 있어요. 내전화를 집에 놔두고 와서 집에누가 와서 사용하면 그렇게 있는데, 이게 그냥 이 땅에서 그냥 생기는 일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은 뭐냐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내 말고 내가 건너갈 수 없는 내가 붙잡을수 없는 다른 나가 이미 피의 자녀로서, 죄 사함의 자녀로서 새로 만들어버린거에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할 때, 그때는 예수 안에서 새로 만든 나사로를 이야기하는겁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자기 오빠 이야기하고있거든요 지금. “우리 오빠 죽었습니다.” “아니야 너희 오빠 살았어.” 지금 대화가 안되는 이유는요,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가 둘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하나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인간은 죄에서 태어났어요.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거에요. 그 재료가 죄안에 있는 우리를 재료로 삼아서 전에는 아담의 안에 아담 형상을 입은 우리가 있다면, 이제는 아담형상 말고 나 말고 예수님의 형상,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드는거에요.

이세상의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에요. 시작과 끝입니다. 시작과 끝.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그냥 애써서 살아가요. 최선을 살아갑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알파요, 오메가다. 내가 시작이고 끝이다. 니 버려 그거. 안버려? 그러면 너는 죄의 종이야. 됐냐? 이젠 버리겠어?” 그렇게 하니까 인간은 “죄의 종이지만 죄사함을 받아서...” 자꾸 쭈물딱쭈물딱 자기를 갖고 어떻게하면 요리를해볼까 애를쓰고 있는거에요.

주님께서는 목자를 주시되 목자를 끊어내버립니다. 자, 창세기에서 목자라는게 어디에나오느냐 하면 그게 야곱이 열두지파한테 축복을 하는 그 대목이 나와요. 창세기 49장 24절에,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여기 목자라는 말과 같은 말로 이스라엘의 반석이 나오는겁니다.

이게 어느정도로 어려운지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어려운 이야깁니다. 목자가 있다는게 어려운게 아니고 어떻게 반석이 목자가 되느냐하는 그대목이에요. “목자가 반석, 그게 뭐가 어렵냐?” 이렇게 생각 하겠죠. 문제는 창세기 49장 10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 홀은 누가 갖고있는 지팡이냐하면 왕이 갖고있는 지팡이에요. 그러면 왕이 될 상이 누구냐 하면 유다지파에요.

그런데 유다지파가 왕인데 여기 24절에보면 목자가 어디서나오는가? 유다지파에서 목자가 나오는게 아니고 요셉지파에서 목자가 나온다고요. 그리고 목잔데 그 목자가 이스라엘 반석이랍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헷갈리게 했느냐 이말입니다. 뭐 말씀의 관심이 있어야 이게 뭐 어렵다 하는 것을 알겠는데... 왜 투톱이냐 이말이죠. 왜 투톱이냐?

손흥민을 앞장세우든지, 아니면 황희찬을 앞장세우든지 원톱을 나가야지 왜 투톱이냐 이말이죠. 조규성이 되든지... 왜 투톱이 되느냐 이말이죠. 왜? 투톱은 이스라엘을 모형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절차를 보여주느냐하면 요셉지파에서 목자가 나가서 그 요셉지파의 목자가 실패를 해요. 실패를 하게되면 요셉지파가 맡았던 그 목자 기능과 반석기능이 어디와 결합이 되느냐하면 준비되었다라고 여기는 왕 기능, 유다기능으로 통합이 되는 절차를 보여주면서 요셉지파는 제거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유다지파의 나라, 유다나라가 돼요. 북쪽에 열 지파 다 날아가고 두 지파, 남쪽 유다지파의 나라가 된다고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관심도 없겠지만 하여튼 그런게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왜 처음부터 유다지파를 그냥 왕으로 하면 될텐데 왜 요셉지파를 목자가 나온다 해가지고 들뜨게 만들어놓고 요셉지파를 왜 실패하도록 그렇게 유도를 하는가?

그게 왜그러냐 하면요. 이게 정탐꾼을 보낼 때 하나하나 다 설명하니까 내가 압박감을 느끼는데 짧은시간에 이거 다 설명해야 되는데 할때까지 해봅시다. 민수기 13장 6절에보면,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8절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에 눈의 아들 요셉이라” 에브라임지파는 요셉입니다. 그리고 유다지파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에요. 그러니까 야곱이 축복한 것처럼 갑자기 두 지파, 열두지파 전부 정탐꾼을 보냈는데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지파가 딱 투톱, 유다지파, 갈렙, 여호수아지파, 여호수아. 두 지파가 남고 나머지는 탈락이 되는겁니다. 벌써. 두지파가 이스라엘 지파를 대표하는 지파처럼 딱 부각이 되어요.

부각이 되면서 여호수아, 여기선 되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이 유대지파를 대표하는 갈렙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자인 여호수아 밑에 예속되어있고 종속되어있는 위치에 있어요. 왜냐하면 모세가 후계자를 세울 때 갈렙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갈렙은 이방민족이 에돔족속에 사람입니다. 에돔족속인데 출애굽할 때 들어와서 유다지파가 된거에요. 편입된거에요. 이방이에요. 이방이니까 이건 정식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인데 출애굽 할 때 그냥 섞여 들어온 잡족에 해당 되는거에요. 근데 잡족인데 잠복되어있어요. 이게 잠복되어있다고요.

정통 아브라함 족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흡수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반전을 일으켜서 어떻게 정통 혈통 아브라함 족속이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보여주는겁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떻게 목자로 실패하는가 보여주는거에요. 여호수아도 감 잡았어요.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갈 때 갈렙이 여호수아한테 예속되어있으니까 땅주세요. 이렇게했어요. 여호수아 14절에 보면. 이거는 누가 대장이냐? 여호수아가 대장이에요.

갈렙은 거기에 예속되어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땅 안줘” 하면 끝나는거에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갈렙에게 “너가 모세때 정탐할 때 신앙으로 했기 때문에 땅줄게” 하고 이렇게 땅에 들어가는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도 뭐를 감잡냐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이거는 시간가도록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여호수아때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있는 이방민족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출애굽한 이스라엘로 그것을 정복케 했잖아요. 정복케했다고요.

정복했는데 여호수아가 뭘 알고 있느냐 하면, 이게 정복해도 뒤집힌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던 거에요. 죽고 난뒤에 걱정되는거에요. 그래서 여호수아가 신신당부하고 그것도 모자래서 돌로만든 계약서를 세겜에다가 세우면서 신신당부를 해요. “너희 다른 신 안섬길꺼지?”라고 한거에요. 여기서 다른신은 뭐냐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방민족이 믿었던 그 신을 너희들은 안섬기겠지?”라는거에요.

그러나 제가 아까 말씀 드린것처럼 인간들은 인간 자체는 자기의 환경성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똑같아요. 어떤땅에 가든 하나님 믿는 민족이든 하나님 백성이든 그 말로 그렇게 해도 사람은 자기 환경성만 괜찮으면 자길 성공한걸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게 믿을수가 없어요. 여호수아 죽고난 뒤에 이거는 뭐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방신들을 믿기 시작했어요.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나라가 완전히 엉망진창 되었어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다 추방하지 않고 주변에 배치를 했어요. 딱 호시탐탐 노리도록 되어있다고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이랑 이걸 설명하게 되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이해되는 것이 확 떠오를겁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다시 말씀 드립니다. 너무 중요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마리아한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니 눈에 보이냐?” “보입니다.” “보이는데, 니가 만질 대상은 아니다. 니가 보인다는 것은 환경성이라서 보이지. 그러나 나는 너와 다른 환경에 속한다. 니가 속해있는 환경성하고 다른환경에 속하는다”는거에요. 여호수아가 차지하는 약속의 땅, 그 땅 오늘 스가랴 예언에 의하면 다 황무해집니다. 소용없어요. 인간은 땅보면 환장하거든요. 땅보면 환장해요.

좋은땅에 환장합니다. 땅이 없어서 문제지... 사람들은 모든 환경에 대해서 자기와 연관시켜서 생각해요. 저 넓은땅, 저 푸른 숲. “아, 나는 저것만 있으면 얼마나 성공하겠는가?” 이게 우러나오는 환경성입니다. 이게 이방신을 믿는 요소에요. 여기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했던 것은 목자로서 양을 약속의 땅까지는 왔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레벨에 수준에 그 양이 될 목자는 여호수아끝나고 끝나는겁니다. 요셉지파의 목자가 나올 것이다. 그 목자는 끝났어요.

이제는 누가 나서게되느냐? 이방신들을 섬기고 이방이 공격해 왔을 때 그때 누가? 유다지파가 이제 들고 나서는겁니다. 그 유다지파가 들고나오면서 이야기의 핵심은 이제는 요셉지파, 레위지파도 사사기에서 완전히 물건너갔어요.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요. 이젠 유다지파가 나를 어떻게 살리는가? 그거는 진짜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고 이방나라, 룻기에 나오는 이방나라, 모압여인이 다윗의 혈통의 조상으로서 개입되는 현상. 반전이 일어나죠.

숨어있는 환경이 인간들이 환경성을 감당못할 때 인간의 환경성 안에 숨어있던 보이지 않던 환경이 이방민족이란 이름으로 “니가 어떻게 여호와를 믿어? 여호와는 우리신이야. 너는 이방신 믿잖아”라고 배척했던 그쪽에서 들어오는거에요.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 이방인을 통해서 들어오는겁니다. 이거는 뭐냐하면 이방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볼 때 버림받은거에요. “이게 어디 더러운 모압여인이. 율법도없는게. 여호와도 모르는게. 저주받은 개같은 여인이 어떻게 우리민족이 우리땅에 들어와?” 무시했던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선택된 민족이다.” 했던 그거.

하나님께서는 그걸 쪼개고 해체시키면서 들어오죠. 그 다윗의 증조모가 누구냐? 룻입니다. 이방인인 룻이에요. 그 다윗이 유다지파고 그 다윗이 목자에요.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거는 요셉이 말한게 아니고 다윗이 이야기하는거에요. 유다지파의 약속대로 너희 땅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날 것이다. 그 왕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뭐냐? 다윗의 등장입니다. 근데 그 다윗은 다윗 one이에요. two가 있었겁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실분이 다윗 two. 다시말해서 다윗의 자손인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겁니다.

환경, 인간이 알고 있는 천국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 그 모든 시도를 문제삼고 “니가 그런시도를 하는 것은 니가 장차오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버림받았는데 니는 뭔데 니가 죄에 태어나서 버림 안받을려고해? 니가 버림 안받겠다고 시도한 그 자체가 이게 죄의 증거야.”라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수 있는겁니다.

“만지지 말라, 니 동네하고 내 동네가 달라. 니가 만질 대상이 아니야. 너는 너의 속한 환경에서 내 환경으로 못와. 건너 올수가 없다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안건너가지.” 못 건너와서 죽고요, 안건너와서 죽어요. 죄의 종이니까. “나 바빠서 교회못갑니다.” 이것도 죽고. “교회 열심히 다녀야지.” 이것도 죽고. 자기 자신이 나의 환경성은 내가 죽으라고 허락한 주님의 환경이에요. 내가 망하라고 준 환경이에요. 왜? 따로 이미 마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하게 구애받지않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자유인으로서 이땅에 내가 없어지면서 점차 예수 안에 주께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양으로서의 ‘나’가 되는겁니다.

구약에는 뭐냐하면 목자있다 양있다, “너 뭐할래? 나 양할래. 왜? 그래야 목자를 만나야지.”이게 구약적 안목이에요. 그런데 목자, 양, 내가 양해서 목자만날래 하는 이것이 이 그림이 다 무너져요. 무너지고 목자가 나타나서 내가 너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이 이렇게 통보받을 때 그게 연결되고 들려질 때 비로소 우리는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아는구나. 나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중간에 두고 서로 의견이 통하고 있는거에요. 그게 요한복음 10장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십자가 우리안에 들어오고 십자가 들어오게되면 남들보기에 내모습은 환경성에 속하고요. 주님보시기에는 진짜 예수안이 우리안에 들어오는겁니다. 끝으로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바로 내안에 십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안에 주님이 산다는 그 십자가 사건이 저희한테 벌어지니까 나는 십자가를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마음껏 감사하면서 증거할수 있었던 겁니다. 십자가를 드러내는 자. 전에는 죄만 드러내고 자기의 잘남만 드러냈었는데 이제는 십자가 드러내는 자가 피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받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잘살아도 말아먹은것이고 가난해도 말아먹은것이고 남들보기에 그럴싸한 인생도 다 소용없는것이고 못난인생도 소용없는것이고 정말 주께서 원하는 것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령있는 사람인 것을 저희들 이젠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