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4:19-22 / 사랑 안의 사람들
사랑 안의 사람들
이근
2023년 8월 20일
디모데후서 4:19-22
(4: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4: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4:2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한참 복음을 여러 민족에게 전할 때, 함께 일했던 자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사도에게 많이 협조하고 후원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활동상을 우리가 들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오늘날도 우리가 이래야 된다는 말일까요? 사도와 이들 사이에는 흔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에게 하신 이와 같은 말씀의 실현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의 육신에는 눈이 박혀 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중에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합니까? 사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육신이 다가 아닙니다. 모든 육신의 배후에는 ‘악한 영’이라든지 아니라면 ‘거룩한 영’이 배후에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디모데 보고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는 겁니다. 그냥 나와 너의 관계에서 오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배후에 계신 분과 나의 배후에 계신 분을 같이 만나게 하자는 겁니다. 너와 나 둘 다 동일한 거룩한 영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활동이란 항상 배후에 있는 악마의 활동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작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실망을 느끼고 떠난 후에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오순절 성령) 이는 제자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먼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계입니다. 그 어디에 가도 자기 밖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최종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이는 곧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이 손해보는 일이 없도록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그 누구를 만나도 ‘우리’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5:22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갖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번에는 남편들이 거부반능을 보입니다.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신이 전부인줄 알고 말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란 곧 자신에 대한 자신이 완전하게 절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을 믿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인간으로 하여금 결코 “네 자신을 놓치지 말라”고 독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거짓입니다. 원래 인간이 이만큼 사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본인에게 걱정하거나 염려할 권한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이만큼 키워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수시로 염려고 걱정하는 겁니까?
그것은 악마가 선악체계의 책임자로 인간을 집요하고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직도 배 12척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배 12척도 불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누가복음 12:49에서는 더 과격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체의 희망과 소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우리’가 형성되지 못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의지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개인 의지는 선악체계 안에서 움직입니다. 자신을 보고 선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율법 자르기’에 나섭니다. 자신이 지킬 만한 것과 못 지키는 것을 임의로 잘라내는 겁니다. 아이가 우는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탄식하고 분노하고 격분하고 우는 것은 자신의 독자성에 차질이 생겼음에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인간의 한계 너머로 불러내십니다. 그 방식은 선악체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구조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잡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근처 수풀에 양을 한 마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을 직전,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살해서 멈추게 하시고 양을 대신 잡아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양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생각해야 되고 바로 이 생각만이 우리 안에 있어합니다. 다른 생각들은 다 내어쫓아야 합니다. 로마서 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어 주심’만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사랑의 감시하거나 측정하는 제 3의 인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를 위해 사랑하는 당사자마저 그 사랑 안에서 상실되어야 하는 겁니다. 자꾸만 자신의 행한 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의미를 두는 우리 자신은 살아남아서는 아니됩니다. 계속해서 상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어린양의 희생’으로 온전한 상황에서 성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더 지킬 미완성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이 십자가로 인해 완성입니다. 바로 이 말씀 ‘말씀 호흡’으로 인해 죽은 자도 삽니다. 성도는 주어진 모든 사정이 주님께서 어린양의 희생만을 드러내는 상황으로 인정해서 열심히 자신에게 절망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더는 믿지 말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