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9:17-22 / 전지적 관점

정인순 2023. 9. 11.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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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관점

 

이근호
2023년 7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7-22

(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9: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9:19) 이는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9:20)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 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9:21)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9:22)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뭇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운다는 것은 나의 내부의 것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바깥 상황과 불일치로 만날 때 터져나오는 겁니다. 즉 나는 그동안 너무 일방적으로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도리어 우리를 다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 인간이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다루십니다.

따라서 운다는 것은 우리들이 평소에 우리 주님과 얼마나 틀어지게 살고 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 인간은 내게 관한 변화들은 나의 관할 하에서 움직이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삽니다. 난데없이 좋은 일 생기는 것도 인간은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나의 예상이 무시당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로 인해 자기가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자기 백성들에게 울게 되는 일을 벌리십니다. 심지어 우는 데 있어 선창하도록 장례식에서 우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부녀자들을 초빙하라고 하십니다. 강제로 울음바다에 적합한 상황을 직접 하나님께서 유발시키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울까요? 그것은 전체를 모르고 부분에 집착할 때부터입니다. 어떤 이는 여기서부터 인간은 ‘죽음충동’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죽음 충동’이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니한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자기가 통제하고 통합하는데 실패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결코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할 권한과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은 더 좋은 날이 오기를 고대하겠지만 실은 그 마지막 날이란 인간이 기다려야 될 날이 아니라 친히 찾아드는 날입니다. 그 말은 대자연을 다스리고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면,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이란 이런 날입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추방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신을 추스르고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마지막 때가 인간 뜻대로 오지 않음을 분명히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고대하고 사모하는 식으로는 구원의 그날이 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은 절망해야 하고 울어야 하고 낙담해야 하고 인간의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야 합니다,

우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결정적 순간이 예수님, 곧 하나님께서 세상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그 순간입니다. 즉 인간의 울음은 하나님이 친히 일을 벌릴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증명해주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울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 주신 정상적인 일은 예레미야 29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5-7, 10)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로 본국에 들어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필히 울어야 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자신과 결벌하고 헤어져야 함을 뜻합니다. 더는 자기에게 미련두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지신에게 기대나 희망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를 둘로 나눌려고 하십니다.

울어야 될 이스라엘과 웃으면서 찬양으로 노래 불러야 될 이스라엘로 나누려고 하십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분열은 신명기 1장에서도 나옵니다. “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내가 너희에게 고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날 동안 거하였었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거하던 날 수대로니라”(신 1:41-46) 즉 이스라엘은 이미 그들이 울어야 될 이유는 그들 안에 담고서 살아온 겁니다.

자기를 포기못하고 기어이 자신을 자기가 취급하려는 자는 이 대자연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전체를 알지 못하고 부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전지적 관점’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전체를 아는 사람은 울었지만 결국 웃고 찬양할 사람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마태복음 16:26의 마음으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전체를 아는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 뜬 사람입니다. 기꺼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이 울어야 될 이유와 찬양해야 될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통합되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