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1:1-3 / 자아 주(酒)

정인순 2023. 10. 3.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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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주(酒)

이근호
2023년 7월 19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3

(1:1)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노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상은 인간들에게 기피 대상의 신입니다. 하나님에게 얻어맞을려고 자진해서 찾아오는 인간은 없을 겁니다. 그 대신 인간들은 ‘착한 신’을 원하고 선택합니다. ‘착한 신’을 차라리 인간들이 무수하게 만들어내고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본래의 하나님을 버리고 진노없는 하나님을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보내어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인간들로서는 거부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도 거부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생각에 의할 것 같으면 ‘착한 신’은 인간들과 함께 있어 살펴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떨어져 있음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되는 관계입니다. 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서 난감하다는 점입니다.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게 ’된다는 원칙을 하나님쪽에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정당성에 동감해야 ‘하나님께 돌아옴’도 성사된다는 겁니다. 즉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의 그 어떤 의견차이도 없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공존이 성사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 처음 헤어진 시점은 선악과 나무 과실을 따먹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행한 일만 내가 책임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이스라엘 조상에 대해 진노한 것을 후손이 너희ㄷ즐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전체를 단일성으로 집체화하십니다. 한 덩어리로 여기시는 겁니다.

과거 조상이 한 일도 지금 후손들이 하는 일로서 쉬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때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악과 따먹은 그 본질 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뭉쳐져 있는 겁니다. 선악과 따 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차없는 인간을 내쫓아버렸습니다.

이 버림받게 하시는 원칙이 이스라엘 역사 내내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렸다는 그 조치의 정당성이 유지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의 삶이 보장되는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을 와해되는 경우가 바로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경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정당성’보다 자기 생존의 정당성이 앞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과실 따먹을 때,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버림받음’의 진수는 ‘악마를 버림’입니다. 바로 이점에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해주셨던 겁니다. 이런 조건으로 하여, 이스라엘은 타민족과의 차별을 보여주게 됩니다. 시편 44:3에 보면,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하면서, 활과 창이나 군인들이나 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 전쟁의 대상이 같은 인간들이라는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곧 ‘인간 대 인간’을 상대로 하여금 삶을 영위해 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활과 칼과 말과 군사의 수가 우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나섰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사람대 사람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라만큼은 하나님과 상대하면서 존재하는 나라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한계에 봉착합니다. 이방신을 도입하면서 이스라엘도 사람대 사람으로 상태하면서 자기 존재를 지켜나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그들을 버려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정작 진짜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림받아야 될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악마임을 들추어냅니다. 악마에 대해서 영원히 버려야 한다는 바로 이 정당함을 체험시키려고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신 겁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정당함을 유지시킬 수 없는 자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아 될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정당하게 증명되는 겁니다. 이점을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립됩니다. 세례요한이 행하는 세례에 예수님께서 끼어드셨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4-15)

이 대목에서 ‘모든 의’라는 말이 나옵니다.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 자체가 충분히 의롭다는 겁니다. 여기에 참여하신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확고부동하게 늘 죄인이어야 합니다. 요지부동 죄인이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한결같이 인간은 죄인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21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성립하는 조건에 그 어떤 인간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당연한 이유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그 누구도 죄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죄를 제대로 아는 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는 일에 한결같이 죄인인 자가 죄인의 자격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치 알콜 용액에 인삼을 담그서 인삼주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인삼 성분은 알코 용액속으로 녹아들고 나중에 인삼 자체는 너덜너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는 자신의 일체 의로운 가치는 너덜너덜해야 합니다. 곧 아무 것도 지킬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지키려고 하는 순간 온 동네 귀신은 다 찾아듭니다. 예수님 피 속에 주님은 인간 자아를 담아서 ‘자아(自我) 주(酒)’을 담그시는 격입니다. 인간의 죄와 만나 오직 진노하시는 주님의 피의 의로움만 드러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값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정당하신 진노를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