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신명기 5:22(마귀 경유) / 230626
녹취:한윤범
대전-설교 질문 20230626
어제 낮 설교에서 시간 관계상 빨리 지나가는 대목이 요한복음 4장 이야기였습니다. 육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육이 뭐냐? 육은 육이 설명되지 않으면 영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영을 설명하기 위해선 반드시 육이 출발점이 돼야 되겠지요.
세례 요한이 바로 몰랐던 점이 죄가 있는 곳에 의가 비로소 나타난다는 거, 구원이 죄 있는 곳에 구원이 있지 죄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은 그냥 박살나면 된다고, 유황불로 박살내면 되지 그걸 왜 따지느냐 하는데 인간들이 세상을 박살낸다는 의식은 그냥 박살내는 것만 즐거워하지 죄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박살내버리면 주님의 언약은 죄가 분명히 이것이 죄다, 이거는 의다 분명히 하는 취지로 언약을 주셨단 말이죠.
이게 육이야, 이게 영이야. 분명히 그걸 끄집어낸 게 목적이에요. 그냥 인간 안 되는 것은 박살내시고 인간 되시는 분은 천국 넣어주세요, 이렇게 돼버리면 그 인식 자체가 육이에요. 주의 뜻은 축복과 저주,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데 있는데 인간은 “나 축복 받고 싶어요.” 중간에 불쑥 엉뚱하게 튀어 들어온 거예요. “나 복 받고 싶어요. 나 저주받기 싫어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니가 왜 거기서 끼느냐 말이죠. 주님의 일인데.
주님의 일은 내가 주는 대로 먹어. 저주주면 저주 먹고, 복 주면 복 먹어. 그냥 내 주는 대로 먹어. 강도가 두 사람 있는데 지옥 가면 지옥 가고, 천국 가면 천국 가는 것이지 천국 가고 싶어요, 지옥 가고 싶어요, 자체가 그거는 중간에 있는 십자가, 양쪽 십자가 말고 중간에 십자가 계신 주님의 고유 권한에 대한 모독입니다. 성립 안 되지요.
육이 없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육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육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영이 등장하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육이 뭐냐?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가족에 물이 없어요. 물이 없으니까 우물에 물 길러 와야 되지요. 지가 생수공장 사장도 아니고. 거기는 하자가 없고 거짓이 없고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자기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진실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진실은 육에서 나온 진실이죠. 육에서 나온 진실은 그 마감이 영으로 도달하지 못하고 끊어지게 돼 있습니다. 육에서 나온 진실은 도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육으로 가버려요. 폐쇄된 거예요. 육의 세계 안에 폐쇄된 겁니다. 육에서 나온 것이 육이라 했으니까 요한복음에.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육 되기 싫어, 영 되고 싶어요, 라고 하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과정으로 절차로 사용해버려요. 하나의 흐름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생각하다고, 변화로.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다, 라는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겁니다. 육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싫든 좋든 관계없어요. 육으로 태어나게 해서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육이었고, 육이었고, 육이었고 그래서 마지막에 육이에요. 우스갯소리로 그게 666인가? 그건 아니고요, 농담이고요. 그 숫자 6과 이 육은 다르겠지요.
영은 영이라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식으로 하면 영으로 난 것은 영이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는 어떠한 접합점도 없겠지요. 있을 수가 없지요. 육이 노력한다고 영이 되지 않는다는 어제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은 성령이죠. 예수님이 영이다 이 말이죠. 영이 어떻게 육과 만날 수 있느냐? 오늘 신명기 강의와도 관련 있어요. 어떻게 영이 육과 만날 수 있느냐? 육은 영을 못 만나요. 육은 영을 못 만나는 데 영도 육과 인간적 입장에선 만나지 못하는 데 주께서는 만남이 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영이 육신이 됐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모든 시작은 진리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진리라고 돼 있어요. 볼까요? 여기 나오네요.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인간의 육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와 은혜가 어디 담겼다? 죄 있는 육신에 담겨서 오는 거예요.
그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지요. 육신 자체에 한껏 품고 있는 독생자의 영광이 영광이에요. 그 외의 영광은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초라한 영광, 인간들이 기피하는 영광 어떤 인간도 받아들이기가 난처한 영광. 왜 독생자의 영광이 그렇게 왔느냐 하면 철저하게 육을 육으로 해서 영에게 접근하는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허용한 적이 없어요. 이것은 바로 종교부정이에요. 모든 인간에 나온 지혜와 지식의 결집이 종교거든요.
진선미, 가장 아름다운 것(미) 예술, 선은 윤리, 가장 거룩하고 지혜적으로 가장 진실한 것, 이 세 가지 진선미, 경북여고 교훈이 진선미에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통령 부인들이 많이 다닌 경북여고. 그 진선미를 인간은 종교의 이름으로 종교에다 다 집어넣었어요. 가장 선하게, 가장 아름답게, 가장 순결하게 순수하게.
그런데 그 순결하고 진실 된 그 자체가 그들은 진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최종 진리, 윤리적으로 순수, 거룩이죠, 경건. 그다음에 아름다움, 이것이 최종적으로 인간에게는 점선으로 돼 있어요. 지향한다는 거예요.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과거에 있다면 이 중간 과정에, 과거에 선으로 그어도 괜찮아요. 출생해서 가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고 있죠.
이 자체에서는 연결점이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이게 진리가 나를 부르는 거예요. 그럼 진리가 부른다면 진리와 자기 현재 사이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거예요. 노력만 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서 기도하는 데 목이 마르다. 목마를 때 물을 찾지요. 물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됩니까? 야곱의 우물 찾든지 요셉의 우물 찾든지 우물 찾아와야 되지요.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야곱의 우물 가봤어요.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와요. 그때 그 현장에 왔지요. 그곳이 아니라는 설이 있어도 난 무시해요. 내가 야곱의 우물이라 하면 우물이라. 왜냐하면 야곱의 우물이라 표시해놓고 전부 다 있으니까 그런 분석은 고고학자들이 하라 하고. 중요한 것은 우물물 길러 온 이게 뭐냐? 이거는 진리니까 오류가 없다. 목말라서 물 길러 왔다.
이게 뭐가 어려워요. 내가 목마르고 싶어서 목마릅니까? 목마르다 이 말이죠. 그럼 목마르면 내 몸이 뭘 요구한다, 이 육이 뭘 요구한다? 물을 요구하고, 나는 물을 얻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서 물동이 들고 우물가에 와야지요. 이 순서에 무슨 하자가 있고, 무슨 잘못이 있고, 무슨 죄라고 규정할 게 어디 있느냐 그 말이죠. 자연스럽게 돼 있는데.
그런데 주님께선 뭐냐 하면 그 자체가, 그리고 그 여인이 종교를 갖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데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립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 질문을 하나 하더라도 자기의 프레임, 종교 프레임에서 안 벗어나요. 내가 안정적인 체계를 다져놓고 안정적인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범위에서 질문이 나오지요.
얼마 전에 광주강의에서 했지요. 광주강의에서 질문을 할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속히 망합니까?” 왜 이 내용을 포함시켜서 질문을 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주여, 어떤 방법을 하면 꼭 지옥 갈 수 있습니까?” 그러한 내용을 왜 기도할 때 안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그 자체가 주님 보기에 반칙인 거예요. 진리라 이야기해놓고 일방적이라. 진리라 해놓고 반 토막내버렸어요. 지옥은 나와 상관없고. 누구 마음대로 상관이 없어, 누구 마음대로. 거기에 지가 질문 해놓고 해결책 얻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오류가 없단 말이죠. 목말라서 우물에 오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은 이런 뜻이에요. 네가 왜 목마르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 목마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여자에게는 지난번에 우물에서 물 길 듯이 남자 다섯을 건졌어요. 옛날에 물 길러 왔어요. 내가 그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본 적이 없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여인은 예뻤다. 매력덩어리였다. 만약에 그 여인에게 이름이 안 나옵니다만 이름을 붙인다면 수산나, 또는 수산나보다 더 고상하게 수잔나. ‘ㅅ’보다 ‘ㅈ’이 훨씬 더 진선미에 가깝지요. 수잔나. 앞에 성은 오, 오수잔나.
출발점을 주께선 지적을 하는 겁니다. 목마른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나한테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는데, 라고 하죠. 그러니까 그 여자가 미끼에 걸린 거예요. “주세요, 그 우물 주세요.” 그 목마르지 않는 우물 달라하지 말고 왜 네가 목말라야 했는지를 문제 삼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
목말라서 물 길러 오는 이게 오류가 없는 진리라고 우기는 이 진리체제가 이게 전체가 뭐냐 하면 육에서 육으로 가는 절차에 불과한 거예요. 살다보면 결국은 지옥 가는 거예요. 꼭 지옥을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고 살다보면 참기름 발라놓은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그냥 지옥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처음엔 이래이래 가지만 나중엔 쑥 내려가지요.
개님이 15년 동안 살았답니다. 내가 보니까 곡기를 끊었어요, 맞지요? 곡기를 끊고 드디어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개나 인간이나 똑같지요. 싸악 미끄러져 이거는 저항할 수 없어요. 없듯이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으로 가는 겁니다. 젊을 때는 경사도가 좀 낮아서 편평하게 가는 줄 알고 이래 생각하죠. 그런데 가는 겁니다. 물론 귀신 붙으면 돼지 떼로 달려가지만.
노선 변경을 시켜주는 거예요. 시작점을 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뭐냐? 영으로 생각할 마음이 없느냐, 영으로. 영으로 해야 돼요, 영으로. 그러니까 여인이 하는 말이, 우리는 종교가 있습니다. 출발점을 종교가 있는데 우리가 어디서 어느 장소에서 섬기면 됩니까, 라는 거예요. 어느 장소에서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라고부터 질문을 던진 것이 그들의 종교의 시작이었지요. 예수님은, 나부터 출발하지, 나부터.
다시 말해서 너로 하여금 네가 감추고 싶었던 육적인 과거사, 그 과거사를 지적을 하는, 지적하는 과거사 몽땅 내가 책임질게와 같은 말이에요. 누가 내 과거사를 안다는 것은 과거사를 네가 품지 말고 주님한테 인수인계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에게 나의 이야기가 있다, 없다? 없지요. 전부 다 예수님의 스토리,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지난번에 대전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과거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는 지금 없습니다. 권사님, 어제 일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어제 샀던 옷은, 몇 년 전에 샀던 옷은 입고 계시지만 그 옷은……. 어쨌든 과거 것을 잊고 있지만 그 과거는 날아가 없어요. 인간은 얼마나 미련한지 없어진 것에 집착을 하고 있다? 이건 귀신 들린 거지요. 주님이 없앴는데 네가 왜 집착하느냐 말이죠.
그러면 하루는 뭐냐? 하루하루 매일같이 선물이 되지요. 그게 샘솟는 샘물이 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내가 노동해서 채워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그 출발점으로 영으로 교체를 했다는 효과로서 매일 신선한 물이 신선한 경험이 주님의 이야기, narrative 우리말로 하면 서사에요. 주님의 서사, 주님의 스토리에 담긴 일부로서 우리에게 너한테 줄 이야기는 이거야, 라고 매일같이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그 여자가 소유한 게 아니고 여자는 예수님한테 소유 당해버린 거예요. 그러니 아까 질문, 왜 영을 이야기하면서 여자가 물 뜨는 게 왜 육이냐, 왜 네 과거 남자 다섯 명이고 지금 다 헤어졌고 여섯 번째 남자 사귀고 있다. 그 이야기가 왜 꼭 필요하냐? 그것은 바로 여자를 예수님 자기 이야기에 그 순간에 시발점으로 주님께서 그걸 채택했다는 선택했다는 그것이 우리 속에 도달된 이미 하나님의 영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영이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몰랐던 과거까지 소급해서 전부 다 그걸 치환시키는 거예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일이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과거사, 그때 그래선 안 됐는데 세 번째 애 안 낳으려했는데 낳아버렸으니. 그것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너 같은 남자 만난 걸 후회한다. 아니에요. 만났어야 했었습니다.
모든 것은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의 이야기로 항상 새롭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치환되고 내일 되면 또 과거사까지 다 주의 일이고 매일같이 그렇게 돼야 돼요. 왜냐하면 우린 복음 들을 때는 주의 은혜입니다, 해놓고 무슨 일 하나 터져버리면, “지난번에 잘못했다고 주께서 보복하기요? 주께서 이렇게 뒤끝 있네. 날 또 치시네.” 이렇게 자기의 순서를 못 버리고 또 그렇게 한다고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다룰까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이미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잊지 말아야 됩니다. 질문에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까지.
대전-신명기(13강) 신5:3(마귀경유) 20230626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5장 22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 앞에 것은 십계명이 쭉 나와 있지요. 그 십계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제가 언급을 해드린다면 여기에 신명기 5장 6절,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여기 ‘너’가 누구냐 하면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자에요.
그러면 종이라 하는 것은 종속되었다는 뜻이니까 앞에 강조점이 뭐냐? 너는 애굽 땅에서 살던 사람이다. 그럼 이건 뭐냐 하면 너는 애굽 사람이야. 애굽 사람의 종이 되었으니까 꼼짝 마라, 했단 말이에요. 거기서 자기의 주도권을 펼칠 수 없었고, 요구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은 출발점이 어디란 말입니까? 따로 산 사람 된다든지 기도원에 가서 따로 사는 게 아니고 어디서 출발점이에요? 지독한 세상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거죠.
여호와의 작업은 분리다. 분리작업. 어떻게? 일방적 분리작업. 일방적이란 말을 집어넣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인 분리작업이 거부된다, 이 말이에요. “나 지옥 안 가고 천국 갈래.” 소용이 없어. “나는 절에 안 가고 교회 갈래.” 이거 아무짝에 소용없어요. 왜? 너무나 자의적이고 자기결정이기 때문에. “나 가까운 교회 가서 구원 받아볼까?” 이거는 통하지 않습니다.
자의적인 분리작업은 여호와의 작업이 아니다. 좀 더 나가면 여호와의 작업은 무엇과 충돌하고 무엇과 대립된다? 나의 자의적인 구원의도와 대충돌을 일으키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자 노력하는 것은 주의 일과 정면 대치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이게 마귀 종인 주제에 어디서. 마귀 종인 주제에 네가 무슨 수로 마귀의 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분리작업을 하면서 자의적인 구원과는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의적인 구원 충돌을 주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계속 의도적으로 유발해요. 현재 이 대립관계를. 쉽게 이렇습니다. 네가 마귀를 알아? 마귀는 영적 존재입니다. 마귀는 영적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마귀를 알고 싶지도 않고 상대하기도 싫어해요.
그 대신 인간들은 같은 영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 이 자체가 인간은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알고 싶어 하면서도 같은 영적 존재인 마귀는 안 알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일방적이에요. 얼마나 자의적이고 일방적입니까. 나는 좋은 존재기 때문에 굳이 마귀 알 필요 없다는 거예요. 참 주님 들었으면, 다 듣고 계시지요. 철없지요.
마귀를 모르는데 네가 하나님을 알아?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네가 마귀를 아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마귀의 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왕 마귀 이야기 나왔으니까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마귀에 대해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지배자다. 이걸 고린도후서에서는 이 세상의 최고 통치자, 이 세상의 신이죠. 신 밑에 이 세상은 다 놓여있는 겁니다. 세상은 이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는 인간의 지배자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 자체가 인간에 대해선 지배자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떻게 다루느냐? 굴욕적으로 다룬다. 굴욕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뭐냐 하면 땅을 슬슬 긴다. 이게 부동산 중개업자. 맨날 땅만 찾고 있어, 땅만. 땅에 가장 근접하게 밀착돼 있어요.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마귀가 관여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바그너 기업의 용병대장 프리고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결국 뭡니까? 땅 차지하기, 점유하기지요. 어떤 차원에서? 국가적 차원에서의 이슈와 과업이 땅을 어떻게 차지하고 이미 차지한 땅을 어떻게 지켜내는가, 그게 최종 목적이죠. 북한의 김정은이 보세요. 핵폭탄 만드는 빌미가 뭡니까?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 지키려고. 일본과 논쟁거리가 뭐예요? 독도는 누구 땅? 독도는 우리 땅이에요. 대통령이 하는 역할은? 국민의 재산의 국가의 영토를 사수하는 그게 제일 임무지요. 전부 다 무엇과 관련돼 있어요? 땅과 관련돼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땅에서 이사했는데요? 땅에서 와서 땅을 버리고 간 거예요. 그럼 땅에서 기어 다니는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뭐냐 하면 비 영광성이고, 비천한 것이고, 굴욕적인 대우를 해주는 거예요. 이게 저주에요. 마귀에 대한 저주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저주에요, 이 땅에서.
그래서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그동안 열심히 세상을 살았던 이유가 땅에서 부자 됨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땅에서 많은 사람이 자기를 친구로 삼길 원했고, 호화로이 연락하니까, 날마다 파티 여니까. 그 잘난 척하는 행세가 지옥 가도 안 달라져요. 마동석한테 한 대 크게 맞는다고 사람 달라집니까? “야 너 이름 뭐야?” “까불이야.” “어디서 까불고 있어?”
한 대 얻어터지면, 아이고 형님 잘못됐습니다, 는 되지만 그게 새사람 됩니까? 멍만 들지 새 사람 안 되지요. 인간 자체가 새 사람 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어요. 종이기 때문에 땅만 생각해요. 온종일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에 가서 퇴근하고 심지어 요양병원 갈 때까지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땅만 생각하고 마지막엔 보람상조 생각하고 돈 먹고 안 해주면 안 되는데, 그것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땅의 것에 올인한 거예요. 일종에 도박을 한 거예요. 땅의 것에 도박을 한 거죠. 죽어서는 하늘나라 가겠지,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땅과 하늘나라는 단절돼 있는데 인간은 그 단절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 단절을 집어넣습니다. 저희들이 마귀를 몰라요. 그냥 하나님, 하나님 하지 우리가 마귀와 함께 살았고 지금도 함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인간과, 인간이란 자기 백성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구약에서 자기 백성을 언약의 백성이라 해요. 언약의 백성을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백성이에요. 거룩이란 윤리적 개념이 아니고 뭐가 있어야 된다? 언약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언약이 나오면 성도고 거룩한 사람이고, 언약 안 나오면 마귀 자식이고, 그렇게 보면 돼요.
평소에 누구와 대화하고 만날 때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만날 때 언약이 나오면 성도고 언약 아니면 성도 아닙니다. 교회 열심히 다녔던 50~60년 다녔던 사돈과 상견례 할 때 긴장된 자리지요. 대화하잖아요. 언약 나오면 성도고, 언약 안 나오면 교인이죠, 교회 다니는 사람이지 언약이 안 나오면 성도가 아니에요. 상견례 하시면서 이런 것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혼사 깨지 마시고요.
마귀를 인간과 떼어놓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게 뭐냐 하면 십계명을 줘버려요. 십계명을 줄 때 십계명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 본인이 십계명 안에 들어있어요.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십계명 안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십계명, 예를 들어서 십계명 중에서 아무거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잖아요. 제육 계명이죠.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 누가 들어있다? 주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는 마지막에 신약에 와서 온전한 완료된 해석은 정답은 날 죽이지 말라. 왜? 살인하지 말라, 에 나가 들어있으니까. 또 간음하지 말라. 제칠 계명이죠. 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포함돼 있어요. 그게 간음이니까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은 나 말고 다른 신을 믿는 게 거짓말 되지요.
십계명 제일 마지막에 뭡니까? 탐내지 말라. 가난한 자 속에 누가 들어있다? 누가 들어있어요? 주의 이름이 들어있는 거예요. 가난한 것에 대해서 탐내는 것은 내게 대해서 탐내는 것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려고 할 때 그것은 무슨 죄에 해당됩니까? 그것은 바로 탐심에 해당되지요. 주께서 가난하게 했는데 네가 뭔데 부자 되려고 애쓰느냐. 가난해도 부자 돼도 너는 가난해도 집에 수박은 하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수박이 누구 것이냐? 주님의 것이에요.
아까 예비로 강의한 것 있지요. 사나 죽으나 누구 것이다? 주의 것이다. 예수님 자기 이야기인데 가난한 자나 아이고 이놈의 팔자야, 이놈의 팔자야. 먹고 죽으려 해도 집에 돈이 이렇게 없냐. 그럼 주님께서 멱살 쥐고 지금 누구 재산을 모독하고 있는 거야? 너는 너를 모독할 자격이 없어. 돈을 안 주는 것도 누가 안 주신 거예요? 주님이 안 준 거고.
네가 지금 가난하다고 탄식한다는 것은, 나는 예수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부자 된 나를 사랑하고 싶다는 뜻이거든요.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이렇게 지지리도 가난하냔 말이죠. 주께서 하는 말이, 그래 그게 어때서, 하는 거예요. 너는 왜 가난 안 해야 되는데? 주님이 전지전능하면 부자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나는 너보다 더 가난했었는데? 유구무언입니다. 갑자가 할 말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유구무언이라 해놓고 갑자기, 그런데 저 한남동 이백 평짜리 저택은 저건 왜 잘 삽니까? 그건 재벌한테 물어봐.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부자가 하는 말이, “내 것 아닌데, 안녕히 가세요.” 부자라도 내 것 아니고 가난해도 내 것 아닌데 이게 땅에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굴욕적으로 땅만 쳐다보며 사니까 고만고만한 인간들에게 참조될 지혜와 정보를 인간들로부터 얻는 거예요. 그게 인터넷 아닙니까. 젊은 아들. 요샌 육십 대도 맨날 인터넷 보고 윤석열 이야기, 이건희 이야기…. 그런 데서 오는 어떤 굴욕적인 지저분한 땅이지만 약간이라도 즐거운 숨통이라도 틔겠다고 거기다가 유투브나 티비조선 해서 전부 다 돌아다니고 와이티엔부터 해서 뉴스…. 할 일이 없으니까 내 편 이겨라, 내 편 이겨라 이런 식으로, 그것으로 시간 때우는 거예요, 땅에서. 그것 하다가 임영웅이 나오고 김호중 나오면 그것도 빠져서 난 임영웅 팬 해서 굿즈 돈 백만 원씩 임영웅이 티 사고 취미다 해서…….
주께서는 분류를 시킵니다. 십계명으로 분류시키는 방법은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짜 애굽인으로 만들어버려요. 진짜 애굽인. 육적으로 이집트에 사는 애굽인 말고 영적인 애굽이 있어요. 이건 어디 나오느냐?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상태, 애굽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가? 당연히 여러분 아시죠. 애굽의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마귀가 있지요. 마귀를 아는 걸 경유해야 주님을 알아요. 마귀 안 거치고 주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기적을 할 때 기적이라 하는 것은 뭐냐? 인간의 일을 넘어서는 주님만이 알고 있는 내막에 대해서 그 프레임, 그 구조에 대해서 접근해 그 안에 접촉해주는 게 기적이에요. 그러니까 땅에서 다른 인간들이 신학공부하고 성경공부해서 배운 것 말고 깊이 있게 해주는 거예요.
주님의 안경, 영적 안경, 주님께서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경을 볼 때 성령 없이 보는 것과 성령을 끼고 보게 되면 악마의 활동까지 같이 겹쳐서 전체가 다 보이거든요. 요 이야기는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의 안목을 주사 전의 것과 오는 것, 창세전까지 다 알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성령으로 아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걸 거치면서 사태를 파악을 했던 사실, 예수님이 쭉 거치면서 거기 날파리가 달라붙듯이 악마와 귀신들이 달라붙는 거예요. 주께서 귀신을 추방했다는 말은 인간들이 원인도 모르는 체 걸려있는 병의 내 배후에 영적 존재의 실재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인간의 육체를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이죠.
그래서 귀신은 나가라, 하고 사람보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사탄보고 이야기한 거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네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이게 베드로보고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와 함께 있는 악마보고 이야기했어요? 마귀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마귀를 거쳐야 누굴 아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의 이름의 활동은 뭐라 했습니까? 분류하는 것, 분리시키는 것. 분류하고 분리시키는 거예요.
무엇과 무엇을 분리시키는 데 분리시킬 때 일단은 그들이 구원받는 건 차단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차단하는 방법이 십계명이에요. 이거는 제가 주일 낮에 했는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것 같아요. 십계명인데 우리는 성경 찾아봅시다. 시편 40편 7절, 누가 먼저 찾으신 분 읽어보세요.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오, 두루마리 책, 하나님의 율법이죠. 하나님이 주신 계시지요. 이 계시가 줄 때 땅에 눈에 보이는 것만 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책 줬다, 계시 줬다. 이것 지키라고 준 게 분명해. 말씀은 실천해야 효과 있어.” 교회에서 목사들이 그리 하지요. 따라서 우린 지켜야 돼, 이래 나오지요.
그런데 이게 두루마리가, 십계명을 율법으로 봅시다. 율법과 여기 다음에 등장하는 게 누구냐 하면 나가 등장해요. 이 ‘나’가 누구냔 말이죠. 지금 마귀를 알아야 누굴 안다?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이름을 알아야 천국과 지옥 갈 사람을 주의 이름이 분류하고 분리를 시키거든요. 이스라엘을 다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분리하는 작업의 현장으로서 그들은 선택받은 거예요.
자, 뭔 뜻이냐 하면 애굽 땅, 애굽 땅입니다, 땅. 애굽 땅에서 홍해 건너 빠져나왔다는 것을 사람들은 뭡니까? 이스라엘이라 하지요,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은 왜 빠져나왔는가? 이스라엘이 살 땅으로 가지요. 땅과 땅이죠. 땅과 땅인데 시편 95편 7절, 8절 읽어보세요.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보세요. 이동하면서 분류가 되지요. 여기 므리바 또는 맛사 왜 이런 사건이 원망 상황이 왜 터지는가? 지금 그들은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땅이 없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소망은 뭡니까? 내가 애굽에서 살던 식의 땅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땅이에요. 완전히 땅을 원하고 있다고요. 그러나 주께서는 뭐냐 하면 신약에 오면 애굽 땅이란 모든 세상이 지구가 다 애굽 땅이에요.
애굽 땅이고 주님께서 애굽 땅에서 탈출하듯이 출애굽하듯이 애굽 땅 말고 다른 땅을 준비했습니다. 하늘나라 본향을. 거기는 누구와 같이 가야 돼요? 주의 이름과 동행해야 가능하지요. 그리고 그 땅에 갈 때 비로소 시편에서 말하는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하는 양 개념, 백성 개념 이 개념이 구약에서는 하나의 수평적, 평면적인 지리적인 땅 배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개념이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 위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가운데서 위의 땅이 돼버려요.
이 땅에선 애굽에선 죽었고 하늘나라는 살았다는 말이 골로새서에서는 너희가 죽었고 여기선 죽었고 이 땅에선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감추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제가 뭐라 했지요? 여러분 호적 정리하라 했지요, 호적 정리. 주민등록, 법적인 서류상 말고 호적 정리가 돼야 돼요. 안전 빵, 하늘나라 생명이 있는 사람. 하늘나라 생명 있는 사람이 성도 아닙니까, 성도. 왜? 주와 함께 거하기 때문에 안전 빵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사망으로 생명으로 옮겼지요. 요한복음 5장에 의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영생을 얻었단 말이죠.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동안 하나님이 성도한테 해준 일은 뭡니까? 이 영생을 가리는 것들을 치워주는 거죠. 영생 아닌 것들, 영생을 대체하고 싶은 것들을 치워주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교회 부흥이에요. 예수 믿고 부자 된 것, 예수 믿고 애 공부 잘하는 것, 예수 믿고 암 걸렸다 나은 것, 이런 것을 어떻게 합니까?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어떤 집은 예수 믿고 자식 둘 결혼 잘하고. 아무 탈 없이 말썽 없이 결혼식 잘하고 잘 사는 것, 이런 것이 무엇을 가려요? 영생을 가려버려요.
주께서는 바빠요. 굉장히 바빠요. 왜 바쁘냐?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사랑은 뭐로 쓴다? 연필로. 네가 아는 사랑은 연필로 써야 돼. 연필로 쓴 사랑은 지워져야 진짜 완벽한 사랑이 나오니까. 치워져야 되는 거예요. 없애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땅의 종이었으니까. 땅 없이는 죽는다고 난리거든요. 주께선 죽어라, 이 인식이에요.
그래서 대표적으로 땅도 없고 몸도 안 건강한 사람, 가난 더하기 몸 지지리도 못난, 개보다 더 못난 이 둘을 합성한 모델이 누굽니까?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를 선망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애한테 장래 희망이 뭐냐? 거지 나사로. 이런 애 없어요. 이런 애가 없습니다. 너 뭘 될래? 방탄소년단, 이런 것 하지. 너 뭘 될래? 거지 나사로.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이 끝까지 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성경지식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무능하고, 전에 강남강의에서 했었지요. 무능은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불가능함으로. 우리는 무능함 정도가 아니고 아예 불가능하죠. 이 불가능함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 사람, 지옥 간 사람. 이 불가능함에 대해서 지금 난리를 치는 사람, 천국이죠. 왜죠? 이미 호적 정리가 됐기 때문에. 충분하게 얼마든지 불가능함에 대해서 저는 좋습니다가 돼요.
일제시대 때 1930년대에 우리나라 시인, 젊은 시인 스물일곱에 죽은 이상이란 사람의 시에 나오죠. <오감도>란 시에 한 아이가 그다음에 끝에 뭐냐? 무섭다고 그래요.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남아 있기 때문에 무서운 거예요. 근데 왜 주님께서는 영생 빼놓고 복음 빼놓고 다 지워지는가? 이게 왜 즐거움이고 고마운 일인가? 해결되었다는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계속해서 각인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이런 것들 치워도 되지?
그래서 주부들이 가정에서 식사시간에 성질 급한 가정주부가 밥 먹고 있는데 다 먹었지, 다 먹었지, 빨리 학교 가야지 하고 치워버릴 때 “엄마 덜 먹었는데?” “그만 먹어도 괜찮아. 나 빨리 설거지해야 돼.” 치워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성질 급하게 우리의 것을 마치 마지막 최후의 날을 맞이한 것처럼 설거지를 해주신다고 주님 되게 바빠요. 아직 내가 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설거지부터 해버리시는 거예요.
다시 신명기 5장 돌아와 봅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영적인 애굽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약속의 땅 할 때 땅, 땅 했지만 그 약속의 땅에 탈락될 자와 들어갈 자를 분류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탈락된 자는 원망했기 때문에 사십 년 동안 해도 다 탈락했어요. 탈락되지 않은 사람은 그 원망한 사람을 대체물로 들어간 사람. 애굽에서 홍해 건넌 사람 다 죽여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죽이고 못 들어가고 심지어 모세도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가고 그 뒤에 대체물로, 그러니까 뭐가 대체물이냐 하면 땅 찾던 사람들 다 죽었다, 라는 대체물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럼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다 구원받았느냐?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해서 땅과 약속의 땅이 격상 차이를 드러낸다. 땅과 약속의 땅 차이는 땅에 있는 사람은 홍해를 건너오고 광야의 만나를 먹으면서도 약속의 땅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 탈락될 자를 대체물로 새로운 그 뒤에 태어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선 격상의 차이 나는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거예요. 이 계명을 신명기라 하는 거예요. 내가 그때와 세운 계약을 현재 너희들과의 계약을 새로 세운다. 그 신명기에서 부각된 인물은 갈렙과 여호수아. 이 말은 뭐냐 하면 갈렙과 여호수아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십계명을 바라보는 안목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안목의 차이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약속의 땅에 있는 게 힘듭니까, 아니면 십계명 지키는 게 힘들어요? 십계명 지키는 게 힘들지요. 십계명 지키는 것을 자기가 한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소용없어요. 약속의 땅은 십계명만큼이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선 너무나 무리한 요구에요. 십계명도 무리한 요구지만 약속의 땅 삶 자체가 무리한 요구에요.
이제 첫째 강의의 진짜 본론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천국의 조건과 지옥의 조건이 다른 거예요. 지옥의 조건이란 말은 나한테 달라붙는 모든 조건이 나로 하여금 지옥 안 가야 못 버티는 조건이 달라붙어 있는 것, 이게 지옥의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나머지 죽었던 그 사람들 보면 돼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무슨 조건입니까? 지옥의 조건이 아니고 천국의 조건을 갖고 있는 거예요. 천국의 조건을 그 당시 상황에서 세팅해본다면 정탐꾼을 보내지요. 정탐꾼을 보내는 이유는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대적할만한 그러한 수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판단을 누가 한다? 보낸 자들이 판단하는 거예요.
가보니까 두 가지 점을 했지요. 과연 살기 좋은가? 과연 잘 살 수 있는가? 조건이죠. 천국의 조건, 지옥의 조건. 조건이에요. 두 번째, 우리가 그 땅을 능히 차지할 수 있는가? 조건이죠. 갈렙과 여호수아는 두 가지 조건이 다 만족된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 말 듣지 말고 거기 가서 이건 조건에 안 맞는다고 울었다는 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보자.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된 말을 왜 들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매일같이 그 조건에 우린 둘러싸이고 그 조건이 우리한테 지남철에 쇠붙이 달라붙듯이 매일같이 우리는 거기 달라붙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우리가 몰랐던 게 뭐냐 하면 마귀가 제시한 생각이었던 거예요. 마귀를 거치지 않으면 어디에 못 간다? 주님을 몰라요.
마귀가 우리한테 압력을 가하고 제시한 게 뭐냐? 지옥의 조건입니다. 나랑 같이 가자고. “살던 대로 살아. 유난 떨지 말고. 우리 집안이 다 불도 집안인데 너 혼자 교회 가면 안 되잖아.” 이런 거요. 그러면 우리는 그걸 무시할 게 아니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살던 대로 살고 남들 하는 대로 사는 그 이야기를 무슨 취지로 하는지 들어봐야 돼요.
들어보게 되면 일단 나는 잘 살아야 되고, 두 번째 잘 사는 방법은,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것 잘 살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것, 내가 해낼 수 있는 것 그것으로 잘 살면 되겠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여러분들은 다 잊어버렸겠지만 제가 확인시켜드립니다.
전도, 선교, 예배참석, 성경공부, 기도 그다음에 교회 청소, 봉사, 그리고 작은 액수의 십일조, 작은 액수가 중요해요. 오만 원 밑의 결혼식 부조 정도. 목사 섬기기 이것 다 할 수 있잖아요. 오늘도 얼마나 섬겼나. 이것 할 수 있는 것. 남한테 배려, 남에 대한 동정심, 이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지요.
동정심, 이게 문제인데 동정심 한다는 것은 네 사정을 내가 안다는 시건방짐이에요. 이게 얼마나 건방진 짓인지 몰라요. “도와줄게. 너 나 알아?” “알지.” “나도 너 아는 것처럼 고생 많이 했다고.” 그래서 사기 당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인간은 도와주면 안 돼요. 그 인간에게 빼앗기지 말고 주님한테 빼앗기면 빼앗겼지 인간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집에 돈 몇 푼 있거든 꼭 쥐고 있어요. 미치도록 돈을 쥐고 있어야지 주면 안 돼요. 심지어 하나님 앞에 뺏기면 안 돼요. 쥐고 있어야 돼요. 강제로 뺏어버립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기쁘지 않아요. 강제로 뺏길 때 자기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이건 말할 수 없는 내가 무능하고 불가능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버린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충분하게 나머지 열 사람의 정탐꾼 마음을 알아요. 왜? 하나님께서 장치를 그렇게 했어요. 너무나 거기는 강대한 민족이라서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이 홍해 나왔을 때 어느 누가 홍해 건너가리라고 믿은 사람들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한 마디 했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출애굽기 14장 14절, 외우기도 쉬워요. “가만히 있어.” 노래 가사에도 나와 있어요. 가만히 있어~ 남진이 부른 노래, 내 안에 뭘 틀어라? (둥지) 얼마나 들었으면, 내 안에 둥지를 틀어라, 에요. 남진이 장로님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이걸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걸 믿은 거예요. 홍해를 통해서. 앞으로 홍해보다 더 센 게 나온다는 거예요. 홍해는 그래도 물길이죠. 이거는 인간들이에요. 돌멩이 다루는 것보다 인간 다루는 게 힘들거든요. 회사에 부장, 대리 돌멩이가 있다면 회사생활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장 덩어리, 차장, 인간들이기 때문에 사표 내고 삼년 만에 다 튀어나오고 말지요. 인간들 때문에. 회사생활 젊은 애들 잘 못해요. 혼자 돛대처럼 살다가 회사만 튀어나오는 줄 알아요? 결혼도, 차라리 솔로가 낫다고 다 튀어나오죠. 돌멩이는 좋아요. 내가 예쁘게 색종이로 해서 내 게 돼 있지만 그래서 남자 대신 개, 여자 대신 개를 키우는 거예요. 감당을 못하지요.
가만히 있으라, 해놓고는 가만히 있지 못할 상황을 보여줘 버립니다. 그런데 주께서 조건은 뭐냐? 천국 조건은 네가 감당 못하지만 조건이 뭐냐? 내가 너와 함께 있잖아. 내가 기르는 양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우리가 어떠한 난관을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떠한 난관을 이미 극복했느냐에요.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숲속의 길은 누가 먼저 밟아줘야 길이 난다고요. 주께서 먼저 길을 냈어요. 그 길을 낸다고 난리를 치면서 예수님께 벌떼처럼 달려들었던 그때 비로소 귀신과 영적 존재 마귀가 등장하는 거예요. “너 같은 인간은 팔아먹어야 돼.” 그게 누굽니까? 사탄 가룟 유다잖아요. 가룟 유다 역할은 그것 하라고 제자된 거예요.
악마는 길이 없는 경우는 자기 정체를 안 드러냅니다. 그저 우리한테 격려하고 위로하지요. “너 편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얼마나 하기 따라서 인생은 달라지는 거야.” 악마는 계속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켜왔던 거예요. “사람은 지가 노력한 만큼 대가 얻게 돼 있어, 그게 진리야.” 그런 식으로 계속 했다고. 기도를 많이 하면 응답받고. 기도 안 하면 응답 없고. 그러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바치고 봉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날아가요? 마귀가 날아가요, 마귀가. 인간은 마귀의 대행자거든요. 아바타에요. 아바타 또 나온다. 마귀의 아바타라고. 입만 벙긋벙긋. 주께서 율법 주시고 나를 위하여 율법은 너희들이 지키는 게 아니고 바로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내가 새로운 땅 되기 위해서, 내가 길이 되고, 내가 유일하게 진리가 되고, 내가 유일하게 생명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동행시키면서 분류작업, 탈락 작업을 시킨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조건이란 주님이 하신 일과 내가 한 일, 내가 했으니까 기대한 일을 차이가 나서 내 한 일이 제거되는 것이 주님의 조건입니다. 이미 줬는데 이미 생명 줬는데 그것을 네 하는 일이 가로막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지옥의 조건은 뭐냐? 주님이 이미 하신 일이 없어요. 없고 주님이 하신 일을 지향하죠. 이걸 합치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주님을 본받는 식으로 주님이 하신 길을 우리가 따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줘도 안 질 인간이 무슨 십자가를 져요. 십자가 졌으면 베드로가 구원받았지요, 지 힘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그런 말씀 들을 필요 없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했잖아요. 하면서 뭘 보느냐 하면 제자들 하는 그 하나하나가 지옥의 조건이 돼요.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고 헤어지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에 헤어지기를 간절히 원했잖아요. 나 저 사람 모른다고. 강력한 부정이 난 헤어졌다고 마음 정했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천국의 조건을 거부해요. 왜? 마귀가 있기 때문에. 지옥의 조건으로 무장돼 있기 때문에 천국의 조건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베드로가 고기잡이할 때 누가 찾아갔습니까? 주님이 찾아갔잖아요. 그럼 이건 뭐냐는 거예요. 구원은 아까 처음에 작위적이 아니고 내가 노력하는 게 아니고 누가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거죠. 그걸 주일 낮 설교에 뭐라 했습니까? 개인교습. 줌 강의 아니죠. 비대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이 말은 오늘날 성령으로 성도에게 찾아가시는 거예요. 찾아가서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아까워서 못 버리는 특히 노인네들 오래된 집에 아파트 보면 이 집은 좀 안 그렇다 만은 못 갖다버려요. 아까워서. 벽에 빛바랜 손자 사진 있잖아요. 촌집 보세요. 촌집에 현관 들어가면 제일 맞은편에 애들 보내준 사진 있지요. 사진에다 작은 사진, 증명사진을 꽂아놨어. 스카이라인이 맞질 않아요. 울퉁불퉁.
지 칠순잔치 사진에다 애들 증명사진 하니까 칠순잔치 얼굴이 안 보여, 다 가려서. 우리 마음속의 과거의 지저분한 것들이 왜 그리 명함처럼 꽃아 있는지. 그게 지옥의 조건이에요. 다 지나간 건데. 그게 아까워서 못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계속 주님께서 십자가를 덕지덕지 자꾸 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구원받았잖아요. 주님께서 가만있을 리가 없지요. 삐용삐용 소방관 동원해서 매일같이 쳐내는 거예요.
특히 우리 과거는 지나갔다. 이걸 매일같이 쳐내요. 고민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나간 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 다시 생각하지 마. 다 지나간 거야. 지나가고 그건 네 이야기 아니고 내가 일부러 그렇게 이끌었어. 왜? 너는 나의 양이니까. 나는 목자니까 너는 양이고 나는 목자니까. 끊임없이 쳐내는 일, 쳐내봤자 내일 되면 이만큼 쌓여있고. 그럼 또 쳐내고, 또 쌓여있고 또 쳐내고.
십계명은 누가 지킨다? 주께서 다 지켜내셨습니다. 그 앞에서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그 주님을 죽이는데 주님에게 거짓말하고 주님에게 간음하고 주님 앞에서 탐심을 내는 그 주인공들이었어요, 우리 자신이. 나를 대체한 나의 대체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첫째 시간 결론을 내려 봅시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철로에 기차가 지나갑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 있느냐? 여기에 드론 띄워있지요. 주와 함께 드론 띄우면서 내가 죽어야 될 내 육신이 기차 타고 어딜 가고 있는지를 지옥으로 가고 있는지를 그냥 보지 않고 물끄러미 보는 거예요.
쟤가 너야. 예수님의 과거거든요. 예수님 과거에 너 같은 인간을 껴안고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심판 받는 아버지께 버림받는 그 모습을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과 같이 해야 돼요. 혼자 하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과 더불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예요. 바라보게 되면 여기에 제3호선 창가 3번 A석에 내가 앉아있어요.
앉아있는데 앞에 있는 아가씨가 계란 하나 잡수랍니까, 이런 거예요. 둘이 결혼해서 애 낳았어요. 드론 띄워서 “아이고 인간이 저래 망했구나.” 이미 마치 팔짱끼고 과거를 주님의 일을 이게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나간 일이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드론이 생명이고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여진이죠. 죽었다는 여진이 현재 우리 육신으로 살고 있으면서 좀 있다 요양병원에서 만납시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