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2:7-13 / 약속이 떠난 땅
약속이 떠난 땅
이근호
2023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2:7-13
(12: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12:8)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고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다
(12:9)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12:11) 그들이 이를 황무케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무함은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
(12:12)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무릇 혈육 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도다
(12: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
살기 힘들게 된 땅이 결코 ‘나를 위한 땅’이 아니라 ‘약속’을 위한 땅입니다. 약속의 효과로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에서 사는 방식은 자신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12명 정탐꾼들이 땅을 정탐하고 난 뒤, 그들 손에는 엄청난 크기의 포도송이를 들고 오게 됩니다.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민 13:23) 따라서 사람들은 다음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은 누가 들어와서 농업이 잘되게 되어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ㄷ조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즉 농사가 잘되었다고 해서 죄를 안 짓게 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농사가 잘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서 나왔다면 이는 인간이 원래부터 죄가 아니라 게으르게 될 경우에는 소산물을 얻지 못한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반대하십니다. 농사가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은혜가 철거해가면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서 살기 힘든다는 겁니다.
땅이 애초부터 품고 있는 저주성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서면서 밝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땅은 ‘약속의 땅’이 되는데 이 ‘약속의 땅’은 ‘약속의 백성’이 나타나야 성립하는 겁니다. 땅의 진위, 땅의 내막은 약속의 백성의 등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집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삼하 22:16) 땅의 기초가 드러나는 것과 하나님의 꾸지람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꾸지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실시됩니다. 즉 도대체 땅은 왜 애초에 저주받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 땅의 성격에 대해서 필히 저주가 주어지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집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
19)
즉 저주가 답이며 다른 답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약속의 땅’이 아닌 그냥 ‘땅’이었을 때도 넉넉한 소산물을 땅이 제공한 겁니까? 그것은 노아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적절한 햇빛과 공기를 주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1-22)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알려지고 소개되는 홍수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시들해지고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즉 주변의 이방나라의 잘사는 것이 부럽고 그들이 그렇게 잘 사는 것은 다 자신들이 돈이 벌기위해 분투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빼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땅의 저주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철수하고 저주스러운 땅의 기초가 노골화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합 3:6)
이러한 저주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성도는 어떤 자세로 임합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즉 땅에서 나오는 그 어떤 소산물이 일체 없다하지라도 나는 도리어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땅에서 나오는 것 말고 또 나올 게 있단 말입니끼? 모든 율법과 언약의 결과물이 땅의 소산물로 보여주던 시절은 이제 지나가 버렸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5000명이나 군중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3-
35)
곧 이 지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이 결코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영생의 말씀만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 어떻게 영생의 말씀과 지옥의 말씀을 구분할까요? 이 일을 위해 등장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즉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일으키는 기적은 모두 다 이 지상의 것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이 땅의 형편은 땅을 파괴하는 천사들에게 일임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환경 오염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계 6:3-8)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이미 모든 의미가 종결된 십자가 사건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않은 채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같이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버림받은 땅에서 살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3강-예레미야 12장 7~13절(약속 떠난 땅)2310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7~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고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그들이 이를 황무케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무함은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무릇 혈육 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도다,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
이 땅은 특수한 땅입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 땅입니다. 그 땅에 살던 토착민들이 있었죠. 그들은 그곳을 대대로 살았던 땅으로 여기지, 약속의 땅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오기 전에 가나안 땅에 열 족속이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농사지으며 그 땅에서 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거두는 것은 자신의 노고에 대한 결실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고 보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기 전에 정탐꾼을 보낸 적이 있는데, 열두 명을 보냈어요. 똑같은 것을 보았어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포도가 얼마나 큰지, 요즘 나오는 샤인머스켓 포도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이 들고 오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습니다.
그 원주민들은, 그러니까 지금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그것이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자신의 노고로 인하여 마땅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기시켰다가 공격하게 했는데, 공격 시점이 뭐냐 하면 그들의 죄가 관영 할 때까지, 죄가 무르익을 때까지 계속해서 군사들을 키웠어요.
어디에서? 애굽에서. 누가? 하나님이. 누구를?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었으니 히브리인들을 이스라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 탱크죠.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무기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고, 전쟁에는 반드시 적이 있지요. 그 적이 누구냐? 자기가 노동해서, 애써서, 결실을 맺었다고 여겼던, 다시 말해서 이건 약속이 아니고 내 노력의 결과로 여기는 것을 적으로 간주하십니다.
모세를 앞장세워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이 접수하면서, 비로소 모세는 과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옛날에 홍수가 있었던 적이 있었고 그 홍수 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는데, 그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킨다는 조건 하에 복을 받는 사람들을 내가 만들어내겠고,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에 의해서, 약속이 스스로 구현된, 드러난, 나타난 현상으로써 본인과 결실 물을 지니고 있는 자들의 등장, 약속된 백성의 등장, 그것을 약속의 구현체라고 볼 수가 있죠. 그때까지 죄는 무르익어야 하고, 관영 해야 하고,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은 약속의 민족 이스라엘로 교체해서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구약 이야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야 하는데, 그 약속의 땅이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약속된 민족이 소실되어서 그래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답지 못 해서 이런 현상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스라엘 답지 못 하게 되었는가.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가. 이것은 내 노력으로 내가 산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생각으로 안일하게 약속의 땅에 버젓이 살고 있었던 거예요.
이점은 하박국에 나오는 말씀과 비교하면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라고 나오죠. 도대체 몇 가지가 없는 겁니까. 무화과나무 없지요. 포도나무 열매 없지요. 감람나무 소출 없지요. 밭에 식물이 없지요. 우리에 양이 없지요. 외양간에 소가 없지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땅이 그 기초를 드러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박국 3장 13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이 기초는 땅에 속한 인간이 땅에서 힘들여서 살아야 산다고 여겼던 아담에게 내린 그 저주, 그 저주의 후손들입니다.
굳이 이걸 찾아보면 창세기 3장 17~19절에 나오지요.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이게 인간의 저주받은 땅과 더불어 사는 저주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면 저주받은 인간 말고 뭐 다른 인간 있느냐. 없습니다. 모든 아담의 자손은 땅에서 산다는 자체가 저주예요. 땅에서 산다는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약속을 통해서 안 것은 뭐냐. 그 땅의 기초, 땅의 기반에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런 것이 지금 성경을 보더라도 좀 난해합니다. 성경에 있기는 있어요.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이 성신을 받고 예언한 대목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땅의 기초가 나타나는 거예요. 땅의 기초가 나타난다는 말은 땅이 저주받는데, 왜? 왜 저주받는지. ‘사람이 살다가 힘들면 땀이 나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땀이 그렇게 나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나이 들면 아프지’ 아닙니다. 나이 들어도 아프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픈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나이 들면 머리가 희어지고’ 아니요. 희어지면 안 됩니다. 새카매야 해요. ‘독사가 무섭지’ 아니요. 독사는 독이 없어야 해요. 아이가 독사와 같이 평안하게 즐겨야 합니다. 같이 놀아야 해요. 그래서 저는 이걸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느냐면 ‘이게 억지다’ 인간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억지로 살고 있습니다.
억지로 살고 있는데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인간이 살면서 쇼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코미디고 쇼예요. 쇼란 말이 뭐냐 하면 진실된 것은 없어요. 땅의 기초를 모르니까, 왜 저주받는 이유를 모르니까 쇼가 되는 거예요. 이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옆에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어요. 저 사람도 쇼하고, 나도 쇼하고, 지도 코미디하고 나도 코미디하고, 전부 다 웃기는 짓이에요.
죽는 이유, 사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철학이고, 신학이고, 과학이고, 아무도 몰라요. 왜냐 하면 약속은 숨어있기 때문에. 나타나더라도 계속 거기에 숨어있는 식으로 나타나거든요. 그게 어디서 뻥! 하고 다 뚫리느냐 하면 신약에 와서 다 뚫립니다. 구약 때까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황무지가 된 거예요.
황무지가 되었다는 말은 원래부터 창세기 3장에 입각해서 황무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살았던 약속의 땅은 왜 젖과 꿀이 흘렀는가. 이제 그 쇼가 끝났죠. 마감되었어요. 서서히 이스라엘 망하면서, 약속의 땅 사라지면서, 땅도 그동안 젖과 꿀이 흘렀던 것은, 그들이 노력을 적게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서서히 끝난 시점에, 하나님이 후원하던 후원금이 다 끊어진 거예요.
너희 나라 다 끝났다. 이제 너희들 이스라엘 아니잖아. 언제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이나 있었어? 없잖아. 그러니까 나는 철수할게. 너희들이 철수한 뒤끝을 한번 봐라. 황무지 될 거야. 황무하게 될 거야. 적들이 와서 너희들 짓밟을 거야. 너희들이 농사를 지은 것들 다 폐허가 될 거야. 그런데 아까 봤던 하박국은 뭡니까? 없지요.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돈이 없고’ 그냥 돈이 없는 거예요. 돈은 양식입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말했지만, 돈은 양식입니다. 돈 없다는 말은 양식 떨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떡을 무한정으로 주니까 그분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왜? 양식이 그쪽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임금 삼으면 계속 양식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은 “그 양식이 그 양식이 아니야. 너희는 만나를 먹어도 죽었잖아. 그런데 내가 주는 만나는 안 죽어. 아니, 안 죽어야 해. 안 죽는 거야”
너희들은 땅만 쳐다보고 살아가고, 거기서 너희들이 만나같이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떡, 이것으로 연명하려는 그런 자세 자체가 이미 시효가 끝났다. 그런 육신을 하나님께서는 백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어떤 변화냐 하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이 땅에서 잘 살아야지’라는 것은 약속과 전혀 상관없는 의식이고 사고방식입니다.
땅은 이제 그 뿌리,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앞으로 갈수록 더 노출할 겁니다.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가만히 두지 않고 땅을 휘젓고 다니면서,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덮여 있던 은혜를 거둬내니까 땅에 온갖 저주가 나옵니다. 네 마리의 말, 생물이죠, 천사가 등장하면서 거기 보면, 전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모든 사는 것에 결핍이 생깁니다.
그다음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사망인데 검과, 검(劍)은 전쟁이죠, 흉년과 사망과 기근, 전염병 문제, 이렇게 이 땅을 저주로 가득 찬 땅으로 들춰내는 거예요. 인간들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이 땅을 왜 하나님께서는 작살을 내시는가.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여러분이 알다시피, 하늘나라라는 다른 영토를 따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여기 있는 백성들을 거기로 빼돌립니다.
빼돌려서 구약에 약속한 약속이 약속답게 완전히 다 성취된 그 나라로 이전을 해요. 이사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 나도 가고 싶어. 가고 싶어’라고 하잖아요. 가고 싶은 것은 좋은데, 가고 싶으면 뭘 들어야 하느냐면 외계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외계어가 뭐냐 하면 복음이라는 외계어입니다. 지금도 전해도 이게 외계어가 되어서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성경 말씀을 풀이해 줘도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이 자기 경전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전을 달달 외워도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안 받아들입니다. 이상하죠. 그들은 문자로 구약을 달달 외운다는 거예요. 창세기 1장부터, 어떤 사람은 많이 외운 사람이 있고, 적게 외운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이 시편을 많이 알아요.
엄청나게 외웠어요. 절기도 다 지키고. 초막절 절기 지키고, 끝난 직후 안식일에 하마스가 공격했잖아요. 10월 7일. 그때가 초막절 끝날이에요. 종교행사를 한 겁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그 가나안땅을 고집합니다. 왜? 땅이 없이는 못 사니까. 그게 인간의 한계거든요. 성경을 볼 때, 성경은 성령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보지 아니하면 해석이 불가한 책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겠죠. ‘나는 성령으로 해석해서 그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라고 할 거잖아요. 성령으로 해석하려면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십자가 속으로 데려갔다가 푹 담갔다가 십자가 피를 묻혀서 나오게 하는 해석이에요. 성경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 그리고 자기 인생도 그런 식으로 새롭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해석하게 되면. 그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번 수련회 때 했는데, 외계어지만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어서 제가 마음껏 이야기합니다.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이런 말씀. 잉태한 적이 없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낳은 자식에게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조건을 다신 겁니다. 남편 없이 태어난 자, 그렇게 잉태된 자에게만 나는 그들과 함께 ‘임마누엘’, 함께 있고, 그 외에는 함께 있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 때 주셨던 그 율법의 해석이, 한번은 한 번은 인간에 대한 모든 저주를 선포하고, 그리고 그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패를 수단으로 해서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실패하게 하시는 그걸 수단으로, 우리 안에 주인공이 같이 계시다는 것을 들춰냅니다. 그렇게 되면 땅이라는 지평선, 너머에 있는 세계까지 볼 수가 있어요. 땅은 실패한 거니까, 이 땅을 하나님께서 처치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실패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실패하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귀한 선생님들이 많아요. 그 선생님들을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거짓 선지자’ 또는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이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가 뭐를 주장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붙들고 있어야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고, 복 받은 것이라고 교회마다 가르치고 있어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까 제가 말한 약속과 정반대죠. 우리가 살아온 것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치와 의미를 놓치지 말라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받을 거고, 여러분의 헌금한 거 복 받을 거고, 여러분의 선교, 전도한 거, 목사 섬긴 거, 전부 다 그렇게 할 거예요. 하나님께 봉사한 거.
왜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유용하냐 하면 분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노동을 통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자와 ‘아니야, 아니야. 뭐든지 해야 결과가 주어져’라고 여기는 비약속과 분류를 하는 작업에서 비약속에 있는 자들은 꼭 비약속을 원하는 그러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찾아가게 되어있어요.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중요한 겁니다. 인간은 자기 관리를 하는 이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해 주는 곳만 찾아다니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이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교회를 찾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아, 은혜받았다’라고. 작살난 것이 아니고, 완전히 묵사발 된 것이 아니고, 은혜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의 교회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으냐를 생각해봤는데, 교회는 아기자기하게 노는 곳이고요, 그 안에서 서로 위로받고 위로해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박살 나는 곳이 아니에요. 자기의 뿌리가, 죄가 다 드러나는 곳이 아니라, ‘역시 나는 제대로 잘 살았다’라는 자기 정당성을 인정하고 위로해주는 그것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겁니다.
지금은 교회보다 다른 곳에서 위로를 많이 해주기 때문에, 그런 쇼를 벌이는 위로는 이미 가정에서 많이 들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미 ‘훌륭하다. 잘한다. 네 마음대로 해라’라는 것은 가정에서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굳이 교회까지 와서 그 위로를 받을 필요는 없죠. 그러니까 약속 안에서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하여튼 뭐가 없고, 없고, 없어도, 없어야 하는 것이 주의 정당성인데 우리는 있고, 있고, 있고를 여전히 노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함으로써.
젊은 사람들은 교회 와서 기도해도 응답 안 나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교회 안 나오고, 이제는 연세 지긋이 드신 분들은 교회 와서, 저 타락한 탕자같은 자식을 위해서 ‘주여, 주여~’ 하면서 새벽기도하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적은 뭐냐. 가정, 교회, 이 사회, 조직체, 단체, 그리고 세상 몽땅 다. 이것이 바로 약속의 적입니다.
자기를 계속 긍정해 주고,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는 조건으로만 사는 건데, 그 나라 의를 드러낸다는 조건으로만 살아야 하는데, 자기를 챙기려는 것이 여전하다면, 그건 약속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그동안 내가 나를 지켰으면 어쩔뻔했어’라는 안도감, ‘내가 나를 지키려고 살았으면 어쩔뻔했어’라고 안도합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건 지옥이거든요.
지옥은 봐주는 거 없이 때린 데 또 때리는 곳이 지옥입니다. 일체 반성같은 거 안 받아주고 영원토록 못 빠져나오면서 때린 데 또 때리고, 아픈 데 또 아프게 만드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다 미리 자기를 포기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맞아도 내가 참는다’라고 나오면 그건 자기 위로죠. 자기 긍정이고. 대표적으로 지옥 가는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이 말씀 앞에서 약속의 주인공은 오류 많고 실패하는 나를 통해서 주인공이 비로소 나온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고, 실패를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땅만 보고 살았습니다. 내 노력에 대가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아직도 땅에 미련 있고, 우리 자신에 미련 있었습니다. 그 나라 의는 관심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여, 성령께서 아예 포기하게 만들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