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4:9-13 /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이근호
2023년 7월 30일
디모데후서 4:9-13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4: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4: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사도는 성경을 마저 마무리하도록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고 남은 이 세상에 구원받는 방식은 말씀을 들으므로서 성립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권한은 사람에게서 나온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사도 바울의 특별함을 믿느냐는 겁니다. 인간들의 평소 생활은 믿는 것이 행하는 겁니다. 물건을 만드다든지 농사를 짓는다든지 환자를 치료한다든지 하는 겁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사도 권한은 ‘사람들에게 난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인간들은 평소에 사도가 전하는 말씀에 의존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디에 의존해서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인간됨’을 믿고 삽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말씀 뼈대에 덧입혀진 그냥 흙 구조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들까지도 그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사람들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서 ‘흙이 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으로 중무장 된 요즘 사회에서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자기 자신을 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재질은 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보는 관점은 포기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악마와 한통속이 되고 난 뒤에, 인간들은 악마로부터 모든 지식을 제공받았습니다.
따라서 말씀+ 흙이 되어야 될 자들이, 자아+흙이 된 겁니다. 흙보다 자아성이 우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데마는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안 갔지요? 그들은 이미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벽을 본 겁니다. 이 세상은 온통 죽음으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쳐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악마는 악마를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26에서,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악마와 싸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죽음과 싸우지 않고 타협하고 협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에게서 탈출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곧 자신이 갖고 있다는 신앙이 자신을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흙’이라는 재질을 ‘하늘의 형상 재질’로 바꾸시는 일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어디서 바꿀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이 사라진 때에도 역사 자체가 성전 구실을 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에스더 3:7에서는 하만이라는 권력자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날짜를 제비 뽑기로 뽑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에스더 9:26에는 도리어 유대인들이 권세를 행사하는 날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이란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 그 다음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에게 목숨 바칠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흙이지 새삼스럽게 목숨이 있는 게 아닙니다. 현재 형평은 목숨이란 어차피 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죽을 목숨이라고 거두어서 새로운 형상으로 바꾸어주시는 경우가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바뀐 자의 예가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 욥기는, 인간은 사람하고 상대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악마의 한계와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욥을 이용하십니다. 악마는 인간 세계에서 항상 바른 소리를 합니다. 즉 ‘인간이 걸치고 있는 것들 벗기면 그 안에 원망이 가득하다’는 식으로 자신 만만해 합니다.
처음에는 악마가 내기에 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에서 인간의 육신의 건강을 앗아가니 욥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욥은 살고 싶었습니다. 건강하게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 내리신 복음 욥 자체가 복음의 현장이 되게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은 신약에 와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봅시다. 누가복음 22:33에 보면, “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호언장담합니다. 누가 들어도 정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신앙 있는 척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6:16에서는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지만 예수님께서 곧장 개입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베드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사단의 공간인 것도 모르고 신앙고백을 한 겁니다. 사단의 공간은 곧 사람들의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흙의 재질을 하늘의 형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필히 죽어야 된다는 점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영, 곧 특수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영이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이로서 성도는 서로 만날 때 만나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활동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다른 공간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