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4:6 / 심판의 영

정인순 2023. 10. 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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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영

 

이근
2023년 9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4:6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선지자는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스룹바벨이라는 존재는,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된 인물입니다. ‘성전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뜻은 전에 있던 성전은 이웃 나라의 불의함으로 불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해서 철거하고 철수시킨 것이었습니다.

즉 ‘성전이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인간들이 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처지에 있는가를 보이기 위한 모델이었던 겁니다. 그 대표자 입장에서 스룹바벨이 등장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통고를 받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이 들어야 될 내용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그리고 성신께서 인간과 대조가 되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인간에게 전달할 내용은 이러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을 저지하라”입니다. 스가랴가 들었던 이 예언은 결국 하나님의 신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분리작업은 곧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하겠다는 것이나 구원받겠다는 것은 모조리 성신이 하시는 일로 인하여 거부당합니다. 성신의 일을 간단히 말해서 “인간들이 주제 파악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전을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쳘폐시킨 이유를 알아라는 겁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나 힘이나 재능을 투입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단절’을 전제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주시는 분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참새를 왜 친히 기르시고, 들풀의 하찮은 꽃도 왜 굳이 입히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충분히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으로도 하나님 사랑하고 찬양하는 이유로 넉넉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의’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와 ‘입을 것, 마실 것, 먹을 것’을 염려하고 최종적으로 여기는 자들을 구별하고 계십니다.(마 6:32-33) 이 구별 경계선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투입시키신 겁니다.

마치 스룹바벨의 존재에 이런 메시야성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실패해야만 하고 심판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인간 존재를 등장시킬 때까지 성신(성령)의 활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4:29-30에 보면, “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받은 자’과 그렇지 않는 자를 구분짓는데 놀랍게 성령 안받은 자를 ‘육체에 속한 자’로 규정합니다. 즉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사는 자가 바로 천국에서 당연히 내어쫓김을 받는 대상자들이라는 겁니다. ‘육체에 속한 자’는 곧 모든 자들을 뜻합니다.

육체로 태어났기에 당연히 ‘육체에 속한 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들이요 성신으로부터 ‘∼ 아니요’라는 평을 받아야 될 자들이라는 겁니다. ‘육신에 속한 자’와 ‘성령의 속한 자’ 사이에 예수님께서 끼어들므로서 인간은 그 어떤 시도와 기대와 바람에도 ‘성령의 속한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분이십니다. 내어쫓김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아버지의 심판을 알려오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무효화 할 수 없듯이 그 어느 누구도 심판의 대상자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인생이 있어 가장 영광스럽고 소중한 순간은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접하게 되면 기존의 인간 만남이 모두 시시해지고 별 의미를 줄 수 없는 모임이 됩니다. 중간에 끼어드신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품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이 죽음의 상처를 제공합니다. 죄된 몸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앉게 되시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성령을 예수님의 역할이 필요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즉 ‘잃어버림을 당한 예수님의 자기 경험’이 성도들 모두의 경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비유’, ‘동전 찾기 비유’, ‘탕자 비유’가 그것입니다. 모두가 잃어버린 처지에 있으면서 그 처지를 마땅하게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엄성에 도취되어 자신의 정당함을 나열하고 고백하지만 바로 그 모습이 자신을 괴멸시키게 됩니다.

자신이 품고 있었던 그 천국에 대한 꿈은 여지없이 침노당해 망쳐져야 합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을 새롭게 얻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칭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그들은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리어 쫓겨나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마 8:11-12)

마태복음 21:28-31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개하시면서 순서를 바꾸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내부의 순서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마 19:26) 인생에 있어 성공이나 실패도 없고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죽여서 그 죽이시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나라와 의’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지 않으려는 옛 부대에 새 술이 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