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1:7-11 / 성전 연대기
성전 연대기
이근호
2023년 5월 24일
본문 말씀: 학개 1:7-11
(1: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1:10)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1)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국으로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사 나라의 초대 왕인 고레스왕을 통해서 성전을 짓게 하셨는데 이는 전에 있던 성전에 왜 무너져야 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렸는지를 두고두고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이 만남의 장소가 솔로몬 왕 때부터 건축 구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므로서 이 건축 구조물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셔서 무너지고 불태워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전이 없어지게 된 겁니다. 곧 ‘성전의 부재(不在)’입니다. 과연 ‘성전 없음’으로 성전의 취지가 전부다 알려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성전은 ‘없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영역으로 더 낮아지고 더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모욕을 받는 성전’이어야 하는 겁니다.
유대 사람들을 고국에 보내어 성전을 다시 짓도록 역사적으로 동원된 인물은 놀랍도록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닙니다. 메시야를 가디린 사람도 아니요 율법에 관심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냥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자의 수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를 통해서 성전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겁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사 44:28-45:1)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의 수장을 ‘기름 받은 자’고 하십니다. 곧 메시야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것은 이방민족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엄청난 모욕감을 안겨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손잡지 않고 이방민족과 손잡고 일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에 대해 배신감을 갖게 합니다.
성전을 짓기 위해 고향 땅으로 사람들이 왔지만 성전 짓는데 별로 관심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락처를 갖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평온하게 고향의 땅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에 전적으로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성전 없음’보다 더 다급한 것은 ‘자기 생존의 터전 없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취지가 누락되어 버리게 됩니다. 14년 간이나 성전 재건 작업은 중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어서 독촉하시는 겁니다. 마을 근처 산에 가서 나무해도 성전을 지어라는 겁니다. 이런 성전 재료는 열왕기상 6장에 나오는 솔로몬 성전 재료하고는 터무니없이 가치가 떨어지는 재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전을 채울 그릇과 제사 기구들도 실은 이방민족 왕국 창고에서 이방신의 승리됨을 기념하는 전리품으로 모아놓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그런 금그릇이나 은그릇들이 다시 유다 땅으로 온다고 하더라도 바사라는 이방나라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초라한 성전 규모와 재료에다 그곳을 채우는 성전 제사 도구들까지 이방신으로부터 통치받는 실정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물건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성전 짓기에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메시야와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나라에서 고대하는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기적으로 자기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메시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메시야는 초라한 성전으로 말해주듯이 유대민족에게 모욕감을 가중시키는 메시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타락한 천사’의 뒤를 따라 세상까지 쫓아오시는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악마가 온통 지배하는 세상 안에 하늘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지옥에서 천국 노선으로 옮길 줄을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있음보다 더 천하게 있는 것’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욥이 병들고 난 뒤에, “이럴 거라면 차라리 저를 만들지 말아야 했다”고 자신에게 모욕감을 느끼는 그 자리를 말합니다. 이 악마가 지배하는 자리로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처소는 곧 비참하게 오신 ‘메시야와의 만남’의 자리입니다.
오실 메시야의 모양새는 이사야 53:5-6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과연 누가 이런 메시야를 참된 메시야로 받아드리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없음보다 더 낮은 모욕적인 자리’에서 굳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못 받아들입니다. 이는 곧 미움이요 혐오로 이어집니다. 마치 창세기 4장에서 악마의 지시를 따라서 동생을 죽여버린 가인이. 동생을 찾는 하나님에 대해 한 말과 같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창 4:9)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죄의 몸’(롬 8:3)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핍박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 딴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자부했지만 주님은 그 일을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행 9:5)
인간들이 왜 오신 메시야를 싫어하고 미워할까요? 그것은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미워하는 심정과 같습니다. 자신은 있음과 더 풍성한 영역에 있고 싶었던 겁니다. 마치 초라한 성전 건축보다 자신을 빛내고 거주할 집 지키는데 더 몰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무너지게 하시고, ‘없음 보다 더 초라한 죄의 몸’으로 저주받는 그 현장을 온전한 성전으로 삼게 됩니다.
“죽었다고 부활하게 되는 그 몸”이 완성된 성전입니다.(요 2:20) 이 성전이 쳐들어와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강제로 토하게 하시는 그 현장이 곧 성령이 거하는 성전입니다.(고전 6:19) “이제 너는 너랑 놀지말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보호못하고 밀쳐내기에 열심인 우리의 모습을 성령으로 밝히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정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학개 1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찌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요구사항도 아니였고 그들의 계획도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성전을 짓기 위해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 놓고는 성전을 지을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14년동안이나 성전을 짓는 척하다가 스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학자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투톱이죠, 두 선지자 보내서 성전을 빨리 지을려고 재촉하고 독촉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너희들이 성전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의중을 모른다면 너희들이 평소에 정신을 다른데 팔고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성전에 무관심했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 지으라는 그런 임무를 띠고 다시 본국으로 왔지만 자기들의 희망 사항은 엉뚱한데 가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성전말고 다른 안식처로 대체했어요. 대신했습니다. 자기 몸 편한걸로 대체했어요. 그게 뭐냐하면 바로 자기 집을 짓고 거기에서 농사지으면서 자기들의 본색을 그만 드러냈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나는 성전 지으라고 분명히 이야기했건만 너희는 정신을 다른데 팔았는데 9절부터 12절까지 새삼스럽게 읽어보지는 않겠습니다만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버렸다.” 없애버렸다 이말이죠. 사라지게했다. 10절에부터 12절까지는 그들이 성전에 무관심하고 그들의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연재해를 보내가지고 그들의 이스라엘의 소망을 무산시키는 일을 만군의 하나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다 이렇게 돼있어요.
11절에 “내가 한재를 불러서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체에게 육축에” 가축이죠 “손으로 수고한 모든일” 그러니까 이 리스트 이 항목 속에 뭐가 빠졌냐 하면 “성전 짓자” 성전의 것은 빠져있어요. 그러니까 이게뭐냐? 성전과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하는 거죠.
이 말, 성전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메시아 하나님, 하나님 메시아와 정작 하나님, 곧 메시아죠.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메시아, 구원자에요. 하나님이 생각하는 구원자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괴리 상태에 있습니다. 괴리라는 뜻은 벌어졌다. 관계가 끊어져 있다, 이걸 하나님께서는 “성전 지으라” 이스라엘은 “성전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밥이나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이스라엘 사이에 통하지 않는 의견 차이, 그 의견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전 짓기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겁니다.
참과 거짓, 진리와 거짓을 성전을 보내어서 파악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참과 거짓은 하나님의 성전에 관계없이 내가 행한 수고에 대해서 적절한 결과물이 나오면 우리는 그걸 참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참되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제대로 잘 가게 되면 부모로서는 ‘내 수고한 것이 좋은결과가 있구나’ 하고 그걸 참된 것으로 진리인 것으로 여기거든요.
근데 유치원 보냈는데 유치원 갔다가 한 시간 만에 튀어오고, 아침에 늦게 가지도 않고 이럴때는 엄마로서는 애가 거짓됐다고 이야기해요. 자기는 참 열심히 하는데 애가 거짓됐다는 거에요. 그렇니까 인간은 자신의 노력을 참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적절한 보상 같은 것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돼버리면 뭐냐하면 자기의 노력한 것에만 고집하고 하나님이 계획하는 성전 짓기는 붕 떴지요.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왜 하나님께서 성전짓기를 이스라엘에게 고집을 부리시고 자기 백성을 성전 지으라고 빈터에 70년동안 비어있던 그 약속의 땅에 왜 보내셨는가? 그것은 바로 성전의 연대기가 있어요. 성전의 연대기.
솔로몬 때의 성전은 건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7절에 보면 “너희가 산에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 건축 구조물에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는거에요. 근데 솔로몬의 열왕기상 6장에 나오는 그 솔로몬 성전은 근처 산에서 나무 해가지고 짓는 성전이 아닙니다. 백향목이라 해서 레바논에서 수입품이에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고급품 목재를 써서 화려하게 성전을 짓는겁니다.
그런데 지금 학개를 통해서 “너는 근처 산에서 나무해다가 지어라” 이 말은 “처음에 지었던 화려했던 성전 너 때문에 날라갔잖아. 너 때문에 전부다 불타버렸잖아” 라는 것을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처 나무를 하면서, 성전을 지어가면서 왜 성전, 하나님이 원했던 성전이 왜 불타버리고 왜 부셔져야 하는가를 주님께서는 새롭게 그들에게 인식시키는 겁니다.
이 말은 아주 어렵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현재의 성전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전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그만이 아니냐”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없는것보다 더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전 짓게하는 거에요. 자, 여기를 0(숫자)이라하고요 그 위를 플러스의 세계, 있음의 세계. 0에서 내려가게되면 0은 없음의 세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강제로 끌어 당기는 세계는 뭐냐? 있음의 세계 밑 그 바닥에 있는 없음의 세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없음보다 더 있는 것, 없음보다 더 아래에 내려가는 것, 마이너스 삶이죠.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을뻔한 세계, 그 세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당기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성전의 연대기 때문에 그래요. 성전은 없는데서 만드는 것이아니라 없음보다 더 낮은 데서 성경이 계시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없음보다 더 낮은 장소, 그게 뭐냐? 이스라엘에게 성전이 없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성전을 핍박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저주 받는 민족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겁니다. 없음보다 더 낮은곳은 뭐냐하면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그게 욥기에 보면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욥기 3장 1절에보게되면 1절에서 5절까지 굉장히 깁니다. 긴데, 제가 빨리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욥이 입을 열어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자를 배었다하는 그 밤도 그랬었더라면 그날이 깜깜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날에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에 자기것이라 주장하였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었었으면 낮을 깜깜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쭉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나한테 훨씬 좋았다 이 말이죠. 내가 아예 없는 존재가 되게 되면 나는 더 좋았는데 이거는 없음보다 더 있음, 없음 밑에 있는 있음. 어떻게 태어나서 없음보다 더 구질구질한 인생을 왜 살게 하십니까 하나님. 없음보다 차라리 없는 자가 나을 정도로 왜 처참한 망가진 인생을 살게 하십니까? 왜 저로하여금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라고 느끼게 하십니까? 그게 욥기 3장 1절에서 3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스라엘은 성전의 부재, 없음이죠, 성전의 부재로서 뭐 성전 없는데 이제는 성전 없음에 적응해 가는거에요. 그럼 뭐냐? 자기의 생활 터전, 집이나 짓고 농사나 짓고 과수나 키우고 소나 키우고 양이나 키우고 그렇게 사는 것 그게 속 편하다는 거에요. 그러면 메시아는요? 이스라엘이 고대한다는 구원자 메시아의 약속은 어디있습니까? 안중에도 없어요. 내 몸만 편하면 되지 메시아하고 나하고 뭐... 하나님이 뭐 메시아가 우리한테 해준게 뭐가있는데요? 하나님 우리가 메시아 기다려서 이익본게 뭐가있는데요.
이 이스라엘이 자기 몸 하나 약속의 땅 안에 고향에 돌아와서 고향에서 복사꽃 피는 고향에 돌아와서 옛날 정을 생각하면서, 물론 후손들이죠, 그렇게 선배들처럼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이거는 뭐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실망심이 컸어요. 실망이 커서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매달리기보다는 나한테 매달리는게 났다는, 그게 실속있다는 계산이 선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하면 하나님은 악마가, 악마를 가지고 타락한 천사라고 하잖아요, 타락이란 것은 떨어지는 거에요. 유다서에 신약에 보면 나옵니다. 악마가 하늘에 있는 천사가 땅으로 떨어진 그 경로를 따라서 주님이 쫓아오시는거에요. 악마가 타락한 경로를 따라서.
그러면 그 타락한 길을 왜 따라 오셔야되는가?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된 자기 민족 백성들이 그 악마의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에 건져내기 위해서 오시는거에요. 건져내기위해서 오는 길, 그 길이 성전이 이 땅에 등장하고 변천하고 연대기를 갖는 그 경로를 뜻합니다. 성전은 왜그러냐면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는 장소와 성전이에요. 그래서 쏙 집어넣는 거에요. 성전을 하늘에서 땅으로 쏙 집어넣게 되면 거기서 지옥 속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성전을 하나의 성전 장소를 백성을 건지는 장소로 삼는겁니다.
“악마의 집에 있던 너희들이 성전 속으로 들어오면 된다.” 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와 부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나란히 서로 아는 사이고 친한 사이죠. 바로앞에 있었으니까. 근데 한쪽은 지옥가고,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 갔어요. 죽고 난 뒤에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건너 올 수도 없어요. 보기는 보이지만 건너올 수 없는 사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겁니다. “부자가” 거기서 부자가 살던 그 부자의 행세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면 그게 지옥되는 겁니다. 부자가 했던 이 세상이 어디로 통하느냐, 지옥과 통하는 세상에 부자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그냥 무심코 산거에요.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그만 아니에요. “이래 살다 내가 없어지면 그만이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없어짐보다 더한 게 있어요.
그러면 이 땅에서 이미 거지 나사로는 천국, 부자는 지옥 간다면 그 부자 입장에서는 이 땅이 있을 때, 기회 있을 때 부자에서 거지 나사로로 건너와야 돼요. 왜? 그때는 건너 올 수가 있었거든요. 못 건너갑니다. 못 건너 가는게 아니라 건너갈 생각이 전혀없어요. “내가 뭐가 못나가지고 저 거지처럼 살아야돼?” 어느 누구도 거지 나사로를 선택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지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이 놓치는게 있어요. 뭐냐하면은 타락한 천사거든요. 위래있던 천사가 아래로 떨어지는 그 떨어졌다는 그 사실을 누구만 아시느냐하면 하나님만 아셔요. 근데 그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가 그걸 뒤 따라 와가지고 이스라엘 내부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지옥 같은 악마의 세계와 통하는 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신 거에요.
엘리베이터보면 통로 있잖아요. 위에서 엘리베이터가 위에서 그냥 딴 것은 이렇게 다 층들이 있지만 엘리베이터에 있는 것만 층들이 없어요. 그냥 위 아래로 왔다갔다 해요. 그 통로. 깊숙이 감추어진 어두운 통로. 그 통로를 성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지옥속에 이스라엘 속에 박아넣을려고 하시는 거에요.
근데 그 통로에 그러면 그 통로가 성전이라면 그 성전으로 건너가면 되지 않겠는가? 근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그 통로로, 그 성전에서 그렇게 성전 지을려고 한 것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짓고 자기 안일에 자기 생활하는데 거기에 정신이 다 팔려가지고 성전 지으라는 주의 명령을 “이건 하나님의 일이지 내 일이가?” 하는 식으로 왜 거부하느냐?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알려주는 방식이 이사야 45장에 보면은 나옵니다. 이사야 45장 1절 나오기 전에 그 전에 구절. 이사야 44장 28절을 먼저 보게 되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하고 45장 1절,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그가 성전을 짓게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기름부은자 고레스라고 했어요. 기름 부었다는 말은 그리스도, 메시아를 이야기합니다. 메시아
이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을 함락시킨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그 제국의 후손이에요.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했거든요. 그 멸망한 그 다음 제국이 페르시아, 바사 나라인데, 바사나라의 첫째 왕이 고레스에요. 그러니까 같은 이방 민족이에요. 여호와 모릅니다. 지금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고레스는 여호와를 믿는 자가 아니에요. 오히려 다른신을 믿죠. 다른 우상을 섬기죠. 우상을 섬기는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함락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 고레스왕, 저 이방나라 철천지 원수지요. 왜, 살기좋은 그 약속의 땅 쫓아내고 성전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 다 불태웠으니까 철천지 원수지요. 그 철천지 원수를 하나님께서는 바로 메시아로 만들어버리는거에요. 이것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굉장히 모욕적인 거에요.
더구나 솔로몬 성전은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새로 지은 성전은 근처 산에서 그냥 아무 나무 가지고 성전을 지어요. 이것도 모욕적이에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에스라 1장 8절에서 11절에 나옵니다. 그 에스라 1장 8절에서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그 고레스 원년에 성전지으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동안 그들이 그 선조되는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뺏아왔던 은그릇 금그릇들이 있어요. 성전에 사용했던 제기들, 제사드리는 기구들, 여러 가지 그릇들.
이 그릇들은 여호와가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우리 마르둑 신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전리품으로 그것이 바벨론 나라에 창고에 있었던 겁니다. 빼앗긴 거에요. 그 창고에 있는 빼앗긴 그 그릇까지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통해서 세스바살에게, 여기에 1장 8절에는 세스바살. 스룹바벨 이야기에요. 스룹바벨. 이름 뭐 같은 사람이니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성전 보내면서 그릇이 있는데, 그 9절에 보면 “그 수요가 금반이 삼십이요 은반이 칠천이요 칼이 이십구요 금대접이 삼십이요 그보다 차한 은대접이 사백 열이요 기타 기명이 일천이니 금 은기명의 도합이 오천 사백이라.” 사로잡힌 인간들과 그 전리품을 가졌던 성전의 기구까지 같이 그 이방신을 섬기는 것.
그 이방신을 섬긴다하니까 잘 납득이 안가는데, 동화사에서 예배당 지으라고 피아노하고, 이 강대상을, 그것도 전에 빼앗아 왔던 것을, 강대상 지으라고 준거에요. 그러니까 그걸 줄 때 이방 민족, 고레스왕의 입장에서는 뭐냐, “백날 너희들이 성전 지어봤자 나의 힘을 이기질 못한다. 내가 성전 짓고 여호와 섬겨봐야 나의 마르둑 신 아래에 있어” 라는 어떤 모욕적인 모습을 주는거에요.
그럼 이거는 아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럽고 비참한 거에요 이 상황이. 하나님이 성전짓게하는게 아니고 메시아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는게 아니고, 이방의 수장, 이방 민족의 머리가 되는 수장이, 정복자가, 우리를 이미 이겼다 확정된 정복자가. 우리는 거기에 종이고 노예다 라는 것을 확정된 관계 속에서 그 이방인의 모욕한 이방인이 성전 지으라 했을 때 그 성전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모욕적이냐 이말입니다.
이것을 그 모욕적인 것을 하나님께서 왜 이방 민족을 고레스를 메시아로 해서 왜 지으라고 독촉하느냐 하면 이런겁니다. 만두 속에다가 독한걸 집어넣어가지고 만두를 먹게해요. 만두를 먹게 하니까 만두 먹다가 만두 속이 너무 역해서 만두도 토하고 어제 저녁, 점심 먹은것도 다 토하죠. 지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안일에 빠져있어요. 자기 삶, 자기 편안한 인생 사는데 그들이 인생 살면서 그들이 성전 불탈 때 그들이 하나님께 모욕감을 주었고 성전 불태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 몸하나 잘 건사해서 잘먹고 잘 살면 뭐 나중에 메시아 오시겠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거에요.
그래서 너가 하나님에 대해서 우상을 섬기고 모욕감을 주었다는 그 사실이 내안에 들어있는걸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주께서 강제로 그걸 끄집어내는 거에요. “니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게 들어있다”라는 것을 강제로 끄집어내는거에요. 그러니까 너는 너랑 놀지마라는 뜻이에요. 너랑.
자, 이 예가 별로 와닿지 않는다면, 좀 더 심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형사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체포했어요. 그 살인 사건이 사람을 죽일 때 도끼, 칼로 아주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근데 그 용의자는 사람 죽여놓고 자기는 술 취해가지고 기억나지 않는다 해서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거에요. 형사가 끈질기게 추적해가지고 드디어 자기 집에서 그걸 체포해서 경찰서 취조실까지 끌어당겼어요.
그래가지고 “저는 조용하게 사는 평범한 시민인데 왜 저를 이렇게 체포합니까?” 그러니까 형사가 “당신 집에있는 벽장에 그 죽은자의 피묻은 버린 옷이있고 그 혈흔이 있어가지고 DNA 조사를 해보니까 당신 옷에 묻은 혈흔과 피해자의 혈흔이 도끼를 찍을 때 피가 튕겨가지고 동일한 피였다.” 하면서 부시럭부시럭 하며 책상위에 도끼하고 칼을 내놓는거에요. 그러면 그 도끼 칼을 보면서 범죄자는 자기가 과거에 했는것에 대해서 기억이 새롭게 회상되겠지요.
“내가 술먹고 왜 이런짓을 했어, 내가 미워. 나는 그 시절 잊고싶어. 내가 왜 내한테 이렇게 잔인한 성품이 있었는가 난 몰랐어” 끄집어내지요. 그 참혹한 모습. 이방 민족에게 사정없이 성전이 불타버렸던 그 증거가 이방민족에 그 전리품 창고에 예루살렘 성전에 솔로몬 성전에 있어야 될 그 제사 기구들이 금그릇 은그릇들이 그 이방 민족 제단을 이방 신을 섬기는 그 창고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거는 도끼하고 칼 같은 거에요.
“니가 그런짓 했잖아.” “하나님께서 너와 만나기 위해서 만남의 장소가 이렇듯 너희들의 우상숭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났잖아.” 그 참혹한 다시 기억하기 싫은 그 기억을 다시 되새기는 거에요. 그게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주님께서 솔로몬 성전을 만들게 했지만, 주님께서 그 성전을 떠나버렸어요. 꼴보기 싫어서 떠나버렸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도끼, 칼을 제시해서 “아, 우리가 문제있다” 는 것, 우리 속에 역겨운 것, 토해 내야될게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고레스 선지자, 이방 민족의 수장. 그러니까 동화사 주지이지요. 동화사 주지를 통해서 하기도 싫은데 이제 지배 아래에있으니까 강제로 성전을 지어야 될 입장에 그런 처지에 이스라엘 백성이 놓여 있었던 거에요.
추접고 더러운 성전. 이방신에 놀아나는 성전. 모욕적이고 옛날에 솔로몬 것 하고 족히 비교도 안되는 아주 천하디 천한 성전을 니 손으로 다시 그걸 만들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 메시아라는 거에요. 기름 발린자. 기름부음을 고레스가 했다는거에요. 그러면 왜그러냐 하면 진짜 고레스말고 기름발린자 말고 진짜 메시아가 이렇게 오신다는 겁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서 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분의 채찍 맞음이 없으면 우리에게 나음이 없다는 거에요 이 채찍 맞는 분.
이거는 도끼에 피묻은 거죠. 칼에 피묻은 거죠. 앞으로 니가 메시아를 이렇게 채찍을 때리고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때리고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에게) 고난을 안기는 그런 요소가 니 속에 들어있다는 거에요. 주께서 성전을 만들라하고 그 성전이 그 인간 손에서 만든 그 성전이 여지없이 또다시 다른 이방 민족 바빌론 민족의 후손에 의해서 여지없이 다 깨어질 때, 성전은 하나의 인간 손으로 지었던 성전은 가상이고 환상에 불과하고 성전을 그 환상에 불과한 성전을 짓게 한 너도 환상이 되는 거에요.
주님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속에 약속했던 하나님의 백성의 만남의 장소를 이제 남아있는 이스라엘이 무너지게 하면서 그 무너짐 속에서 새로운 성전을 주께서는 이끌어 내십니다. 그런데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메시아가 해요. 어떤 메시아? 찔리는 메시아.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찔리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징계를 받고 우리를 위하여 채찍을 우리를 낫게하기 위하여 채찍에 얻어맞는 그런 메시아께서 성전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옵니다.
그럴 때 인간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그 메시아하고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생각하고 언약을 생각해서 보낸 메시아 사이에 엄청난 괴리현상이 일어난다는거에요. 전혀 메시아의 개념이 차이나도 보통 차이나는게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새로운 메시아 완전한 메시아를 하는 재료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백향목이 아니고 이제는 나무 종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전에 건축물로서의 성전은요, 나중에 세월에 매질에 견디질 못하고 다 쇠퇴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이게 신약성경의 연대기를 보면, 신약성경을 보게되면, 학개 선지자 재건한 것은 다시 다 불태워지고 뭐로 발전 하느냐하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전이 동시에 등장해요 신약에는. 하나는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국가를 내부적으로 결속하고 다지기 위해서 헤롯이라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성전을 기다리고 메시아 기다리는 그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야, 참 이방인인데 우리가 원하는 성전과 메시아 기다리라고 이 거대한 성전까지 지어주네?” 고마움을 표시하는 거죠. 이게 인간들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이방인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역겨운거지요. 왜? 사람 손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자기 집을 지어요. 하나님께서는 니가 나무해가지고 근처 산에서 나무 해가지고 성전 지으라 하는 겁니다. 기존에 이때까지 오는 성전은 사람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성전을 짓게 하는 거에요. 그거는 지었던 자가 성전이 무너지게 된 원인 제공자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자기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을 갖고있는가? 인간은 있음의 세계 다시 설명하면 플러스 세계. 0이 돼서 살아지지 않고 0 위에 있는 세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 살아남았다 여기에 매진하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있어요. 그러나 그 성전이 메시아를 보내서 만들고자하는 성전,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는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가 부재의 세계, 없음의 세계 아래쪽에서 만드는 거에요.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가는거에요. 지하로.
그러면 있음을 고집하는 인간들에게 매 맞아 죽어야 되는거에요. 누가? 메시아께서. 단지 없음 정도가 아니고요 저주 받는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나랑 만나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들은 그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들 이야기가 본성적으로 튀어나오게 돼 있어요. 사람들이 이렇게들 이야기하는 그 본성에 대해서 놀랍게도 창세기 4장에 벌써 나옵니다. 4장 9절.
가인이 있고 아벨이 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여놓고 한 말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니 동생 어떻게 했냐?” 라고 물었어요.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메시아가 사람 손에 맞아 죽게 되는 하나의 인간의 짝으로서 메시아를 보내신 거에요. 그 메시아가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우리와 같은 몸. 죄된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죄된 몸으로 오셨습니다.
아무도 그 메시아가 지녔던 죄된 몸을 아무도 지킨 자가 없었습니다. 가인은 아벨로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아벨이 귀한 줄을 몰랐어요. 누가? 가인이. 우리가 죄된 몸으로 오신 심판받는 예수님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나한테 하자가 없고 이 몸 건사하고 이 몸 괜찮은 몸으로 유지하고 키우는 데 전념하기 때문에 그래요. 마이너스의 인생이 아니고 플러스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거기게 머물고자 했던 것이 모든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안에 이미 타락한 천사 악마의 본성이 가인을 다렸던 가인을 지배했던 그래서 동생을 죽일 수 밖에없는 가인을 지배한 그 힘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악마가 강하게 붙들고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게 참 주님의 절묘한 방식인데요. 자 부자가 거지 나사로로 건너올수 없습니다. 가인은 아벨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성전은 왔고, 그 성전에 자기 백성을 모집해서 이 세계에서 탈출해서 천국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야 되는데, 아무도 건너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 쪽에서 자기 희생타를 제시해 버려요. 그 예가 바로 사울에게 터졌어요. 사울이란 사람이 자기는 아무 문제 없이 하나님 믿는 교인들. 하나님 믿는 그 성도들을 잡아다가 핍박하고 고난을 줬어요. 그때 사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에요. 자기 생각에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그렇게 신나게 핍박하고 잡아 낚아챌 때 그 때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났죠.
그리고 사울보고 이야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나를 핍박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이 땅에서 억울하게 핍박받는 사람으로 이 땅에 나타나게 하셨어요. 핍박받는 사람. 그러니까, 핍박한다는 말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예수를 미워하는구나” 하는 거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미워해요. 사랑은 끌어당기는거고 미움은 밀치는 거에요. 우리 일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애 유치원 가는 것만 고민이 되지 예수님 밀어내는 것은 전혀 우리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사랑에 대상, 항목에서 우리는 늘 빠져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일상이 주님을 핍박합니다. 왜그러냐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끌어당기는 것은 그것은 내가 나의대한 모욕감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나에 대한 극한의 모욕으로 느껴지는거에요.
“내가 뭐가 못나서 죽어야 돼? 안되지. 난 더 살아야돼. 그것도 멋들어지게 살아야지.”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찾아온 것은 우리에게 독이든 만두를 먹여서 만두도 토하고 우리 속에 내가 헤어지지못했던 격하게 메시아를 미워하는, 악마의 마음이죠, 그 악마의 마음까지 우리로 하여금 욱 하고 토해내게 만드는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예수님 좋아했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2장 20절에서 주께서는 성전을 통해서 그들이 역한 것을 끄집어냅니다. 2장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채찍에 맞고 자기 백성에서 고난 받는 그 말씀을 그동안 계속 해 왔던 거에요. 왔는데 제자들은 십자가 죽고 부활할 때 까지 예수의 말을 전혀 이해를 못하고 받아들이질 않았어요. 마치 사울처럼. 나는 멀쩡해야된다는 거에요. “내가 왜죽어. 내가 왜 가난해. 내가 왜 아파해야돼. 내가 왜 인생 망쳐야돼?” 그럼 주님은? 주님은 왜 십자가 졌습니까?
“그분은 그분 일이고 나는 내일 따로 있잖아요” 이렇게 되잖아요. 따로 되어 있어 버리면 만남이 안되지요. 따라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지’라는 악한 마음을
십자가의 능력이 와서 이게 내가 몰랐던 내가 헤어져야 될 나구나 이제는 나랑 놀면 안되고 주님과 같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그 우리의 몸을 뭐냐하면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성전의 연대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가기 싫은데 우리는 가고싶지 않지만 주께서 강제로 천국 데려가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 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싫어함과 배척을 일상을 통해서 수시로 끄집어내시는 바로 이곳이 주께서 작용하는, 일하시는 성전인 것을 이제는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