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3:18-20 / 절기의 완성

정인순 2023. 5. 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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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의 완성

 

이근호
2023년 5월 10일               

 

본문: 스바냐 3:18-20

(3:18)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

(3: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잔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3: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출애굽기 23:14-17에 보면,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기란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더불어 ‘하나의 존재성’으로 묶기 위해 제시된 원칙입니다. 즉 너희들끼리 모아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자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마저 자기 원칙에 예속되겠다고 선언하는 바가 됩니다. 비록 인간들이 이 절기를 위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어이 이 절기 취지를 완성해내고 말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최종적인 절기를 제시하십니다. 일단 ‘수치를 당한 모든 이스라엘은 모여라’입니다. 수치란, 인간이 하나님에게 범죄했을 생기는 마음의 현상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쳐도 인간쪽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민족과는 달리 특수성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 특수성이란 하나님마저도 스스로 예속된 원칙이 이스라엘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절기입니다. 이는 기어이 하나님과 백성이 일체감을 갖추는 취지는 하나님께서 나서서 성취하게 됩니다. 즉 백성들에게 발생된 수치성에 하나님께서 친히 뛰어들어서 ‘절기 취지’를 그 수치 속에서 진행시켜서 기어어 완성시키십니다.

그렇게 완성되고 나면 인간 속에 뛰어드신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얻게 되십니다. 이 칭찬과 영광은 절기와 완성하신 분과 더불어 있던 자들에게 공유하게 됩니다. 수치→복음(주님 홀로 다 이루심)→영광 이라는 절차가 수립되는데 이 수립성에 자기 백성들도 함께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제안을 반겨서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인간은 하나님의 작업절차를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치스럽게 되고 싶어서 극단적인 수치에는 이르지 싶지 않고 더 나아가서 무엇이 극단적인 수치인지 그 자체를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항상 노리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뭔가 혜택을 입을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보험회사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고객들은 보험회사로부터 무슨 혜택을 얻어낼까를 생각합니다. 이런 성향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풍랑이나 바다 한 복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도움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새삼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저분은 어떤 분인가?”라고 말입니다.(마 8:27) 인간들은 본성상 자신의 수치를 들키고 싶어하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보다 더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 애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개인적으로 수치스럽지 않으려는 자들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집단을 만드십니다. 그 방법은 유일하게 인간의 수치를 경험하는 분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자신이 실망스러워도 끝까지 자신을 버릴 마음은 없습니다. 비록 남들에게는 수치스럽지만 그것마저 자기에게는 ‘의로움’으로 간직됩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부자청년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 온 것이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오면서 영생에 관한 정보를 좀 더 확보할 요량으로 온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모든 돈을 버릴 용의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이 없다’는 사실이 곧 자신에게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사태라는 평소의 생각이 들통나 버렸습니다. 그는 부끄럽지 않는 자아가 되기 위해 예수님 면전을 떠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義)’입니다. 자신의 수치를 알아야 수치 →복음→영광 노선에 접을 들 수 있는데 결코 인간은 온전한 자기 수치를 알 길이 없습니다.

수치스러울만 사태가 일어나면 얼른 입을 다물고 수치를 속으로 감내면서 그 자체를 자기 의로 보존하려고 합니다. 꾹 참는 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말입니다. 제자들을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수치에서 영광에 이르는 절차에 들어갈 자격자는 인간 중에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지 못할 수치의 극단을 십자가에서 체험하셨습니다. 이 수치스러움에 대해서 세상의 모든 이들은 거부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의를 계속 키우는 식으로 버티기 때문입니다. 즉 잘난 게 많아지면 덜 수치스러운 인생이 된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경험에 넘어선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절기의 완성이란 집단화된 그들이 단일 주체 이름으로 형성된 것을 뜻합니다. 이는 그들 내부에 하나님의 의가 생산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고 설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기에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롬 8:1)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압니다. 자신이 죽을 육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이렇듯 성도가 되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예수 안’이라는 소속원으로 일하는 겁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왜 자신이 죽을 자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육신이 지독스럽게 수치스러운 몸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악마나 율법이나 죄의 종이 아닙니다. 영광스럽게도 하나님의 아들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종에서 자유자가 된 겁니다.(롬 8:15-1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말한 직업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직장을 가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정대은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3장 18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찌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특별하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다른 나라에는 장치가 없는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장치가, 그 설비가 갖추어져 있어요. 그 설비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그게 18절에 나옵니다. “내가 대회로 모인다.”

대회라는 것은 큰 모임이라는 것인데요. 다들 모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남자들은 다 모이라는 뜻입니다. 그걸 보통 절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출애굽기 23장 14절에서 17절에 보면 “매년 세 번씩 삼차에 걸쳐 절기를 지키라”라고 하면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하나님께서 거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그렇게 돼 있어요. 좀 보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이게 되면 장소가 필요하겠죠. 그 장소는 넓은 곳이라는 의미의 장소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준 것이 있어요. 그게 설비고 장치입니다. 이게 다른 민족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엄청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다른 민족에는 하늘과 땅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든 그 장치라 하는 것은 인간들도 거기에 예속 받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도 스스로 만든 만남의 장치에 스스로 예속이 됩니다. 하나님이 예속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제한을 하신다는 거에요. “나 하나님이니까 마음대로 한다” 라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벗어나면 이거는 나답지 않다”는 조건을 스스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 설비로서, 장치로서 그 안에 장착시켰다는 거에요.

따라서 이점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께요. 어떤 사람도 그 보험회사에서 가입하면서 보험회사가 무엇인가, 그걸 뭐 골똘하게 파고드는 사람은 일반인 가운데 별로 없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한 사람 이외에는 별로 없어요.

경제학도 그 분야에 대학원에 대학원 논문 쓰려고 하는 사람같으면 보험회사의 종류, 보험회사의 설립하는 방식 이렇게 있는데, 사람들이 보험회사에서 관계하는 것은 보험회사로부터 무슨 혜택을 얻을 것인가, 거기에 치중해서 보험회사를 생각하죠.

그렇죠? “어떤 혜택을, 내가 어떤 혜택을 얻을 것인가”에요. 인간들이 그런것처럼,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냐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혜택을 얻을 것인가?” 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많아진거에요. 보험회사가 그렇게 많아진 겁니다. 교회라는 보험회사가 그렇게 많아진거에요.

무슨 혜택을 얻을 것인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간다. 죽어서 천국가는 것은 그거는 기본적인 계약조건이고 거기다 기도하게 되면 보너스로 복을 얻는 것. 가정이 화목하고 가정이 행복한 것, 소원들이 이루어진 것, 그거하나 약간에다가 거기다 더 조건을 붙여서 그럼 이제 보험금이 약간 올라가요. 또 십일조 해야되기 때문에 약간 올라가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그래요.

그런데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은,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라요. 그 신약에 예수님의 제자는 인간, 일반 인간들이 알던 그 하나님 메시아와는 다른 메시아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는 제가 처음에 말한 것과 그대로 그 원칙이 적용돼요.

뭐냐하면, 하나님 스스로 예속이 되는, 하나님이 누구보고 일방적으로 닦달내는게 아니고 본인도 본인에게 닦달낼 수 밖에없는 일방적인 조건 자체를 그 제자들 속에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조건에 본인도 달라짐이 없음을, 일관성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준거에요. 이랬다 저랬다 하는 하나님이 아닌거에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조건 바꾸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겁니다. 스스로 조건을 바꾸죠.

그 조건, 그럼 제자들은 그런 조건에 대해서 뭐 사실은 관심 없고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저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금 어떤 도움을 주며 우리가 죽고난 뒤에 어떤 도움을 줄 것 인가 거기에다가 신경을 쓰고있는 거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십니까? 라는 그런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고의 그 출발점을 뭐로바꾸냐 하면은, “하나님이 누구시죠?” 라고 바꾸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작용해요.

그 예가 마태복음 8장 27절 그 언저리에보면 예수님과 함께 가는데 풍랑이 일었어요. 예수님이 없는데 풍랑이 인게 아니고 함께 가는데 풍랑 일었어요. 참 중요합니다. 예수를 안 믿는게 아니고 예수 잘 믿는데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가정에 우한이 들었다 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풍랑이 이니깐 제자들은 예수라는 이 보험회사에 은근히 기대를 하는거에요.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주님, 우리 죽겠습니다.” “풍랑에 휩쓸려서 배 뒤집어 죽겠습니다.” 주님은 말씀은 안 했지만, 속은 이러해요. “어쩌라고.” 그 어쩌라고를 주님께서는 어떤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면 주무시는 것으로 보여줬어요.

지금 난리가 났는데, 제자들은 난리 났는데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그러니깐 제자들이 강제성을 동원해요. 뭐냐? 깨워라. 깨우자. 왜 죽게 되었으니까. 예수님이라는 든든한 보험을 보험의 혜택을 입어야 될게 아닙니까. 인간에게 신이라 하는 것은 혜택 주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거든요. 이건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 믿고 뭐 얻어 챙기는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다니는 거니까. 제자들이 깨웠습니다. “죽겠나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풍랑과 바다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먼저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다음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나무라고, 이번엔 누구를 나무랬느냐, 풍랑과 바다보고 나무라는겁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두가지의 인간의 한도를 넘어서는 그런 체험을 하게 돼요. 하나는 무생물이 인간을 공격하는 생물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요. 바람과 바다. 바람. 공기의 흐름이죠. 산소 21.9% 질소 해서 구성되어있는 이 공기가 무생물입니다. 근데 공기가 인간을 그 공격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거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공기가 움직인다. 그거는 어지간한 종교에 다나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꾸짖음의 대상의 된다는 것, 꾸짖는다는 것은 이건 뭔가 어떤 인격을 갖췄을 때 꾸짖음도 같이 성립되는 거에요.

집에있는 개도 막 꾸짖잖아요. 약간의 개도 시근이 있는거에요. 꾸짖으니까 듣는거에요. 꾸짖어도 말 안 듣는게 있어요. “나도 성인인데” 이래가지고 돈 제 마음대로 갖다쓰는 것은, 그건 말도 안되지만, 첫째는 뭐냐, 무생물이 유일하게 생물체라고 여기는 인간을 공격한다라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이거는 생각지도 못한거고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여기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렇게 돼있어요.

어떤 혜택을 줄 것이냐에 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익히 안다고 여겼던 그들이 졸지에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부터 새로 알아가야될 대상이 된겁니다. 예수님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를 패는 타인이 아니면 그 타인은 진정한 나의 이웃이 아니다는 뜻이에요. 나를 팬다는 말은 앞에다 뭐하나 단어 넣으면 돼요. 줘 팬다.

나를 줘 패지않는 이웃이 아니면, 진정한 이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의 이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자가 있으니까, 그 하자가 자기가 눈치챌 수 가 없어요. 하자가 있으니까 하나님을 대할 때 뭐냐하면 “얘야 니 기도 해라 혜택입게” 맨날 혜택이래. 어디 뭐 하나님이 어디 보험회삽니까? 맨날 혜택, 혜택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노선바꾸는 거에요. “주여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겠습니까” 라는데서, 왜 나는 무엇이 주님을 아는데 방해되었던가. 무엇이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아는데 훼방하게 되는가? 무엇이 나를 훼방하는가, 방해하는가? 제대로 주님을 못보게 만드는게 뭐냐.

오늘 스바냐 본문이 그거에요. 스바냐 본문은 뭐냐. 18절에 내가 절기로 만났는데, 그 절기를 만나면서 거기서 주님께서 이게 스바냐를 통해서 한소리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너희들 지금 수치 당한다. 집단적으로 수치 당한다. 모여라. 수치당한 인간들은 모여라.”

그다음에 이야기가 뭐냐. “수치를 당하지만 나의 너희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너희대신 복수해주고, 너희들이 칭찬과 명성을 얻게할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주께서 수치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모으시는 거에요.

다시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과 다른민족의 차이점은,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는 민족에게만 머물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유일하게 지시를 주면서도 그 지시를 고정화시키고 계속해서 그것을 유지 시켜서 그 지시에 대해서 완성할 수 있는 설비와 장치, 그 장치에 대해서 심지어 말씀하시는 예를 던지시는 하나님 자신도 그 장치에 종속되고 예속되고 매이는 식으로 확정된 일을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면서 모이라는 겁니다.

대회로 모이고, 절기로 모이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여라, 너희들은 수치를 당하고 있다, 근데 너희들은 나중에 수치는 없어지고 칭찬받는 그런 집단이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은 수치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칭찬받는 사람으로 전환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예언은 어떻게 달성되는가?

모여라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수치와 수치를 경유해서 아버지로부터 칭찬받는 절차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하나님께서 그 절차, 자기가 세운 그 절차 속에 자기가 같이 끼어들어버려요. 모임 속에 주님이 스스로 끼어들어서, 주님도 자진해서 수치를 당하시고 수치에 의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받고 칭찬을 받는 분으로 승화가 된, 주님이 받은 그 수치가 승화가 되면서 주님이 모여라는 예언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덩달아 예수님이 얻었던 그 영광에 합세하는 혜택을 입게되는거에요.

그러면 이게 하나의 노선이 드디어 정의되었습니다. 수치 들어간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수치에 합류했으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시면 그게 복음이 돼요. 수치에서 복음, 복음에서 그다음에 아버지께 주가 되시는, 인정을 받게되는 영광스러움. 수치에서 복음, 복음에서 영광.

이 절차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그 아까 그 출애굽기 23장에서 이스라엘 대표 이스라엘 각 가정을 대표하는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절기로 모여라는 것, 절기에 관한 규례. 절기에 대한 그 지시가 장차 예수님이 그 절기라는 율법의 친히 자진해서 뛰어듦으로써 모여라는 모임에 완성을 이루시는 거에요.

근데 그 완성이 되게되면 뭐냐. 그 모임은 처음에는 수치스러운 모임이었더라도, 나중에는 거기에 뛰어든 예수님 때문에 영광스러운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이 세상의 유일한 민족이 되는겁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절차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이제 감 잡았죠.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스바냐가 할 때에, 우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 참 좋은 이야기네. 이야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 주여, 믿습니다. 주여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왜 그러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이로부터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그점을 놓치면 안돼요. 예수님은 모든 이로부터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어제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거지 나사로가 모든 이로부터 선택되지 못한 사람이 거지 나사로였어요.

따라서 죽기 전에 천국과 지옥이 갈라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나사로가 죽기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거지나사로 근처도 안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이땅에 천국과 지옥은 이미 구분되고 있었던 겁니다.

“천국은 가봐야알지.” 아닙니다. 아무도 유일하게 이 땅에서 그 누구로부터 선택되지 못한 대상자를 주께서는 하나님의 자기 아들로 그 역할을 하라고 보내신 거에요. 그리고 심지어 제자들 마저 주님을 선택하지 않고 그 당시에 권력을 선택했습니다. 이거는 타고난 거에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성질이 썩었다는 거에요. 성질이 썩은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구약성경에서 어떤 하나님의 조언, 기쁜 소식을 줘도 인간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하느냐,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는 이 수치, 기쁜소식, 복음, 그다음에 영광으로 통하는 이 절차에 주님께서는 강제로 그들로 하여금 집어넣는 작업이 그 작업을 주께서 또 손수 나서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특징이나 오늘날 성도의 특징이 뭐냐하면, 직장은 있으나, 직업이 없는 사람을 만들어요. 직장은 있는데 직업이 없어요. 이 무슨말이냐 하면, 일은 하는데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해요. 이 땅에는 “니 요즘 많이 노는구나” 이렇게 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비추는데 바빠. 직업이 없는데 주의 일 하기에 바빠요. 성도가, 제가 전에 그랬죠. 성도는 없다고요.

성도는 없는데 주께서 자기가 설정한 그 설비, 장치 율법에 의한 장치가, 그 설비가 되게 되면은 그 공장은 멈추지 않아요. 가동되죠. 가동되면서 생산되는 것이 성도에요. 성도, 성도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완성된 내용이 포함돼있는 자를 성도라고 해요. 더 이상 내가 손댈 필요 없는 인생. 비록 나지만, 더는 나에게 어떤 추가적인 손을 댈 필요 없는 완성품으로 제조 하는 그 공장은 주님의 율법, 오늘 본문같은 예를 들면 절기, 그 세 차례의 절기라는 공장을 통해서, 그 기계설비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담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그러면, 성도가 직업은 없는데 직장은 있다. 주의 일을 한다. 그럼 무슨 일을 하는가? 수치를 느끼는, 수치를 감지하는 일을 해야돼요.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열심히 자기 딴에 하나님일을 한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17절부터 쭉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왔다” 부자 청년이 온거에요. 그 사람이 자기가 어릴 때부터 뭘 지키느냐? 십계명을 다 지킨거에요. 그러면서도 자꾸 부족을 느끼는 거에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무슨 부족을 느끼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켰는데 이 지킨 것으로 영생을 얻을까에 대해서 자기가 확답을 할 수가 없는 결여, 모자람, 결핍을 느낀거에요.

그 점이 본인한테는 뭐냐, 약간은 수치스러운 대목이 되겠죠. 그래서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주님께 온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부자는 다른 것은 갖추어졌는데 영생 부분은 모자라서 “영생 부분은 어떻게 마저 채우면 됩니까?” 라고 관심을 두니까 주님께서는 관심을 어디로 하느냐하면은, 본인이 수치스럽지 않다고 여기는 대목에다가 드론 공격을 시작합니다. “니 부자잖아, 니 그 모든걸 다 가난한사람한테 주고 텅텅 빌 자신 있나?” 라고 묻죠 그럴 때 부자는 비로소 내가 수치스럽지 않는 존재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내가 수치스럽지않은 존재. 그걸 쉽게 말해 자기 의죠. 나는 의롭다, 나는 가치있다, 나는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이길 원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 주장은 스바냐에 나오는 주님께서 “모여 모여 모여 한데 모여 내 앞에 모여.” 그게 절기거든요. 절기는 하나님 앞에 모이는거에요. 모여, 모여, 내 모조리 너희를 수치스러운 민족으로 만들어줄게. 이 내가 너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그 노선에 들어가게 되면 그 끝은 너는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민족이 되는거야, 라고 예언한 것이 오늘 스바냐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은 주님 앞에 나와서 좀 저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해주세요. 이렇게 나온게 아니고,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감춘거에요. 인간이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감춘게 있기 때문에 말을 하는건데요. 뭐를 감추어 뒀냐, 내가 수치스럽지 않는 든든함이 있기 때문에 속사포같이 말을 막하는 거에요. 친구하고 말할 때 전화 한 시간 반하잖아요

그만큼 당당하다 이 말이에요. 당당하니까 말을 하는거에요. 그러면 제가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한 가정이 있는데, 딸은 한 50정도 60쯤 됐는데 혼자있는 엄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 여자분은 직장생활 해가지고 애도 키우고 이렇게 한참 돈들어갈 때 아닙니까 애키우고 뭐 대학들어가고 하고있는데, 어느날 엄마가 이상한 말을 하더니 치매 1급 판정을 받았어요.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프면 온 식구가 골병듭니다. 신체적으로 골병들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아줌마는 여러 가지 이 난관을 해치기 위해서 알아보니까 간병인 제도가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간병인 제도가 있어서 나라에서는 헐값에 간병인이 와가지고 염가로 하는데, 나라에서 해서 염가로 하는데, 그 사람이 그만 출근 퇴근시간이 있네요? 그 사람 일하는 4시간 빼놓고 나머지는 온종일 치매 엄마 옆에서 간호를 해야돼요.

근데 간호를 해버리면 자기가 직장생활을 못하고 그만둬야되고 수입이 없어요. 그니까 수입원을 자기는 직장생활해야 돈을 해야 뭐 이렇게 간병을 댈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면서 처음에는 7만원 하루에 7만원하다가, 코로나 이후에 사람이 없어서 11만원 올라왔다가, 실제로 지금은 15만원, 하루에 15만원 한달에 어떤때 보면 500만원 나갑니다. 그러니까 집에는 악취가 번번하고 집에 경제적으로는 빚더미에 올라앉았어요. 교회 나와서 주여 죄인입니다. 제가 수치당하도 쌉니다. 이거는 말뿐이고, 지금 이게 말로 주여 저 수치당해도 좋습니다. 지금 말로, 그 말로 집구석 가면, 그 말로 교회가서 그거 기도했다고 집구석 가서 해결되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한달에 500만원. 어떻게 매꿉니까? 그렇다고 뭐 돈 없는 엄마 목 조르고 그럴수 없는일 아닙니까? 그때부터 친구한테 전화와도 일찍 끊습니다. 말못해요. 그런데 그분이 스바냐 설교를 들었어요. 수요일날. “맞아 주의 뜻이 그렇구나, 주의 절차를 알았어. 믿습니다 믿습니다.” 했는데 두달뒤에 집에 치매 환자있어요. 그게 무슨소용있어요. 이 스바냐의 말씀이 무슨소용있습니까? 자기는 지금 실제문젠대요. 현실문제잖아요.

친구와가지고, 전화와가지고, “요새 니 뭐 별일없나?” “그래 별일없다.” “뭐 말에 힘이없네?” “컨디션이 안좋네. 일찍끊자.” 전화할 시간이 어디있습니까? 지금 간병인 엄마 치매 걸린걸 돌봐야되는데. 말로는 수요일날 들었어요, 나를 패주는 분이 진정한 타인이고 이웃이라. 아이고 멋있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나 그런 멋있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실제로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는데.

그리고 온 식구가 아픈 사람 있으면 온 식구가 다 짜증나가지고 지옥이 따로없어요. 서로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 무슨 노래같다만... 주로 으르렁거리고 살아요. 웃음기 날아간지가 벌써 몇 개월째 웃음기가 하나도 없어요. 모든 식구가 다 짜증내고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하나님도 귀찮아져. 교회 가는거 다 귀찮아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가. 인간이 주여 저 수치스럽습니다. 수치스럽게 해주셔서 하나님께서 영광 그 참여해주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우리 고백 안 듣습니다. 왜? 우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수치의 끝을 모르는 그게 바로 인간의 오류였던 겁니다.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완전히 SOLO. 나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부자 청년뿐만 아닙니다. 제자들 마저, 그리고 우리들 마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남아있는 것은 스바냐 예언만 달랑남아 있습니다.

자, 이 예언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실제적인 결과물을 낳게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의 우리의 고백을 인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아직도 살만하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아직 집안에 치매환자가 없어서 그래요.

자 그러면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성취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는 수치를, 우리 안에다가 설비, 설치, 설정 거기다 장착을 해버려요. 예수님이 당한 그 수치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 24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오직 예수님만 느끼는 수치에요.

아무도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단 데서 오는 수치감. 거지 나사로.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한 존재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아무도 믿질 않았어요. 아무도 믿지 않는 그것을 우리한테 집어넣고 지금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니가 느끼는 니가 집구석이 엉망이 된 그것을 니가 수치라고 느끼는 그 자체가 너가 해결 못한 너의 그걸 자기 의라고 하는거”에요, 자기 의. 너무 부끄러워서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 못 하겠다고 버티는 것. 그것이 내가 스스로 내가 처리 못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 그게 자기 의에요.

맨날 아파서 정형외과에 가서 치료받고, 연세많은분 자꾸 병원다니면 그 자식들이 좋아하겠습니까? 부모가 돼서 왜 자식들을 걱정시키느냐, 이런식으로 하지만, 자식들은 그것을 내색 안하죠 왜?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수치스럽지 않다는 말은 내가 진정으로 잃어버리기 싫은게 있어요 그게뭐냐 나의 의입니다.

나의 의를 꽉 쥐기 위해서 어떤 수치스러운 모독스럽고 나를 모욕하는 상황이 온다 할 지라도, 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군소리 안하고 묵언수행을 하는거에요. 꼭 입을 다물고. 다 내 탓이오. 천주교에 하는거 있죠 천주교에 그 있잖아요 차뒤에 붙이는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는 저주받아도 쌉니다. 주여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당연히 주님께서는 그 말을 역겹게 듣죠.

자 그러면, 주께서 어떤 인간도 자기를 찾지 않고 선택하지 않는 가운데서 주께서 내민 십자가가 뭐냐. 모이자는 겁니다. 대회로 모이는거에요. 이점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갖고있을때는 자기 의에요. 주님께서는 자기 의를 갖고있는거, 그거 인간은 못버리는 것 아세요. 그걸 그대로 주께서는 십자가 앞으로 오게됩니다. 십자가 오게되면 자기의를 버리는게 아니고요. 십자가 앞에가는 소속이 정해집니다. 그 소속을 사도 바울 편지에서는 뭐냐. 예수 안이라고 하는겁니다.

소속이 돼요, 소속이. 개인은 자기 의를 갖고있지만, 소속이 예수안은, 소속이 돼버리면, 더 이상 우리는 종이 아니라, 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거에요.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그 예수 안에 효과인데요. 로마서 그 8장 1절도 나오고 연이어 10절 이렇게 보게 되면,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걸 달리 표현 해 드릴까요? 절기 안에 있는 자는, 달리 표현 해드릴까요?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달리 표현해 드릴까요? 예수님 십자가 앞에 초청 받은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은, 그 근거가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이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15절에 너희는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문제를 우리가 해결 못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치의 끝을 몰라요. “그래 치매 노인네만 돌아가면 그다음부터는 정상으로 회복할 거야”, 아니에요. 인간은 아무리 해도 내가 내 수치의 원천을 몰라요. 그걸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수치스럽게 되고 싶어도, 수치스럽게 안될려는 것은, 어느 인간도 예수님이 달렸던 십자가에 달린 위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율법의 종이고 악마의 종이고 죽음의 종이고 죄의 종입니다.

마귀의 소속자에요.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래요. 제대로 된 수치는 십자가에 달린 분이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제대로 된 인간의 수치의 극단은 아버지께 버림받은 예수님이 가졌던 그 수치가 마지막 수치에요.

그런데 로마서 1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냐 하면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으로 인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했거든요. 그럼 내 안에 스바냐 3장에 나오는 그 절기라는 장치가, 설비가 내 안에 만들어진게 성령이 임한거에요. 성령이.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말씀의 완성이 내 안에 하나의 공장이 설립돼 있는거에요.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거기서 양산되는 겁니다.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로마서 8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것이나...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서 알려주는 것이 뭐냐 하면, 너는 너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고 그냥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몸일 뿐이다. 라는 사실을 그리스도가 오니까 그걸 비로서 아는 거에요. 그래서 니가 한것에 대해서 내가 일체 받질 않는다.

직장은 있으나 직업이 없다는 말은, 소속은 있으나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소속은 없다. 이 말입니다. 일은 하되, 인간 세계에서 지 자랑질 하려고 하는 그런 일은 내가 어떤 일을 해도 니들이 생각하는 세상 일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소속이 다른 일인 거에요. 이발사가돼서 이발하든, 농사를 짓든, 니들 보기에는 농사짓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야 내가하는 농사일은 이 농사일을 통해서 내가 죽은 몸이라는 것을 발췌 해야되고 밝혀지는 주의 일을 내가 농사라는 방편으로 해내고 있는 거에요.

여기서 아까 부자 청년 해봅시다. 부자 청년의 문제점은 뭐냐. 자기의 평소에 살아가면서 자기의 죽는 이유를 발췌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오류였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면서 십계명을 지킨 이 지켰다는 이것이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그걸 부자 청년이 캐내질 못했어요.

그러나 십자가의 영이 온 사람은 농사를 짓든, 운전을 하든, 교사를 하든, 국회의원이 되든, 뭘 하든, 이 일로 나를 죽이고자 주께서 나에게 이런 직장을 주신거에요. 그 직장은 소속된 하늘나라에 소속된 직장으로서 국회의원하고 농사짓고, 장사하고, 치킨 튀기고 하는거에요.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죽을 육신인 것을 알게 하는 것, 그러면 더 이상 죽을 육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소속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거에요. 그걸 뭐냐 “너는 종노릇 그만해, 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이 되는거야.” 라고 로마서 8장 14절에서 이야기하는거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것을 영광이라 하고 칭찬이라고 하는거에요. 그게 둘 다 나오는게 같이 영광 칭찬, 나중에 너희들은 내 칭찬받는다 할 때, 베드로전서에 이걸 영광으로 같이 나열했어요. 1장 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이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던 그 완성 그 완성에 성령을 함께 받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가 치욕스럽고 부끄럽고 “그거 뭐야, 우리에게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어야지, 비이성적으로 한걸 우리보고 믿으래, 누가 믿겠어.” 했던 그 십자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그것이 부끄러운것도 아니고 그것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미련한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한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이말이죠. 그 능력이 뭐냐. 날마다 우리 내부에서 내가 나의 의를 갖고 있다는 것 이게 십자가 앞에서 수치의 극단인 것을 우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세요. 기쁨을.

그러니까 인간은 무얼해도 뭐가된다? 죄가 된다라는 거에요. 왜? 그게 나의 의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나의 잘남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잃지 않고자 하는 그 악마적 버팀은 성령이 올 때에 비로소 발견하는 기쁨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그걸 발견했을 때 아버지 칭찬이 있는것처럼, 이제는 그 칭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받는 거에요.

“니가 죄인인 것을 니가 어찌알았어?” 그럴 때 우리는 주님 저한테 혜택 주시옵소서 말하는게 아니고, “아, 주님이 이런분이군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군요” 라는 것을 함께 영광 속에서 함께 이미 시작한 천국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것이 스바냐 예언의 성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쉬지않고 일하게 하옵소서. 그 일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의 자기의에 지킬려고 악바리처럼 설치는 그런 죄의 종의 모습을 지녔다는 것을 밝혀지는 그 환희와 기쁨이 주님에게 감사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