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1:14-17 / 죄를 들추어냄
죄를 들추어냄
이근호
2023년 9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4-17
(11: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11: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11:16)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1: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듣지 않겠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서 성도는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인간 본인이 어느 정도로 저질하고 악독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그렇게 악하지 않음을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긍정을 해야 타인에게 다가설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여깁니다.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하나님쪽에서 거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몰라서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꾸만 좋게만 이해하고 포장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사기(詐欺)입니다. 인간들의 무심코 본능대로 움직여도 주님 보시기에는 사기입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자기 의’가 담겨있는 그 ‘자기 의’를 사수하는 식으로 본심들이 움직여 나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 타인에게 다가갈 때도 유용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미가 7:5에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타인을 만나는 것을 자신의 가치를 지켜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란 숨이 붙어있다고 해서 ‘산다’가 볼 수 없습니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자들에 의해서 세상 사는 보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 당신은 나름대로 참 노력했고, 훌륭했고, 성실하게 맡은 자리를 감당했어. 그러니 너는 너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마땅해”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존재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데서 돋아납니다. 혹시나 주위 사람들이 다 떠나도 집안 가족이라도 있으면 얼마든지 내가 살 이유를 챙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것까지도 차단시킵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미 7:6)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겼다고 선지자를 통해서 규정하십니다. 여호와와 바알이 차이가 뭐길래 사람들은 여호와를 버립니까?
바알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인간의 죄를 먼저 들추어내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없는 신은 인간이 바치고 정성을 드리면 그것에 대해서 보답하는 식으로 상부상조하는 신입니다. 이렇게되면 바알에 있어 인간 가치는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있게 됩니다.
인간을 격려해주는 선지자를 사람들은 선호하고 환영합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모든 인간 내부에는 ‘자기 의’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기 의’는 자력으로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자기 의’를 유지하고 지켜나는 것을 사명이요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서 기도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을뿐더러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 전체를 망하도록 밀어붙이시겠다는 뜻을 지니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몰고 가시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류 최후의 날을 미리 공고하십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욜 2:1-2)
즉 하나님의 날을 캄캄한 날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만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점에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인간들의 자신의 의와 가치를 사수하려고 할 겁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는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죄를 들추어내는 작업을 수행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극한까지 몰아붙이십니다. 즉 언약이란 인간들이 그 언약을 지켜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들이 언약을 지킬 수 없는지 밝혀나가시는 일을 주님이 해나가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 들어와서 본격으로 실시됩니다. 즉 인간의 의는 그 어떤 경우라도 버티고 있음을 들추어내십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든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려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자기 의를 지키려는 사기인 것으로 들추어냅니다. 왜 그런가 하며는 하나님의 최종 뜻은, 인간의 이름을 지키고 주의 이름으로 대체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있어 대자연이 협조합니다. 이것은 대자연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욜 2:18)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대자연이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인간들의 이름의 가치를 위하여 대자연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대자연의 작용으로 이 세상은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내에 모든 조명들이 다 꺼진 상태인 것처럼 그 어떤 것도 고유의 빛을 낼만한 가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빛은 오로지 주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빛만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결과를 위해 주님은 철저하게 인간의 죄를 들추어주니 이런 언약 실시에 대자연과 함께 성도도 참여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자신을 속여서 자기 의로움을 유지하려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