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2:6-13 / 다루시는 분

정인순 2023. 10. 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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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시는 분 

 

이근호
2023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스가랴 2:6-13

(2:6)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2:7)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2: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2: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2: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2: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와 관련된 생은 죽음으로 마감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자기를 생활을 계속 이어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기로부터 도출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가운데 나온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처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죽음은 없습니다. 그냥 다루십니다. 끝까지 다루십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본질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아버지에게로 가셔서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라지게 하시고 다시 불러모으는 방식의 대상자가 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영원한 소멸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흩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국가’라는 집체화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각 열방나라 속으로 다 흩어져 소멸해 버리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모이게 되지만 그들 이스라엘 이름으로 다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43:6-7에 보면,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즉 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나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이름’으로 모인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말씀과 그 말씀의 완성인 인격 사이에 갭gap(간격)이 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사라진 분으로서 비로소 주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셨다가 가신 절차와 다시 오신 그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생각지도 못한 이스라엘을 창조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사실은 왜 인간은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자기 안에 가두어둡니다. 외부에서 공격을 오든지 아니면 외부의 유혹을 받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자기를 꼭 안고, 모시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에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자식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합니다. “나는 이제 죽는다. 남은 재산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분배될 것이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단지 사라지는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다루어질 뿐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다루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자기를 위한 눈동자 같은 구역이 있습니다. 실은 뱀이 꽈리를 틀고 있는 구역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버리고 싶어도 버리기는커녕 자꾸만 숨어들어가는 밀실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구역은 인간이 스스로 파내지 못하는 구역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자기 중심성을 버릴 재간이 없습니다. 자신이 안 사라집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절차를 몸소 보였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게 인간으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연락이 가능한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 안에서는 성립합니다.

인간 내부에는 자신이 중심이기에 그 어떤 성경 해석도 불가능합니다. 본인이 사라지지 않는 형편에서는 성경해석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 본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신다는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48:8에서는 ‘성소가 중앙’에 위치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성도에 들어가는 문은 총 12문입니다. 그런데 문이라는 것은 실은 가로막는 장벽과 장벽이 이어지지 않는 구역을 말합니다. 비어있는 간격입니다. 그 문이 12지파 이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겔 48:31-34)

즉 자기 자체가 사라지지 쪽이 천국쪽입니다. 자기를 지키려는 쪽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든 이방나라를 다 공격하시는 겁니다. 사라지고 흩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격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그들을 불러들이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사 52:3) 즉 노예 값도 못받고 이스라엘이 파쇄되었듯이 너희들을 불러모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식도 돈없이 그들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나라가 바로 ‘알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즉 예상했던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5)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받는 가운데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해석을 반복해서 제거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는 다리로 작용하면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새로 지음받은 새로운 백성이 될 때, 내가 중앙이었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눈동자가 되는 겁니다. 바르게 사는 자가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를 챙기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도리어 날마다 나를 버리는 위한 말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