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7:15-18 / 비유와 열매
비유와 열매
이근호
2024년 2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15-18
(17:15)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7: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7: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예레미야는 놀림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장차 메시야의 수난을 선지자가 미리 맛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적인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이 구약 성도들의 한계입니다. 구약 성도들도 하나님의 예언과 성취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취성에서 본인이 모형이요 비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도 덩달아 주체적 혜택자이고 싶어하는 겁니다. 즉 해석 중심에 자신의 주체성이 계속 살아남아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같은 오류는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변화산 영광성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좋습니다.”(마 17:4) 이랬던 베드로가 십자가 사건 현장에서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 26:74) 인간들은 세상이 자신의 주인공을 인정하는 줄로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때는 말씀이 인간(이스라엘 마음) 앞까지 오지만 신약이 되면 말씀이 인간 마음 내부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더는 주체적 입장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신약에서는 말씀의 주인공은 예수님 한분으로 귀결됩니다. 다른 자들은 예수님이 진정한 말씀 완성자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보조적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사적인 복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개인의 보복으로 짜여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본인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인데 하나님을 향해 나를 위해 보복해 달라고요? 이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리어 다음과 같이 말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4-45)
이 말씀은 ‘원수인 자를 원수 아닌 자로 여겨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는 분명 원수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원수에게 보복하거나 미워할 권리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보복의식은 주님이 하시는 심판의지와 정면으로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분에 자신이 못이깁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인간의 매사의 일이 어떻게하면 보복을 성사시켜 내 자신의 마음이 시원해질까와 관련됩니다. 나의 화풀이를 대체할 것들을 찾아다니는 겁니다. 스포츠 같은 것이 대리 만족으로 사람들이 즐겨 찾게 됩니다. 선거도 또한 마찬가지고 사업이나 목회하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원함이 제 때에 보복됨으로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정당한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세가 로마서 12: 19에 위배되는 태도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개인적인 심판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보복이나 심판은 말씀 완성의 요소로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의로움은 인간 개인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자기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엄정하고 빈틈없는 보복과 심판을 해나가시는 겁니다. 자기 사람들의 동행을 통해서 그 당시, 그 시절의 사람들의 의식의 한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열왕기하 1:6에 보면, “저희가 고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알세붑’이라는 것은 실제로 실체가 없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신에게 빌고 물어보는 일들을 해온 겁니다. 따라서 그 당시 여호와께서는 이런 가짜 신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병이 나면 병원에 가지말로 여호와에게 기도하는 식으로 고침을 받아야 하나요?
동행이라는 말은 인간 의식의 한계를 하나님께서 동행해서 끝까지 밝혀주시겠다는 의도 속에서 진행됩니다. 신약에 와서 비로소 완전히 인간은 그저 예수님을 드러내는 비유에 해당됨을 압니다. 사적인 복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성도는 주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내가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성도로는 열매로서만 존재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열매란 말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울철 유리창에 맺히는 성애라고나 할까요? 그 어떤 경우에도 열매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혹은 소나무 줄기에 맺히는 송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주님과 동행하지 아니하면 나올 수 없는 것이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야말로 성도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진정한 예수님의 보복과 복수의 열매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성도 자체가 주님의 긍휼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위하여 예수님은 날마다 악마의 정수리를 깨던 그 말씀으로 성도의 정수리를 깹니다.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 68:21)
그래서 성령님은 오로지 성령님, 곧 예수님의 열매로만 성도됨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적인 복수심에 불타서 세상을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2강-예레미야 17장 15~18절(비유와 열매)2402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찌어다 하나이다,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예레미야가 상당히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것은 ‘너는 우리에게 욕을 하고 있다’라는 이런 편견과 오해가 예레미야에게 돌아왔을 때, 예레미야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소망을 감출 수가 없어서 여기에 그대로 본심을 나타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나를 대신해서 복수해 주시옵소서’라는 그런 내용이죠.
‘나에게 대드는 인간 영원토록 멸망하게 하소서’라는 식으로 하는 거죠. 여기서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예레미야에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게 달성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것만큼 확실한 보복은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20절에 보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하나님의 원수가 원수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원수가 원수 맞는데,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산상설교에서도 이방인과 성도의 차이점은 이방인은 원수에게 보복하지만, 성도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한다고 되어있어요. 여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아, 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쉽게 이해됩니다. 예수님만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원수를 다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원수 중에서 사랑하는 자를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자가 하나님의 원수예요.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어요. 원수 되었는데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오니까 우리가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원수 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가 원수 맞습니다. 원수 맞는데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사, 불쌍히 여기사, 사랑해주니까 졸지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만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주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그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해석이 어떻게 되어있느냐 하면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성도 되었으니까 원수를 사랑해야지’라고 해석하게 되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에요. 왜냐 하면 성도는 혼자 살아가는 자가 아니에요. ‘하나님 제가 성도 되었으니까 제가 알아서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이게 성도가 아니에요.
빌립보서 1장에도 그런 말씀 나옵니다만,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광주강의에서 제가 이 부분을 언급했어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신 이가 내 안에 있으니 더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으니까, 나의 원수라는 자체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 때, 보복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지 마세요. 이 세상은 나의 보복 용도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보복을 못 해서 환장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가요? 분노가 사라지질 않아요. 그걸 세상에서 노골적으로 표하다가는 자기가 당하니까, 꾹꾹 참고 있지요.
하지만 스포츠를 통해서 그것이 계속 배설되는 겁니다. ‘죽여라. 탁구로 중국 죽여라’라는 식으로. ‘이강인 그 못된 거, 어디 까불고 있어’라는 이런 거. 이 세상 자체가 보복이 없으면, 누가 나 대신 보복하지 않으면, 사람은 살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총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복수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할걸요. 교회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은 자기의 원한을 갚아주는 쪽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충동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사적인 복수는 주께서 안 해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수, 주님의 다 이루었다, 주님의 처벌과 모든 심판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언약을 통해서 예레미야 속에 들어서게 되면, 예레미야는 비로소 내가 사는 것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이 실감 날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심판과 보복을 은근히 노리는 것을 주께서 안 받아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걸 만약에 받아주게 되면, 이 세상은 주님의 세계가 아니고 인간들 세계가 되는 거예요. 마귀들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어서 완성이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마귀의 정수리를 치는 것으로 이미 모든 것은 완료가 되었습니다. 마귀의 정수리를 친다는 말은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시편 68편 21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이게 정수리를 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에게는 정수리를 안 치느냐. 성도에게는 말씀으로 정수리를 늘 쳐버리죠. 말씀이 성도 자체를 다루면서 ‘사적인 복수를 위해서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야. 너 투표 누구에게 할 건지 묻는 것도 복수심이잖아’라고 항상 꾸짖으며 책망하는 거, 이게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를 책망하는 거예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과 상관있습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오는 질문은, ‘그러면 우리는 뭐냐?’라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이고 은유입니다. 우리 자체가 성경 말씀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활용하는 거예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어떤 결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대들고 까불던 자가 멸망하는 그런 어떤 열매를 예레미야는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라고 할 때, 여기서 “재앙의 날”을 예레미야 본인이 고대하고 있습니다. ‘거봐. 나 건드리면 너희들 맞는다고 했지? 봐. 말씀대로 되었잖아’라는 것을 은근히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런 처지에 있어요.
예레미야는 히브리서 말씀에 입각하면 예레미야는 하나의 비유이고 자신은 그림자이고 모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어요. 나중에는 알겠지요. 선지자니까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 알지요. 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잘못되었는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그림자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실체가 뒤에 나온다고 했어요.
비유가 먼저 나오고, 이런 비유와 은유, 그러니까 모형이라고 보면 됩니다. 모형 그림자가 자기가 비유나 은유인지 모르고, 이게 진짜인 줄 알고, 오해하면서, 오해하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어디로 나아가는가. 진짜 실체,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에 관해서 한 이야기라는 거, 뭔가 인간에 들어왔는데 뚫고 지나가고 결코 인간 위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 개인 인간을 위한 심판은 일체 주께서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 이런 사실이 신약에 와서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해코지했던 이런 인간을 크게 당해보라는 식의 결과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게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는 창세기 5장 21~22절에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그 원리에 대해서 언급했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여기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리고 창세기 6장 8절에도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되어있는데, 은혜가 뭐냐 하면, 바로 9절에 나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했다. 제가 은유라고 했습니다. 제가 비유라고 했습니다. 비유와 은유가 뭐냐 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벌이신 일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 일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사용한 것이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시대에 실체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난 오후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엘리야가 제단을 쌓았을 때, 남들 보기에는 그냥 소 한 마리가 올라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비유니까, 짐승은 비유니까, 실체 대신 모형이고 비유로 올려놓은 것이 송아지이고, 엘리야 본인 자신이 그거예요. 여러분 좀 어렵습니까? 어려워도 할 수 없고요, 계속 나갑니다. 열왕기하 1장 3절과 6절에 보면 바벨론의 우상인 신이 나옵니다.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럴 때, 엘리야 선지자가 지금 놀리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라고 하니까 그 뒤에 3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설명이 어렵지만 제 나름대로 쉽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 바알세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이런 신이 없어요. 인간의 머리, 아이디어에서 나왔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약 수준에 입각해서 그들은 모두 다 모형이고 그림자이니까 하나님을 섬겨야 할 북이스라엘의 그 왕이 병이 났을 때 고치려고 바벨론 신인 에글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갔으니까 엘리야 너가 가서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질 하라는 거예요. 이게 비유가 아니고 실체라면 오늘날 성도들은 치과나 한의원이나 내과나 허병원 같은 곳을 가면 안 됩니다.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죠.
성경해석이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병난 자기가 병이 들린 것이 아니에요. 허상인 내가 허상인 병에 들린 거예요. 왜? 신약이 되면 인간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무슨 병에 들립니까. 죽은 자가 어떻게 이가 아파요. 신약에서는 이미 실체가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는 전부 다 비유입니다.
그래서 마르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잖아요. 오빠가 산 것이 아니고 오빠 옆에 누가 있다?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거,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마르다, 마리아에게 오빠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오빠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역가왕에서 자기가 밀어주는 가수 1등 되냐, 안 되냐, 관심이 많잖아요. 전유진이 되냐, 안 되냐 하면서.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진짜로 내가 살아있다고 우기고, 내가 나름 복수하는 거예요. ‘전유진이 말고 다른 사람 되기만 해봐라. 조선티비에 내가 욕할 거야’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직도 우리는 구약의 틀을 못 벗어난 거예요. 왜 우리가 병원에 가야 하느냐.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또 합니다. 가는 이유가 내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병원에 가서 보약을 먹어야 하는 거예요.
아픈 것이 나았다고 이게 산 것이 아니고, 안 아픈 채로 죽음을 그냥 운반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을 교인들이 보면서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는 거예요.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라는 이 대목이 나오니까 교인들이 ‘목사님, 그러면 저도 예수 믿으면 불수레 타고 올라갑니까?’라고 묻죠. 뭐 결혼식 할 것도 아니고.
그 불수레를 왜 타야 합니까? 엘리야도 이렇게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불수레 타는데, 나도 좀 타고 싶습니다. 그런 걸 타고 싶으면 저기 에버랜드나 롯데월드에 가면 많이 타요. 좀 어지럽지만. 신약 성경에 십자가로 해석을 하는 것이 하나도 안 되어있기 때문에, 구약에 좀 멋있어 보이는 것이 나오면 자기도 흉내 내고 싶은 거예요.
심지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 죽여서 살아났으니까 자기도 죽여서 자기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우기는 사람도 나올 판이지만. 지는 나름대로 그것도 용기라고 하죠. 성경해석이 매 순간 이런 식입니다. 마귀의 정수리를 쳤을 때, 나 중심으로 성경해석 하는 것도 매일 같이 말씀으로 정수리를 쳐버려요. 성경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지 너에 관한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의 허상이다. 그림자이고 허상이고 모형이고 비유인 거예요. 살아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뭐 다른 꿍꿍이를 자꾸 노립니까? 교회 왔으니까 이 정도 보상과 이 정도 이익은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셨어요. ‘열매’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열매가 맺히는 그 열매라고 했어요. 내 열매 말고 주님의 가지에 맺히는 열매로써의 우리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열매라고 했으니까 제 나름대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성도는 말씀의 성에 낌, 또는 송진, 예수님의 눈물의 결정체, 또는 주님의 젖과 꿀, 아까 요한복음에서 나온 것처럼 주님의 포도송이.
열매니까 본체가 따로 있는 거예요. 주님의 성령이, 주의 성령이 함께 하니까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그 열매는 열매가 열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열매예요. 성경 신약에 열매 맺으라고 하니까 또 본인이 열매 맺힌다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같은 되지도 않는 것을 자꾸 하시는데, 제가 광주강의 하면서 강의하는 도중에 제가 큰 은혜받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가스펠송 ‘사랑’이라는 노래를 틀어줄 때, 제가 너무 큰 은혜를 받았어요. 왜냐 하면 그 가사가 이러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라고 그게 노래 가사에 나와요. 최안순씨가 불렀던 노래 가사에 나와요. 그런데 그걸 누가 지킵니까?
열매라니까요. 나의 열매가 아니고 은사예요. 주님이 나의 정수리를 말씀으로 때리고 나온 열매예요. ‘이 귀신아’라고 오늘도 박살 내고 나오는. 왜 자꾸 성경 말씀을 네 중심으로 보느냐는 겁니다. 네 중심으로. 이럴 땐 우리가 말씀 앞에서 용기가 필요해요. 광주강의에서 어떤 집사님이 용기 있는 이야기를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그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 했어요.
이건 녹음되지 않고 강의 전에 이야기했던 거예요. ‘내가 너무 불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불길해. 내가 90세까지 살 것 같아. 너무 불길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강원도 양양에 사는 자식에게 전화해서 ‘야, 나 집 내놨다. 너 사는 쪽으로 쳐들어간다. 네가 살 집 마련해라. 같이 살든지 나 혼자 살 집을 구해주든지 해라’ 제가 그 이야기 듣고 정말 감동먹었습니다.
자신의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터뜨린다는 것이, 이게 주님이 성령으로 정수리를 쳐버리니까, 꿍꿍이 안에 아닌 척하다가 도저히 참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너희들 함평까지 오는데 차로 6시간이나 걸리잖아. 내가 올라갈게. 너희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벌써 집 내놨어. 내가 무조건 쳐들어간다. 너희한테. 내가 살 집 준비해라’라는 이런 용기를 본받으시길 바랍니다.
아직까지 불길할 나이가 안 되었으니 그럴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 용기를 좀 본받으시길 바랍니다. 꿍꿍이 안에 담아놓고, ‘아이들이 안 해주나’라는 식으로 음흉하게 굴지 말고,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 악령의 역사입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해요. 있는 그대로. 그래서 제가 너무 감동받아서 제가 집사님께 격려차 이야기했지요. 격려차인지 초를 친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요새 일본 집값이 천만 원 합니다. 왜냐 하면 집을 놔두고 관리를 안 하면 일본 정부에서 벌금을 매기게 되어있어요. 집은 안 팔리고 벌금은 내기 싫고 하니까 1000엔(일본의 화폐 단위)에 내놓습니다. 물론 그래도 안 팔려요. 그 집사님 지금 그 촌집을 반의 반 값해도 안 팔립니다. 그냥 별장이라 생각해야지, 그거 한 일 억해도 천만 원에도 안 팔립니다.
사람이 살아야 집을 사지, 지방에 지금 인구가 소멸하고 있는데 누가 살아요. 돈 천만 원 해도 곧 안 팔릴 시대가 곧 옵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격려인지 불길함을 더 추가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 마귀의 세계는, 우리도 마찬가지고, 계속해서 자기를 감추고, 위장하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는 낙원은 오지 않습니다. 안 와야 해요. 왜? 동행하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 이게 바로 그 어느 곳도 천국이고 낙원이에요.
주님이 동행이 안 되니까 사람들은 자꾸 위장하는데 어떻게 위장하느냐면, 혼자서 살려고 하니 너무 힘드니까 자꾸 위장하고 조작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으니까 그게 더 힘들어요. 남 원수 갚기를 원하면서 ‘저 사람 죽어야 해’라고 하는데, 그런 거 하지 말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팀이 지고, 내가 원하는 쪽이 안 되고, 이렇게 내가 주님에게 작살나야 해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으니까.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게 있어요. 회사에서 직장 상사가 부하 여직원에게 막 욕을 해요. ‘너에게 주는 월급이 아깝다. 월급 받을 만큼 해야 월급을 주지. 열심히 해야 할 것 아니야. 나 때는 말이야, 선배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어’라고 하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은 여자 주인공이 삼성 이어폰에서 나오는 귀에 끼고 있는 이어폰을 톡톡 건드리니까 이병헌 보이스로 바뀌어요. 달콤한 허니 보이스로. ‘너에게 주는~~월급이~~~너무 ~~~아까워~~’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이 세상이 이병헌같은 미남자가 다스리는 세상 같아요. 그래서 그 여직원이 아무것도 모르고 화내고 있는 직장 상사가 잔소리 다 끝나고 나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저 과장님, 지랄 한 번 더 해주시면 안 돼요’ 컴퓨터 고친다는 소리, 세탁기 고친다는 소리도 모든 게 너무 살기 좋은 세상, 환상으로 환타지로 꾸미는 세상, 이것은 자기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도 이런 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신약에 오면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이병헌 허니 보이스로 그렇게 말하던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라고 했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남들 지적하고 욕하기보다도 날마다 주님이 ‘너는 이미 죽었어. 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야’라는 걸 깨우쳐 주는 이러한 보이스, 이병헌 보이스가 아닌 주님의 보이스로 늘 우리를 깨우쳐 주는 그런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의 원한을 보복하지 않는지를 얼마나 속으로 주님에게 원망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의 본모습인 것을 들추어주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 뜻대로 마시고 주의 다 이루신 뜻대로만 우리에게 열매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