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0:1-5 / 죽음처리
죽음처리
이근호
2023년 8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5
(10:1)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0: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10: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10: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10:5)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열방, 곧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들에게도 신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신은 인간 손으로 만들어낸 신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와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신을 원합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내기 위한 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내었으니 신에게 올라가는 모든 말은 인간에게서 먼저 내뱉은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신에게 이런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맨 입에 달라고 하기는 그렇게 일단 착수금 조로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고 나중에 우리 소원대로 달성 되면, 성과금까지 아끼지 않고 드리겠나이다”라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들이 신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두려움의 발로라는 겁니다.
두렵다는 것은 기어이 자기를 포기 못하겠다는 고집에서 비롯된 겁니다. 즉 항상 자신이 망해버리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이 들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로 인해 자신이 망하는 것을 사전에 대처하기 위해 복을 받아야 안심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두려움이 시달린다는 말은 곧 복과 저주에 시달린다는 말입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사사기 17장에 나옵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돈을 몰래 가져가자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져간 줄도 모르고 저주를 발합니다. 뒤늦게 이미 나가버린 저주를 회수하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저주를 복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처럼 그냥 홀로 살고 싶어도 복과 저주로 휘감겨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신을 말을 못하기 때문에 대화의 시작도 인간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은 신 앞에서 자기가 내뱉은 말은 자기가 되돌려 받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 말은 사슬에 나열된 말들 중에 자신이 납득 안 되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조리 자신에게서 나간 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우상 숭배한 것으로 멸망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멸망의 본질을 알지 못했습니다.
곧 우상숭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잇고 싶었습니다. 과거 역사의 의미를 그대로 인수받아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멸망당하지 않고 여전히 견재함을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멸망 안 당할 일이 생기면 아니되겠지요.
그래서 그들이 구상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중심으로 모일 수 없는 형편 속에서도 율법은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망하게 한 요인을 다시는 이스라엘에 두게 하지 않으려고 다짐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당(시나고그)’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심점을 갖는 겁니다.
모든 우상이 제거된 집회 장소를 만드는 겁니다. 거기에서는 오로지 율법만 가르치게 되고 배우게 하는 겁니다. 즉 앞으로는 절대로 ‘우상숭배했다’는 지적을 받을 요소를 싹 제거하는 겁니다. 그 대신 다음의 세 가지 기능으로 이스라엘 모임을 지속해가는 겁니다. 첫째는, 모세 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나오는 말씀을 배우는 겁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이여”에 충실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래도 성전을 잊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동안 약속의 땅에 있었던 성전은 네 종류의 짐승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당했습니다. 첫째 짐승은 바벨론, 둘째 짐승은 바사, 셋째 짐승은 헬라 마케니아, 넷째 짐승을 로마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패망국으로 간주해서 지배국의 위신을 뽐내는 빌미로 삼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골라서 이스라엘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소리를 듣고서는 의도적으로 더럽히게 됩니다. 그리고 전혀 대제사장 자격도 되지 않는 자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혀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괴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즉 다시는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을 이제 그만 잊어버리게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회당들은 회당 정면을 예루살렘쪽으로 바라보게 짓습니다.
셋째로, 회당을 근처 물이 있는 곳에 지었습니다. 그것은 정결의식을 빈번하게 치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남은 이스라엘, 즉 유대민족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용도로 율법을 이용했습니다. 행여 마음 속이나 실제로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는 가차없이 정화의식을 가동시켜 더러움을 자신에게서 씻겨내려 가도록 조치했습니다.
이런데 이러한 행위조차 그들은 두려움에 비롯된 우상적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없앱니까? 시편 135: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흔히 사람들의 장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납득이 됩니다.
맏이를 하나님께서 없앤다는 것은 인간 혈통에 이미 저주를 흘러내려 오고 있어 하나님께서는 인간 혈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맏 새끼는 왜 죽이지요? 짐승의 맡 새끼를 죽이는 것과 우상섬기지 말라는 말씀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그것은 ‘처음 난 것’이라는 점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처음 난 것’에 대해서 ‘죽음처리’을 친히 행사하시는 겁니다. 농기구에 ‘열처리’ 특수한 절차를 가미하면서 제품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속에서만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의 일이 개시되는 겁니다. 반면에 이방민족은 이 ‘죽음처리’에 대해서 전혀 경험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처리’가 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말을 신을 향하여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땅의 일이요 탐심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
5)
죽음처리로 인하여 더는 땅의 생활에 대해서 그 어떤 미련하고 결과물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나를 위한 찾을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유대교, 즉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여전히 국가 자체가 그들의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조차 이 지상에 성과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 성과 여부에 따라 저주인지 복인지를 가름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조차 두려움의 발로인 겁니다. 우상이 아닌 것은 십자가에 합류해서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두려움이 우상을 불러 일으킴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