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4:1-5 / 금촛대의 비밀

정인순 2023. 10. 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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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촛대의 비밀

 

이근호
2023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스가랴 4:1-5

(4: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4: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4: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4: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예상 못하게 선지자 스가랴에게 하늘의 계시가 덮쳐집니다. 일방적 계시의 급습에 선지자는 미리 대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계시의 내용은 그 시대를 사는 스가랴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앞으로의 세상 현실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정해진 장래 상황에 대해서 선지자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관심사가 된 겁니다. 그냥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천사에게 묻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이냐”고 하면서요. 이처럼 세상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성도로서는 영광된 일입니다.

문제는 이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서 세상에 알려야 될 책임이 선지자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스가랴 선지자의 질문을 도로 되돌려줍니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라고 말입니다. 선지자는 당연히 대꾸합니다. “이 계시의 내용을 제가 알 리가 없지요”라고 말입니다. 선지자가 질문을 되돌려주는 이유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내가 과연 이것들 속에 포함됩니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계시를 물을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촛대는 성소 안에 들어 있던 기구입니다. 성도 남쪽에 위치하면서 북쪽을 비추게 되어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테이블 위해 12개의 떡이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호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 공간이 ‘특이한 죽음의 공간’이라는 겁니다. 산 사람이 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분이 같이 죽은 자를 집단으로 보호하겠다는 시스템이 성전시스템입니다.

즉 성소(성전)은 ‘죽음의 공간’입니다. 이 ‘죽음의 공간’을 계속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드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접하고 그 죽음과 매일같이 대화하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즉 ‘본인이 태어나서 죽는다’가 아니라 ‘미리 독특하고 특이한 죽음’을 껴안는 데서 의미가 지니고 매일 살아가는 바가 됩니다.

구약 율법 초반 시기에는 금촛대는 그 자체로 금촛대의 의미는 마감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멸망되고 성전이 불타고 난 뒤에는 금촛대 배후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즉 왜 금촛대가 일곱 개의 가지를 지니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7’이란, 가리워진 원래의 자연의 배후가 따로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대자연은 7일만에 모두 다 만족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7를 걷어내면 거기에 유일한 분(1)이 등장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과 자연이 어떤 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이스라엘 성전 파괴로 알려집니다. 우선 인간들은 자연 배후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연을 이용해서 자기 삶을 도모하는데 급급합니다.

그 자연 안에서 인간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서 죽고 또 죽고 연쇄적으로 죽음 고리를 형상할 뿐입니다. 아무리 죽어도 그들은 본래적 위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12로 표현되는 그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을 대변해서 7이라는 숫자로 표현된 등잔대를 통해서 자연 배후가 알려집니다.

이스라엘 멸망후 레위인들은 일상처럼 행했던 성도 등잔대 관리를 더는 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스가랴에게 주신 계시에 의하면, 성도의 등잔대는 하늘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의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나란히 등잔대 최상위 위치를 나란히 갖추고 있는 그 잔에 더 위에 있는 사발에서 일곱 개의 관과 각자 연결되어 기름이 주어집니다.

사발 안의 그 기름은 양편에 포진된 두 올리브 나무(감람나무)의 진액에서 주어진 겁니다. 즉 12를 7이 보호하고, 7은 상위 7과 연결되어 관리되고 그 7은 2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그 2가 최종적일까요? 아닙니다. 그 2는 최종 1에 합류됩니다. 그 내용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감람나무’가 나옵니다. 이 순교자들의 예언은 하늘에서부터 인가받고 권위받은 예언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감람나무에 해당되는 자는 결국 순교하게 되는데 이들을 순교시켜 그 환경은 곧 소돔이요 애굽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리고 이 두 순교자는 예수님의 죽음에 합장하게 되는데 이는 곧 이 두 순교자로부터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 되어 흐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감람나무는 예수님의 대리자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신 두 단계의 절차가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오셔서 왕이 되신 절차 말입니다.

금등잔대 관리가 수평적인 인간 제사장들이 하던 것이 성전이 불타고 난 뒤에는 제사장이 그 할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황금처럼 고귀한 등잔대의 관리는 이제 위에서 합니다. 어떤 식으로 금촛대의 빛을 발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피가 계속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 기능과 왕기능을 두고 말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도는 ‘특이한 죽음의 공간’을 내부에 담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부가 외부로 박차고 나온 형국을 유지하면서 이 세상에서 삶을 이어갑니다. 속에 있는 특이한 죽음을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살아갑니다. 늘 위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피가 공급되는 자들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주님은 이 성도들, 즉 초대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촛대들 사이를 거니십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12-13)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통인 겁니다.(엡 1:22-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이동시키는 업무에 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