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8:14-17 / 초인간

정인순 2024. 5. 2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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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간

 

이근호
2023년 12월 13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4-17

(8:1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8:15)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8:17)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공통적 견해입니다. 하지만 백성들 입장에서 이점이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만드신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지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무너짐마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포함된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범죄하지 않는 아담 사이에 뭔가가 있었습니다. 이 뭔가에 의해서 인간이 다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끼여있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 한 것이 끼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목하에 애굽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그 조건을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에는 축복 요건도 있지만 저주 요건도 있었습니다.

축복과 저주란 곧 낙원에 있는 두 나무의 효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현 인간 세계의 형편을 결정짓는 기준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모세 언약’, 혹은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노를 사서 망해버린 것도 이 율법에 근거해서 받은 조치입니다.

히브리서 8:8-9에 보면,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므로 흙이 됩니다. 즉 ‘인간→비 인간’이 된 겁니다. 더는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흙이 되는 이유는 모세 율법의 주입으로 보다 명확해졌습니다. 인간은 늙어 죽는 것은 단순히 기력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서 그러한 겁니다.

저주받는 이유는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속 진행하시는 계획에 의하면 이 모세 언약은 후에 주어지는 언약과 같이 않다고 하십니다. 이 새 언약에 의하면 ‘인간→비 인간(흙)→ 하나님의 아들(=초인간)’이 되는 겁니다. 즉 더는 ‘사람의 아들’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새언약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새 언약의 바탕은 유다지파입니다. 전체 이스라엘 지파가 아닙니다. 그 중에 선택된 지파인 유다지파입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시 78:67-68)

유다지파로부터 왕 하나의 전쟁으로 전체 백성이 사는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유다지파는 야곱의 축복에 의해서 사자짐승처럼 찢고 먹이감을 빼앗는 식으로 활동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 49:9)

이런 식으로 전쟁을 벌린 최초의 이스라엘왕이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자손에서 비로소 개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언약을 주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그런데 이 다윗 내부에 초(超)-다윗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시편 설교를 통해서 다윗과 초(超)-다윗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편 16에 나오는 내용이 그냥 보면 다윗 자신의 고백으로 보이지만 실은 다윗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5-27)

여기서 다윗과 초(超)-다윗의 결정적 차이점은 다윗의 무덤은 그대로이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토록 빈번한 전쟁을 치른 다윗은 실은 장차 초-다윗 되시는 주님이 치르는 전쟁을 미리 보여준 바가 됩니다. 모세 언약에 의해서 인간은 율법의 종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짐승 사자와 같은 찢는 식으로 저주와 죽음에 갇혀 있는 자기 백성을 강제로 끄집어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로 인하여 종이 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이는 곧 성도란 늘 주님에게 모든 것이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주님에게 빼앗기는 것을 예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십니다.(마 25:21)

그렇다면 주님에게 어떤 것을 빼앗겨야 성도가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0:2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즉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간주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악마의 권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악마를 상대로 예수님 홀로 이겼습니다. 따라서 주님만이 전쟁에서 전리품을 노획하듯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를 뽑아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8에서는 ‘사로잡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흙에 불과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수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집사님처럼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자기를 죽이는 자를 용서해 달라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가 예수님과 한 몸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우리의 과거가 실은 주님의 과거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수요설교요약(20231213) 스가랴 8:14-17(초인간)

어제 수요 설교에 여러 가지 난제들이 가로 놓여 있어요. 왜 이스라엘을 다 구원하지 않는가? 왜 특별히 유다 지파에 초점을 맞추는가? 그게 야곱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장래 일에 대해서 예언하고 축복하는 게 창세기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유다 지파에 대해서는 좀 특이해요. 라이언(lion) 있잖아요, 짐승. 짐승처럼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건 전쟁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보통 우리가 말하는 축복이라 하는 것은 다 된 것을 누리는 것을 축복이라 하지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을 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축복 가운데 보게 되면 유다는 끊임없이 뭔가 계속 진행 중이고, 활동 중이에요. 그것도 싸움을 벌여요. 싸움을 벌이는데 당할 자가 없이 싸운다는 겁니다. 당할 자가 없이.. 그러면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유다는 도대체 누구하고 싸우느냐? 유다가 누구하고 싸우느냐? 도대체 무엇이 유다를 화나게 만들었는가?

그런 것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북이스라엘 열 지파는 솔로몬에 반대해서 뛰쳐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솔로몬을 왜 반대했는가? 솔로몬에게는 다윗과 직접 연계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확정을 받은 게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어야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인간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자격도 권한도 또 그걸 넘봐서도 안 되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그냥 조용히 사람의 아들로 살아도 충분한데 하나님께는 그걸 용납을 안 해요. 그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사람으로 났으면 평범하게 그저 “나 보통사람입니다.” 하던 노태우처럼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고, 살림이나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아들 돼!” 아들 되라는 거예요. 감당하겠어요? 너무 넘치는 기능을 강제로 부여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조건이 있어요. 싸워야 된다는 겁니다.

아들이 되는 조건은 누군가와 싸워야한다는 거예요. 싸우지 않는 아들은 아들이 아니에요. 이 말은 전쟁이 없고, 싸움이 없으면 아들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면 누구와 싸우는가? 바로 인간의 아들들 하고 싸우는 거예요. 이게 특이성이죠. 인간이면서도 인간과 싸워야 되는 거예요. 누가? 유다가. 그러면 그걸 유다지파에게 줬는데 유다지파 누구한테 언약을 줬느냐 하면 다윗이라는 개인에게 언약을 줘요.

그래서 히브리서 8장에 보면 내가 다윗에게 준 언약은 너희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받은 언약 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파악해야 돼요. 어떤 점에서 다른지.. 왜 언약을 주시는 분은 한 분인데, 왜 다른 언약을 제공하시는지 이유를 알아야 돼요. 다른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 되는 어떤 특정 인물, 우리 말고 특정한 인물이 아들이 되는 그러한 언약을 준 거예요. 그런데 그 언약을 누구에게 줬는가? 다윗에게 주셨어요.

다윗은 그 당시 이스라엘 왕입니다. 이 말은 왕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들의 역할은 싸우는 거예요. 다윗이 제대로 싸우게 되면 그 혜택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하나님의 혜택, 선물이 주어지고, 다윗이 제대로 못 싸우게 되면 이스라엘은 다 망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은 제대로 싸웠을까요, 못 싸웠을까요? 못 싸웠어요. 다윗은 누구에게 졌는가? 본인에게 졌어요. 본인, 인간의 아들에게 졌어요.

졌는데, 인간의 아들에게 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어요. 내가 나한테 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드디어 마련된 거예요. 거기서 이제 로켓트 발사만 남아있는 거예요. 이것을 다윗이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한 거예요. 죄밖에 지을 수밖에 없는 것에서 뭐가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거기서 나온 아들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솔로몬이 아들이냐? 여기서 솔로몬은 다윗에게서 못 빠져 나와요. 왜냐하면, 솔로몬에게는 솔로몬 언약이 없어요. 솔로몬이 되든, 후대에 어떤 왕이 되든, 르호보암이든, 여로보암이든 다윗의 언약의 적용을 받으면 다윗에게 일어나는 일,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고집은 그대로 살아있고, 인간의 아들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원칙은 그대로 살아있고, 둘 다 살아있거든요.

거기서 베드로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시편에서 다윗이 이야기한 것을 끄집어 와요. 시편 16편.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 옆에 있어서 내가 가는 곳마다 승리하고 하나님이 오른편에서 나를 지켜준다. 이 사실을 다윗이 말했는데 , 이게 육신의 다윗이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다윗이냐? 라고 물으면서 그것은 다윗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예언하기 위해서 다윗을 몸을 빌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육적인 다윗은 날아가야 되는가? 그 이유가 베드로가 말하는 본문에 보면 “다윗의 무덤은 그대로 있잖아.” 딱 하나예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도 딱 하나예요.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 진짜 하나님이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고 팩트, 사실 그대로예요. 죽었다가 살아나면, 이건 종교를 믿는 게 아니고 있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세상 천하가 욕을 해도 이건 포기를 못해요.

이게 하나의 종교 같으면, 이론 같으면, 하나의 교리 같으면 우리가 다른 교리로 바꾸면 되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그 분이 먼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윗의 몸속까지 들어가서 다윗의 인간적인 육신까지 떨어낸 거예요. 그것도 그냥 떨어낸 게 아니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떨어낸 거예요.

그러면, 초(超)인간이란 뭐냐? 바로 다윗의 이름을 빌려 쓴 초(超)다윗이 등장하는 거예요. 초다윗.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느냐? 그 분의 것을 선물로 받는 거예요. 다윗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성과를 선물로 받으며 되죠. 그런데 다윗은 뭐하는 사람이다? 싸웠던 사람이에요. 싸우는데, 전쟁할 때 직접 전쟁에 나가 승리한 자에게만 주는 게 아니고,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군인이나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민간인에게도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을 아무 차별 없이 나누어주는 겁니다.

그게 뭐가 되겠어요? PRESENT, 선물이 되겠죠.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주는 거예요. 성령을 주게 되면, 머리에서 지체를 만들어 나가요. 다 위에서, 머리에서 준 선물로 꽉 차 있는 것이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서 초인간이 되어버려요. 아담의 몸이 아니라 새로운 몸이 형성돼요. 개인적으로 초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초인간 속에 포함이 되어버려요. 안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그게 바로 스가랴에서 말한 은혜라는 거고요.

그래서 스가랴 본문에 보게 되면, 거짓말 했다는 말은 옛날 구약 때는 인간들에게 육신의 것이 남아있어 가지고 구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 편할 대로 자기 정당성 때문에 일방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했는데, 새 언약이 오게 되면, 새 언약의 이러한 성령의 선물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뿐만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법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 전쟁 그 어떤 것을 설명해도 전부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다 거짓말.

‘어떤 주식 사라 오른다’ 하는 것도 거짓말, 비트코인도 거짓말, 거짓말이야~ 전부다 거짓말 되는 거예요. 다 이루어졌는데 아직도 미완성에서 헤매고 있는 것. 그래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그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 거예요. 한 쪽은 종이 되는 거고, 한 쪽은 이미 아들 되게 만들어 버린 그 언약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 세상이 왜 거짓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특히 어제 예를 들면서 언급한 게 뭐냐 하면 달란트 비유 언급했죠.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된 종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거 주인한테 다 빼앗긴 거예요. 노동착취를 당한 겁니다. 제가 일했는데, 전부 누가 가져갔어요? 타국에 있다 온 주인이 다 가져갔어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것이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몰라요. 내 한 것이 다 주께 가니까.. 그래서 우리의 과거는 주님의 과거로 이미 다 바뀌어 버렸다. 왜? 주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게 어제 말씀 요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