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9:1-8 / 악의 검침원

정인순 2024. 5. 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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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검침원 

 

이근호
2023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9:1-8

(9: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9:2)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9: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9:4) 주께서 그를 쫓아 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9: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9: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9:7)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무인도’란 실제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의 관찰과 점검의 대상화되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판단이 나버린 그 후에 ‘무인도’라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 누구도 살지 않았고 그런 섬이 있는지 여부도 모른다면 ‘무인도’은 실은 없는 섬입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인간들의 의식 안에서 있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의식에서 밀려난 분이 있다면 이 세상은 무인도와 같이 없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명 같은 것들도 그 지명과 관련된 인간들이 살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세상은 몽땅 불로 태워져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없애버리십니다. 참으로 있는 세상은 천국과 지옥 뿐입니다.

누가 천국가는 자일까요? 오늘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은 엄연히 있다고 자부되는 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추방되어 사라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없앨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없애려는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을 모집하십니다.

망하는 세상에서 망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세상에서 같이 망해가면서 왜 망해야 합당한지를 하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가 천국에 합세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 ‘없는 자’만이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로와 시돈을 유별나게 주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류의 최후의 모습을 실제로 구현하고 보여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안도시 민족들은 인간들의 내부에서 충동질된 성질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모습을 보여주는 지를 대변해주는 민족입니다. 에스겔 28:12-13에 보면,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아름다운과 사치과 재력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런 데서 나오는 자신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겔 28:2)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두로와 시돈이 어떤 식으로 살던 말던 나는 나대로 살고 내 형편대로 살면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겉으로 포장된 생각이고 내부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주목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들의 지향성을 이 두 해안도시가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시돈과 두로를 부러워하지 않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자기만의 인생을 산다고 우기지만 모두 이미 한 바구니에 담겨져 있는 형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욕망조차도 모방합니다. 즉 어느 누구도 세상 사는 의욕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영국에서 살았던 벤덤이라는 공리주의자는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탐색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산다고 보았습니다. 그 행복이란 실은 쾌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쾌락을 양적으로 계산 가능하다고 여기는 자신이 가진 쾌락의 총량이 곧 그 사람의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사람이 하루하루 사는 것은 쾌락을 긁어모으기 위해서랍니다. 우량적인 쾌락은 다음의 7가지 조건에 충족되어 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쾌락의 강도(剛度)가 푸석푸석하면 안되고 단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쾌락이 오래가야 한다는 겁니다. 쾌락의 지속성입니다. 셋째 쾌락은 확실이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호하거나 추상적이면 안 된다고는 겁니다.

넷째로 쾌락은 주변에서 쉬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쾌락의 근접성입니다. 여섯째로, 쾌락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반복해서 생산해내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쾌락의 생산성입니다. 일곱째, 한가지 쾌락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쾌락이 좋다는 겁니다. 쾌락의 범위성입니다.

이러한 쾌락은 모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 나무의 보고 난 뒤, 인간 내부에 생긴 욕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만 한 것”이 선악을 아는 나무 과실입니다. 이런 쾌락이 긁어모아 두로는 참으로 번창한 해안도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공주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오모리 왕은 자기 아들의 신부로 이 두로의 공주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공주는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합왕을 위하여 최선을 협조를 다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친정에서 익힌 ‘바알신의 번창신학’을 열성적으로 북 이스라엘에 전파했습니다. 친정 나라처럼 이 북이스라엘도 번창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세벨은 남쪽 유다의 왕까지 자기 딸 아달랴를 시집보내었습니다. 그 남편은 유다왕국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이런 이세벨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20에서는 ‘음녀’라고 표현합니다. 즉 겉모습은 여호와이지만 속은 바알입니다. 인간의 보편적 악함은 인간의 사적인 악함을 능가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유한한 악만 알뿐이지만 실은 이미 무한한 악의 통제 안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지만 참된 신은 ‘죽은 신’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자신이 굳굳히 살아있어야 하기 죽지 않는 신 바알을 선호한 겁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 밀려 이 땅에서 사라져버린 신이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사라져버린 무인도와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을 덮고 있는 무한한 악에 대해서 늘 점검하고 검침하고 후딱 빠지는 선지자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예수 안’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한때 여호와도 모르고 다윗도 모르고 건방떨었지만 (삼하 5:6-8) 다윗에게 함락되고 난 뒤에는 한 여부스 사람(대상 21:18)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전체 이스라엘을 건지는 제단, 곧 성전이 세워지는 자리가 된 겁니다. 바로 있어도 없는 자리요, 없음으로 있는 무한한 자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끝장 난 그 이후의 안목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스가랴 9장 1-8절(악의 검침원) 231227-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9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 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라,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아멘.

여기 오늘 지명들이, 여러 가지 지명들이 나오는데 이 지명들이 나오는 것은 이제 그 지명이 원래있던 지명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없던 땅으로 간주 되기 전에 지명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고다, 경고라 하는 말은 땅의 지명을 지을때는 반드시 거기에 거주민이 있어야 돼요. 사람이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가 되어버리면 그 땅에 사람이 언제 살았었었는가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다 없애버립니다.

인간이 땅에 살았는데 사람이 사라져버리면 그 지명도 같이 있을 이유가 없죠.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무인도라는게 없어요. 무인도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이유가, 무인도가 성립되려면 어떤 섬에서 인간이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측정하고 관찰하고 탐색하고 조사하고 난 뒤에 이거는 무인도다, 라고 거기다가 규정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측정하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 그 섬에 사는 사람 자체가 아예 애초부터 없었다면 무인도라는 것도 없는 거에요. 근데 사람이 거기에 살다가 자기 혼자 섬에 살다가 그 섬에서 거기서 이제 그만 살고 나온다. 그러면 그 섬은 그때부터 무인도가 되는겁니다.

이 무인도라는 것은 없는 섬인데 아예 있지도 않은 섬인데 사람이 이 섬에 누가 사나 안 사나 조사하고 탐색하면서 비로소 하나의 섬은 무인도로서 인간세계에 등록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무인도라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의 경고가 주어졌을 때 그 말씀의 진의, 진짜 뜻을 알려면 어떤 사람에게만 이 말씀의 의미를 아느냐 하면 이 땅에 내가 살지 않는 사람, 이 땅에 살지 않는 사람에 한해서 이 스가랴 9장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이땅에 살지 않는 사람.

한때는 살았지만 더는 살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살지 않는 사람에게만 이 말씀이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들은 그렇습니까? 이 땅에 안 살고 있지요? 이 땅이 무인도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전에는 우리가 이 땅에 주민 등록해서 이 땅에 출생했어요. 그래서 당연히 출생했으니까 내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왔어요. 말씀이 와서 “너는 이미 죽었고 너는 이제 어디 사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라고 해버리면 여기서 우리는 꼭 알아야 될 순서가 그리스도가 지금 어디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스도는 이 땅에, 주님은 이 땅에 왔다가 이 땅에서 사라진 분이에요. 이 땅에 한 번 왔는데 다녀간 분으로서 이 땅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라진 분입니다. 그 사라진 분과 함께 사는 사람이어야 이 스가랴 9장이 해석이 되는겁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해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라는 분이 이 땅의 사람 인것처럼 이 땅에 오셨는데 이 땅이 밀어내서 그분은 더이상 이 땅과는 상관없는 다른 곳에 살고 계시는 분이에요.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주의 나라 안에서 주님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분이 주신 말씀이거든요. 이 땅에서 사라진 분이 주신 말씀을 우리가 지금 스가랴 9장으로 보고있는 겁니다. 따라서 스가랴 9장을 이해하려면, 우리도 이 땅에 산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이 땅사람이 아니고 시민권이 이 땅에 있지 않은 사람에 한해서 스가랴 9장이 해석이 되는거에요. 편하지요. 이 땅에서 전쟁 일어나든, 코로나가 있든, 그것 성도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아무 상관 없어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이 땅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오늘 본문이 이해가 됩니다.

왜? 본문에 여러 가지 지명들이 나오거든요. 지명들, 하드락, 현재 시리아 동네에요. 시리아에서 바다 쪽으로 지중해 쪽으로 동쪽에 있는 도시. 다메섹, 다메섹은 다마스커스, 아랍 나라의 수도, 지금도 뭐 시리아라고 보면 되죠. 그다음에 이스라엘하고 맞닿은 접경지역 하맛, 그리고 두로와 시돈, 두로는 지중해에 있는 항구도시인데요. 도시면서 나라에요. 옛날에는 도시가 나라였어요.

두로는 지금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그 북쪽에 있어요. 두로. 두로가 둘다 지중해 해변 도시인데 두로는 이스라엘 쪽에 가깝고요, 두로 보다 더 북쪽에 현재 레바논 있는데 그 북쪽에 있는곳은 시돈입니다. 옛날에는 두로와 시돈을 같은 왕국이 있었기 때문에 같이 쳐주지요. 거리는 좀 떨어져 있어도. 시돈이 북쪽에 있고 두로는 남쪽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에 가깝습니다. 텔아비브와 가까워요. 욥바와도 가깝고요. 그런 동네입니다.

그다음에 5절에 보면 아스글론. 전쟁하면서 많이 일어났죠. 이스라엘 쪽의 최남단. 그 남단, 이스라엘 남단에 가면 뭐가 있느냐? 5절에 나옵니다. 가자지역. 가사지역. 그 땅이 무슨 땅이냐? 이게 아스돗도 마찬가지고요. 다 블레셋 사람의 땅입니다. 이 지명들이 이렇게 나올 때 우리는 아까 제가 처음에 설교하면서 이야기했죠.

이 지명들 인간들이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무가치한 동네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있으나 없는 동네. 거기에 살고 있으나 실은 몽땅 다 죽어버릴 사람들이 사는 동네. 주님하고는 상관없는, 주님에 의해서 다 쇠퇴하고 소멸 되어야될 그런 사람이요, 또 그런 사람이 이름을 지었던 지명들입니다. 이 땅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사라질거에요.

그러면 사라질 것은 사라지면 되지 왜 사라질 것을 이렇게 경고하느냐? 지금 사라지기 전에 상태기 때문에 경고하는거에요. 사라지기 전에 너희들이 왜 사라지는지 이유를 하나님 쪽에서 날립니다. 그렇게 날리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라질 것 그냥 없애면 되지 왜 그렇게 경고해서 그렇게 또 하나님의 계시로서 이런 걸 언급을 하느냐?

문제는요 이 땅이 사라지는게 문제가 아니고 천국에 예수님과 함께 살 사람이 누구냐가 더 중요한 문제에요. 천국에 예수님과 함께 살 사람이 누구냐? 천국에 누가 들어갑니까? 같은 질문입니다. 천국에 누가 들어갑니까? 이 땅에 살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혼쭐난 사람. 망해버린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겁니다. 이 땅에 살면서. 그럼 망하기는, 안 망한 사람 있어요? 다 망하죠. 다 망하는데 망하는 이유를 아는사람이 천국가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안 망할 사람 없어요. 다 망하는데 하나님께서 굳이 망하면서도 기어코 경고 날리고 “망한다. 너희 심판받는다. 니가 교만했다.”라는 경고의 말씀을 계속 던지는 이유는 천국에 누가 사느냐는 거에요. 천국에 누가 사느냐. 교회가는 사람? 아니에요. 누가 사느냐? 교회를 가든 절에 가든 성당 가든 상관없이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반드시 내가 망해야 된다는 사실, 이유를 하나님 관점에서 정리가 된 사람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망했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천국 갑니다.

땅에서 태어난 게 뭐가 그리 죄라고. 그렇게 그걸 왜 망하도록 하시는가? 땅에 태어난 게 뭔데? 땅에 태어나서 바르게 살면 되지 않느냐. 왜 땅에 태어난 자체가 망할 수 밖에 없는가? 그 이유가 시돈과 두로라는 민족이 설명을 해줘요. 땅에 태어난 인간들이 그냥 곱게 땅에 태어난게 아니고 땅에 그들을 어떤 중심 축을 만들었어요. 중심되는, 땅에서 사는 인간들이 중심이 되는 그러한 나라를, 그런 상황을, 그런 수준을 따로 인간들은 추구를 한겁니다.

그 인간이 내부적으로, 범죄한 인간이죠, 물론 모든 인간이 마귀로부터 범죄한 인간. 범죄한 인간이 자기의 자연스러운 성질과 마음가짐으로 뭔가 추구를 하게 되어있는데, 그냥 추구하는게 아니에요. 그 추구한 것을 현실화시킨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바로 시돈과 두로입니다. 시돈과 두로에요.

우리가 뭐 성경 1독하고 2독해도 성경 다 못 외우잖아요. 대충 어디있다는 것도 잘 모르죠. 시돈과 두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세계에 자기 인간들 멸망할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뭔가 꼼지락 거리면서 이 땅에 천국 같은 나라를 그들은 시도 했고 그걸 실현시킨 유일한 민족이 두로 민족입니다. 물론 그 두로 민족이 했던 그 장소. 그 장소는 소규모 적이에요. 면적이 넓진 않아요.

그걸 대규모적으로 확대시킨 나라가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은 두로 민족이 추구하는 그 정신을 제국적으로 그 당시에 유력한 나라로서 전 민족을 전부 다 그 정신으로 통제했고 지배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땅에 사는 인간들이 뭐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느냐? “그냥 희망 사항이겠지”, 아니에요. 실제로 두로라는 이 지역은 인간의 희망을 현실화시켰다니까요?

그걸 현실적으로, “거봐, 우리들의 욕망은 이렇게 달성 되는거야.” 그걸 증명한 민족이 두로 민족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 점을 아주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두로 민족이 도대체 뭐를 했기에 하나님께서 주목하면서 그렇게 했는가? 일단은 그 두로 민족이 얼마나 대단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밑에서 어떤 소리를 했는지 성경에 에스겔서 28장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체 할찌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거에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에요? 자기가 두로라는 조그만 해변가 도시인데, 잘살긴 잘살죠. 최고로 잘살았지요. 도신데, 뭐 그렇게 그걸 장담할 정도로 나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하나님 계신 곳이다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 계신 곳이 에덴동산이었거든요. 근데 흘러들어오는 옛날 에덴동산이 이미 지나간 에덴동산 깨진 에덴동산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두로 민족에 의하면 그 에덴동산은 현실화 적으로 지상으로 이렇게 구현이 된겁니다. 그게 바로 에스겔 28장 13절에 나옵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바로 두로 왕이 이 아름다움이 극상의 아름다움. 이걸 획득하기 위해서 지혜가 충족했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지혜, 완전한 지혜로 인하여 이런 것은 에덴동산을 이 지상에다가 재현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두로와 시돈에 대해서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제일 빠른 이해가 뭐냐하면 시돈은 홍콩이요 두로는 싱가폴입니다. 싱가폴.

소규모인데 극상의 이 시대의 제일 좋은 것들은 거기에 다 모여요. 다 모이기 때문에, 다 모이는 이유가 거기에 투자처가 되기 때문에. 뭐 지하자원이 있어서 투자 하는게 아니에요. 돈보고 돈이 투자 되는거에요. 돈 보고. 홍콩도 마찬가지고 싱가폴도 마찬가지고, 세계 금융의 허브라고 자부하는 거에요. 특히 아시아 쪽의 모든 돈을 거기다 끌어모으는 겁니다. 세계에는 뉴욕이 하나의 허브가 되겠지만 아시아 쪽에서는 돈 많은 화교들 중국 사람들 동양인들 돈 거기다 투자하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사람은 마지막에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욕망의 마지막은 돈 있는 자가 돈을 번다는 그것까지 질주하게 되어있는 것을 그걸 실제로 이 현실 세계 안에서 실제로 그걸 가시화시킨 민족이 두로민족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중심이며 동시에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로가 그러든 말든, 시돈이 그러든 말든, 홍콩이든 싱가폴이든 우리는 우리끼리 살면 되지 않겠느냐? 나 그런데 관심 없어.” 이렇게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아담이 현혹될 수밖에 없던 나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선악과의 나무에요. 과실이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짝이 없어요. 따라서 모든 인간이라면 적어도 인간, 심지어 뱀도 좋아했으니까, 인간이라면 탐을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보암직도 먹음직도 탐스럽게 하는 이게 뭐냐 하면 그게 인간을 자극하는 인간 내부를 완전히 정복하고 자극하는 쾌락이에요. 쾌락.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이렇게 편하게 물어보면 사람들은 말해요.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뭐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할 것도 없이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행복 하려고 삽니다.”

자, 행복이 뭐지요. 물어요. 행복이 뭐냐 하면 기쁨과 쾌락이 극대화 되는게 행복이에요. 기쁨과 쾌락이. 그래서 영국에 벤덤이라는 학자가 연구를 했습니다. 인간은 쾌락으로 산다. 그러면 인간은 쾌락이 있어야 행복하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 사는 사회에서 뭐만 따지면 되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쾌락을 많이 내가 획득할 수 있는가, 이게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루의 힘을, 살 수 있는 의지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본거에요. 동력.

나에게 기쁨을 주는게 뭐냐를 그 기쁨을 주는 것을 정하고 그걸 획득하면 되는거죠. 그 획득했을 때 벤덤이라는 사람이 조사를 하고 연구를 해보니까 쾌락을 획득할 때 어떤 쾌락이 좋은 쾌락이냐 하면 7가지를 제시했어요. 그 사람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첫째, 쾌락이 강도가 있는 쾌락이 좋다. 쾌락이 푸석푸석한 쾌락. 이것은 안 좋아. 강력한 쾌락이 좋다는 거에요. 1번, 강도.

그다음에 순간적으로 강력한 쾌락이라도 이거 순간적으로 되면 싫어요. 이게 지속해야 돼요. 1번은 강도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이게 지속되어야 돼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 쾌락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확실히 결과적으로 그런 쾌락이 보장될 수 있어야 됩니다. 확실성. 1번 강도 2번 지속성 3번 확실한 쾌락. 쾌락의 확실성.

네 번째가 그렇게 쾌락이 좋고 하지만 쉽게 근접해서 쾌락을 얻을수가 있어야 돼요. 필드에 한번 나가면 50만원 쓴다는데 없는 사람이 골프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골프 치는 쾌락을 쉽게 근접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근접성이 있어야 돼요. 가까운데 쾌락이 있어야 돼요. 첫 번째 강도, 두 번째 지속성, 세 번째 확실성, 확실하게 쾌락 잡아야 돼요. 네 번째는 근접성, 가까운데.

다섯 번째가 뭐냐 하면 그 쾌락을 그냥 얻기만 하지 말고 그걸 수집하고 채집만 하지 말고 내 집에서 내가 생산하면 더 좋게 되지 않는가? 정착해서 농사 짓는게, 채집 생활에 수렵 생활에서 끝나서 이제 정착 시대에 들어가면 집에 텃밭에서 곡물을 생산할 수 있잖아요. 그게 생산성이거든요. 쾌락을 한자리에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계속 생산하면 그게 최고의 쾌락이다. 그게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쾌락에 잡티가 끼면 안 돼요. 쾌락에.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 쾌락의 순수만 남아야 돼요. 신나게 고스톱 쳐가지고 돈 끌어서 하는데 딸이 와서, “엄마, 엄마 밥 줘.”하면 잡티가 끼잖아요. 지금 막 따는데. “좀 있다 한판 끝나고 하자.” 그 쾌락이 깨지잖아요. 순수해야 되고 마지막 일곱째, 쾌락이 점점 더 확대되어야 돼요. 범위가 확대, 넓어져야 돼요.

지속만 할 뿐아니고 범위가 한가지 쾌락이 오래 가는게 아니고 여러 가지 쾌락까지 다 포섭이 되어야 돼요.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성. 이게 바로 양적 공리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쾌락은 양으로, 총량 쾌락은 양적으로 총량을 계산할 수 있어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들이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는 겁니다. 뭐 할 말 없지요.

왜 우리가 이 주장에 대해서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이유가 우리 내부가 우리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 내부가 방금 이 이야기 한 것에 다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거에요.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날마다 쾌락. 근데 그걸 말로는 못 하죠. 왜냐하면 너무 천박해서. “교양이 없어 천박하게.” 이렇게 되기 때문에 말로는 못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마음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좋아 보이는 것 순수해보이는 것 최고의 것을 다 끌어모았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보암직도 먹음직도 탐스러운 거를 다 끌어 모았던 민족, 그게 바로 두로 민족이에요. 이게 두로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로 민족의 공주가 있었어요. 공주가 살고 있었거든요. 그 공주가 누구하고 결혼했느냐 하면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결혼했습니다. 왕이야 뭐 어릴 때 자기 배우자가 누군지 몰랐는데 오므리라는 자기 아버지가 아합왕에게 그 아들 장가를 보내면서 며느리를 두로 집안의 며느리를 뽑았는데 그 이름이 이세벨이에요.

요한계시록 2장 20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이세벨이 나오거든요. 이세벨이 시집을 갔는데 남쪽 유다 말고 북쪽 이스라엘, 이스라엘 둘로 쪼개졌으니까요. 북쪽 이스라엘 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시집을 가면서 남편을, 자기 집안일이 남편을 봉양 하는일이니까, 남편을 적극적으로 협조합니다. 남편에게. 근데 남편에게 협조하는데 그 협조하는 방식이 뭐냐? 우리 친정집 두로 집이 세계 최고로 홍콩이라니까요? 싱가폴이에요. 세계 최고로 사치스럽고 제일 좋은 것이 집합 되어 있고 집대성되어있는 동네에요.

번창한 거에요. 그 번창했던 그 동기. 그렇게 나라가 그 동기를 어디다가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가 시집온 북이스라엘에다가 거기다가 집어넣기 때문에 이세벨은 집어넣는데 그것으로 하나의 왕비로서 자기 할 도리를 다 했다고 보는겁니다. 집어넣는 방법이 뭐냐? 바알 신을 전파 하는거에요. 열성적인 전파자, 바알의 전파자가 누구냐?

바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이 전파하는데 북이스라엘만 전파한게 아니에요. 남쪽에다가 아달랴라하는 자기 딸을 또 거기다 시집을 보내서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까지 전부 다 누구 편을 만드느냐 하면 두로가 시도하는 정책을 그대로 확산시키게 된 계기가 되는겁니다.

그런데 이 이세벨을 가지고 뭐냐 하면 음녀 이세벨이라고 해요. 음녀. 음녀라는 말은 결국은 이세상 모든 것들이 아무리 여호와가 어떻고 언약이 어떠니 율법이 어떠니 뭘 해도 인간은 다 넘어가게 되어있어요. 이 번창 신학에 대해서. 바알의 번창 신학. 번창 하는게 그게 바로 승리자, 게임에서 승자 아닙니까?

돈도 별로 없으면서 큰 소리 친다고 되는게 아니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든 세상은 하나의 성질로 거기에서 전부다 응집되게 되어있어요. 집중되게 되어있다고요. 아닌 척 해도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를 향하여 지금 질주하고 있습니다. 질주하는 그것을 격려하고 내가 잘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다는 것을 실제로 현실화시킨 것으로 이미 증명해버린, 거기에 도와줬던 신이 바로 바알 신입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이나 남쪽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어떻게 변개시키느냐 하면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안에는 바알 신이 들어가는 거에요. “우리도 한번 살아보자. 잘살아보자 우리도.” 잘 사는게 뭡니까? “우리도 행복해보자.” 좋아요. 자, 행복이 뭐라했습니까?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성. 양적 쾌락. 이것 빠졌는데 행복할까요? 이게 빠져버렸는데.

이것 빠졌는데 기쁨이 있을까요? 인생에 있어서. 이것 빠지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 맛이 나겠습니까? 안 나지요. 뭐 유다고 북쪽이고 이방이고 이스라엘이고 관계없어요. 여기서 전부 다 마음이 한마음이 된겁니다. 한마음이 된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 봅시다. 참 이상하죠. 대전에 어제 강의에서도 제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사람은 오직 눈에 보이는게 다고 현실에 충실 하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현실에 사는 사람 중에서 한 사람 두 사람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요. 왜 그걸 현실에서 뺍니까? 자, “현실에 충실합시다.” 충실한데 왜 주변에 있던 가족들 왜 나이 좀 많으면 하나씩 둘씩 전부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느냐 이 말이죠. 왜 다 죽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살고 싶어했는데, 왜 돌아가고 싶죠?

그게 이렇습니다. 이게, 전부 다 마음이 하나가 된걸 집단이라고 해요. 집단. 그러면 모든 인간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모아져요. 사람은 말로는 “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느새 보면 어느 집단에 속합니다. 집단이라는 이 말을 더 쉽게 하면 바구니에요. 인간은 이미 혼자서 못 살아요 바구니에 담긴 채 산다고요. 이걸 수학에서 집합이라고 하는데 세트(set). 하나의 집합을 형성해요. 자기는 개인적으로 잘 살고 싶지만 뭐 안되면 누구 탓이냐 하면 같은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다른 사람 핑계 대요.

이 말은 평소에 남들을, 집단을 늘 의식하며 살아 왔다는 겁니다. 좋아요, 의식하세요. 이 사회를 의식하는데 그 사회 중에서 하나씩 둘씩 자꾸 죽는 사람 생기는 것은 그건 왜 주목하지 않습니까? 왜 그건 빼고 하는거에요. 그거 반칙 아니에요? 거기에 이선균이도 포함되어 가지고. 왜 자꾸 죽어요?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면서 기쁘게 살려고 애쓰면서 왜 자꾸 죽습니까?

바알 신은 죽지 않는 신이에요. 여러분 그걸 아셔야 돼요. 왜 바알 신을 좋아하느냐, 번창을 좋아하느냐? 바알 신은 신이기 때문에 안 죽어요. 인간 나라에서 신은 죽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진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을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 가지고 진짜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그게 뭐냐? 죽는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행복과 번창과 쾌락에 빠져서 그 쾌락과 행복과 번창이 되려면 기본이 뭐냐? 그렇게 추구하는 나는 안 죽어야 돼요.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일단 안 죽는다고 치고 “안 죽는 내가 뭐하면 행복합니까? 목사님.”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주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우리는 안 죽으려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틀어져도 보통 틀어진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그리고 이 인간들을 사랑하사 경고를 날리는 거에요 경고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내 백성들은 이 경고가 의미 있게 들려 라고 오늘 스가랴 9장을 이야기한 겁니다.

스가랴 9장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거기에 여부스 사람 나와요. 7절 끝에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같이 된다고 했거든요. 여부스 사람이, 여부스가 뭐냐? 옛날 예루살렘 지명이 여부스에요. 예루살렘 되기전에 여부스 사람이 살았던 동네에요. 이 사람이 당연히 이방인이니까 여호와를 몰랐어요. 그래서 사무엘하 5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그 대목이 나옵니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다시 말해서 “다윗? 그 잘난 니가 다윗이야? 한번 쳐들어와봐. 우리 동네에 있는 소경과 절룩발이 장애인들도 너 같은 인간들은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어”라고 여호와 전쟁인지 몰랐기 때문에, 다윗이 사람 전쟁하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시건방지게 교만 떨면서 “쳐들어 올려면 쳐들어 와봐라. 우리 동네 제일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것들도 너희들 다 없애버려.”라고 장담했던 그들이 다윗이 그 성을 빼앗아서 다윗성이라고 만들었어요.

이게 여부스 사람이 여호와를 몰랐을 때 다윗을 몰랐을 때 그때 그런 큰소리를 쳤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여부스 사람이 역대상 21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여부스 사람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극대 극을, 두 개의 극점을 다 보여준 사람이에요.

시건방짐의 끝점을 보여준 것도 여부스 사람이에요. 다윗이 쳐들어와서 다른 민족 다 쳤는데 자기들끼리 자기들만 남아있으면서 하는 말이 “다윗 너 와, 우리가 쉽게 너 물리쳐.” 큰 소리 쳤던 그 교만의 절정을 보여 줬던게 여부스 사람이고, 나중에 이스라엘이 사탄에 의해서 다 죽을 수밖에, 멸망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살려낸 그것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에요.

그게 제단이에요. 그 제단이 뭐냐? 성전의 제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받으시는 장소가 되었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극히 교만한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는 뭐냐? 악의 중심. 최후의 악의 거점으로 보시는 거에요. 그 악의 거점이 될 때 거기서 뭐냐? 인간은, 두로도 마찬가지고, 악의 거점이 될 때 그게 뭐냐?

악의 무한성. 악이 품고 있는, 유한한 인간이 아는 유한한 악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의 보편성. 악의 무한성. 또는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다 악. 다 죄악 됨. 그것을 두로 라는 대표적 건방짐을 통해서 그것을 멸망시킴으로써 하나님은 경고를 날린 겁니다.

자, 그러면 슬슬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스가랴 9장 누가 이해 된다 하던가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이해돼요. 그럼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 사는가? 하나님과 함께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이 스가랴를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볼 때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무한의 관점으로 인간세계에서 무한의 악과 만나는, 접촉하는 그러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너 잘못되었다, 너 잘못되었다, 너가 문제다, 너는 착해”가 아니라 한꺼번에 이 세상 전체를 하나의 악의 보편성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안목. 그 사람이 바로 여부스같이 이미 하나님 앞에 망해버리고 심판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신의 안목이에요. 주님의 안목입니다.

“너, 나. 누가 잘났다. 아이고, 하지마 하지마. 잘난 사람 없어. 다 똑같애.” 또 다시 하려니까 지루해서 못하겠다. 강도성,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오직 즐겁고 쾌락, 쾌락, 쾌락밖에 모르는 인간, 그 쾌락의 자녀들이 갖고 있는 것은 쾌락밖에 없는 것. 그중에 우리가 그 속에 포함해서 우리는 잘사는 미국 같은, 싱가폴, 홍콩 같은 그걸 은근히 부러워했잖아요. 그게 바로 뭐냐? 우리는 사적으로 그게 나쁘다고 하지만, 사적으로 나쁘고 개인적으로 나쁜게 아니라 이미 인간을 전체를 덮고 있는 악의 무한성 속의 일부에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땅에 누락된 게 있어요. 땅에서 일어난 모든 모자란 게 있어요. 그 누락된 거는 인간의 땅들은 누락된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 두로가 보여주듯이 모든 게 에덴 동산 같았거든요. 너무 좋아서 에덴 동산 같았다 이 말이죠. 누락된 것은 주님이 다녀감으로써 이 세상에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것이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되는 겁니다.

그건 뭐냐? 인간들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인간들은 그 자체가 사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보편적 악에, 무한한 악에 못 빠져나오는 그 형편이 바로 하루하루 일상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인간들은 빠져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두로에 대해서 두로와 시돈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마태복음 11장 21절 22절에 보면 나옵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스라엘 본토 사람아. 옛날에 선지자들이 망하기로 예언되었던 두로와 시돈보다 너희가 더 악해. 왜? 보편적인 악이 덮혀 있으니까.”

그러면 성도의 할 일은 뭐냐? 성도의 할 일은 이미 전체 계시를 알고 있기 때문에 뭐하면 되는가? 치고 빠져 나오는거에요. 악을 점검하고 빨리 빠져나오면 되죠. 그들과 시합하고 대결하고 투쟁하고 승자가 되려고 하지 마시고 원래 이 세상에 더 이상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닌 것 처럼이 아니라 아닌 사람이죠.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이기에 악의 점검자. 악의 검침원. “가스 검침 왔는데요.” 이런 것 있잖아요.

누구를 만나든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몇 년을 더 살든 간에 하루하루를 그 무한한 악을 알고 있는 점검자로서 유한한 악들을 접촉하면서 빠져나오세요. 이게 바로 성도 자체가 경고입니다. 스가랴에요. 선지자에요. 이 세상은 이렇게 먹음직도 보암직도 거기에 미쳐서 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경고를 날리는 가스 점검원. 항상 점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에게는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데 그 자유가 뭔지 저희들 스가랴 통해 알았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아직도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주께 주신 즐거운 사명이 있기에 즐겁게 이 세상에 멸망하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심판의 행위의 즐거움을 저희들이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