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강, 439강) 천기, 마음 / 230704
녹취:이하림
438강-YouTube강의(천기 마태복음 16:4)20230704-이 근호 목사
제438강, ‘천기(天氣)’. 천기, 다른 말로 하면 날씨.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태복음 16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2절, 3절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절에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天氣)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상을 판단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판단할 때에 2절, 3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저녁에 노을이 붉으면 다음날 날씨가 좋다.’ 이것은 오랫동안 인간의 경험 속에서 사람들은 날씨, 천기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관찰이 가능하니까요. 3절에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이것도 천기를 통해서 자기 시대의 미래에 대해 예상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한계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날씨를 보든지 천기를 보든지 하늘의 구름을 보든지 여러 가지 보면서도 너희들이 곱게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뭔가 기대를 하고 의도를 가지고 본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일 날씨나 오늘 저녁 날씨나 앞으로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한 궁금증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교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에 주식을 하나 사게 되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주식할 때 뭐 큰소리치죠. 난 주식 얼마밖에 안했어. 난 그냥 던져둔다. 주식을 그냥 샀을 뿐이지, 주식값이 오르는지 내리는지 난 관심 없다. 화끈한 자기의 성격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미 인간이 주식을 산 이상 주변에서 TV나 라디오에서 주식 이야기 나오면 과연 무관심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 주식값 내려가네. 계속 쥐고 있을까, 팔까? 그런 생각 들겠죠.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이 관찰하고 해석하는 그 상황, 그 환경과 같이 묻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해있는 것을 관찰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관찰하기 전에 자기가 관찰해서 이해하는 그 안에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이 상황을 내가 잘 판단해서 보다 나은 인생을 꾸려야지, 라고 기대는 하지만 이미 그 사람은 자기가 손 쓸 수 없는 자기 세대에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휘말리고 있는 겁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주식한다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무 상관없잖아요. 조선시대 때 무슨 주식시장이 있습니까? 이 시대니까 주식시장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영향을 입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 시대의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천기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딱 하나에요. “너희들은 이 시대 자체에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가 휘두르는 대로 살 뿐이다. 시대 자체를 분석하거나 평가할 그런 안목은 너희에게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자연에 대해서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내일 날이 좋고, 아침에 하늘이 붉으면 저녁에 날이 궂겠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물리적으로 자연의 일부인 하늘을 아무리 인간이 분석하고 판단해도 대자연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세상의 사람이 되어서 놀아날 뿐이지, 그 세상에 대해서 평가한다든지 판단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냥 휘둘리는 거예요.
만약에 저 강가에 어떤 집이 있는데 큰 장맛비가 와서 갑자기 강물이 불었다. 그래서 강이 충만해서 흐르고 넘치듯이 위에서부터 싹쓸이하면서 오는데 강변에 지은 본인의 집이 튼튼하게 지었다고 해서 그 집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무사 못하죠. 휩쓸려 내려갑니다, 강물에. 흙탕물에 휩쓸려가죠.
그러면 큰물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 장마가 오네. 어이구, 비가 많이 오네.’ 이런 이야기한다고요. 장마가 온다, 비가 많이 온다. 그다음 결과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 사람 집이 안 떠내려갑니까? 본인이 비오라고 요청한 적 있어요? 없죠.
그런 이야기, ‘어? 비가 오네. 날씨가 흐리네. 비가 오네. 어? 강물이 불어나네. 여보게, 내가 하는 말은 맞는 말이지? 그렇지?’ 맞는 말, 틀린 말 그걸 지금 따져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이죠. 집이 떠내려갈 판인대요. ‘거봐, 내 말 맞잖아. 비 온다 했잖아.’ 자기 집이 떠내려가서 탁류에 휘말려가는데 그 말했다고 해서 ‘응. 네 말 맞네.’ 같이 떠내려가면서 ‘어, 네 말 맞네.’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집 다 떠내려가는데. 지금 자기가 죽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근본적으로 이들은 죽어요. 날씨가 어떠니 천기가 어떠니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는 말을 하든 다른 의견을 내놓든 상관없이 그들은 그 시대에 의해서 다 몰살되게 되어 있고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너희들이 날씨와 천기는 관심 있으면서 어떻게 이 시대가 어떻게 망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 왜 거기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하느냐?’하시면서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단정했습니다. 요나의 표적. 요나의 표적의 특징은 요나만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요나에게 일어난 일은 자연현상으로 이해한 거예요. 그러나 요나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관련되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 일을 여기 마태복음 16장에서는 ‘표적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표적 정리 들어갑시다. 표적이란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이 세상을 평가하는 게 표적이죠. 하나님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만 볼수 있는 것, 그것이 표적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성도가 출현한다. 성도가 출현한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일한다는 표적입니다.
성도 빼놓고는 다 죽습니다. 왜? 성도라는 독특한 존재의 등장은 바로 이 시대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읽어보지 못하고 성도는 비로소 내 존재가 나 한평생 밥 먹고 살라고 산 게 아니고 주님의 표적으로 이 땅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등장시켰다는 사실을 성도만이 압니다.
439강-YouTube강의(마음 고린도전서 2:9)20230704-이 근호 목사
제439강, ‘마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마음은 안 보이는데 뭐는 보이느냐 하면 육체, 육신은 사람들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육신대로 한다.’ 또는 ‘내 육체대로 한다.’ 그런 말 잘 안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마음먹은 대로 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음이 어디 있는데? 보이지 않는데 마음이 어디 있어? 마음이 어디 있는데 네가 ‘내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마음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서 그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거대한 로봇 안에 있는데 로봇은 스스로 못 움직여요. 그런데 그 로봇의 심장부에 그걸 조종하는 인간이 거기 들어있어요. 로봇은 인간보다 한 열 배나 크고 거대한 로봇 그 전쟁 기계를 안에 있는 사람이 들어가서 이렇게 조종하게 되면 로봇은 따라 조정되는 것. 안에 들어있는 인간을 마음이라 하고 바깥에 있는 것을 육신 또는 육체라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편하게 쉽게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눈에서 눈물이 나올 때 눈물이 뭐냐? 그걸 화학으로 분석해서 눈물이라 하지 않잖아요. ‘네가 왜 슬펐지?’ 라고 묻는 거예요. 눈물의 성분이 나트륨이 얼마고 H₂O가 얼마고 그렇게 성분 따져봐야 의미 없죠. ‘그날 그때 왜 슬펐어?’ 마음이 슬프니까 그 징조가 현상이 눈의 눈물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육체, 육신이 진정한 인간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걸 이용해요.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네 마음 안에 율법 있다.’ 이렇게 이용해버립니다.
‘네 마음 안에 율법이 있는데 네 마음 안에 율법이 오기 전에 이미 네 마음은 마귀가 너를 통제하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그 통제하는 방식이 율법과 좀 닮았어요. 그게 선악지식이라는 겁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
그러니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께 법을 위반했을 때 그 마음속에 선악지식이 들어왔잖아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위반하지 않았을 때 인간의 마음은 뭐로 들어차있는가 하는 그 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선악지식 말고 그 전에 인간의 마음에는 뭐가 들어있었는가?
그 인간의 마음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어요. 좀더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 요구하는 것을 반응을 나타내서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 마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돌한테 이야기하면 우리말이 안 먹히죠. 돌 속에는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그것을 너희들이 이해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에덴 낙원에 있는 모든 것은 따먹을 수 있되 선과 악을 아는 과일은 따먹지 말라”라는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간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필요한 체계로서 주었던 거예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마귀로 인해 범죄함으로 그 체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술술 수용하는 체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마의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은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달라져 있게 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로마서 2장이나 7장에 보면 양쪽에 다 나옵니다, 이방인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주신 거예요. 그걸 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양심.
로마서 2장 14절에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마음에 새긴.
로마서 7장에서는 아주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너희 속에 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선하고 싶은 그 마음에다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기에 보냈느냐? 하나님의 계명을 보냈어요. 계명을 보내서 인간의 마음과 마주하게 했을 때, 그때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던 죄가 자기에게 찾아오는 그 계명을 도리어 위반하고 반대하고 그걸 어기는 즐거움과 쾌락이 인간의 마음속에 작용해버려요.
말씀이 안 들어올 땐 가만있다가 말씀 들어오면 그걸 위반하는 어떤 쾌감. 위반함으로써 자기가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 이것이 인간 마음속에 잠복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안 보면 본인들은 굉장히 착한 사람이에요. 말씀 안 보는 보통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품위 있고 예의범절 있고 남 배려할 줄 알고 나도 가정교육 잘 받았다고 자랑질 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점잖은 사람, 인격적이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희한하게 성경 말씀만 전해버리면 발작을 일으킵니다. 부들부들 떠는 거 있죠. 눈동자가 희번덕 넘어가고 바들바들 떨어요. 발작을 한다고요.
어딜 봐서 내가 죄인이냐? 그게 바로 죄인인데. ‘내가 어딜 봐서 죄인이냐? 말씀 그딴 거 안줘도 나는 지금껏 양심에 크게 위배되는 삶을 산 적이 없다. 나는 내가 품은 양심으로 천당을 가든 지옥가든 나는 나 하고싶은 대로 내 인생 내가 꾸려나갈 거야.’ 라는 말을 말씀 앞에서 복음 앞에서 분노하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처음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형상이 아니에요, 벌써. 악마의 손에 넘어갔어요. 넘어갔기 때문에 주께서 건드려보는 겁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자존감이 센지.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어 있고 틀어져 있는지. 그것은 말씀을 전하면서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의 잘못됨,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맛이 갔다는 것에 결정타를 날리는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나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마음)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인간이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는 인간의 마음 한복판에 진짜 마음에 의해 살짝 가리워진 마귀의 본성을 주의 말씀과 그리고 십자가가 그걸 건드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 나와서 말씀 잘 지키는 사람이 있지만 십자가 이야기하면 그다음 또 넘어가요. 눈이 막 뒤집어지는 거죠. “안다. 그거 안다. 교회 다니면서 십자가 모르는 사람 어디 있는데?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나는 믿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이 물어봅니다. “너 십자가 왜 믿는데?” “구원받으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길 원하신다. 모든 인간이… 디모데전서 2장이 어떻고 저떻고…” 한다고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죠.
그래서 여기 보면 고린도전서 2장 9절,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그 불신자들은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 복음하고 엮어보려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십자가 안다, 복음 안다,…. 진짜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내 마음은 마귀 마음이었구나. 이제 알았네. 아, 그동안 내가 나를 안 적이 없었구나. 이렇게 내가 전적으로 마귀 마음인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가 나오는 그 마음이 이미 천국 간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