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인생(시편 39:5) / 230508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6 - 사라지는 인생
23,05,08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사명감인가? 오락인가?
오늘은 교재 107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제목이 '우주적 권세와의 싸움' 이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지옥의 하나님'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싸운다' 라는 게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이스라엘은 그 이름 차제가 싸우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명감이 없다고 하면 이스라엘은 결코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사명감이 없으면 사는 것이 그냥 일종의 오락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오락은 시간을 때우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사명감이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 키에르케고르 - '미적 취향', '윤리적 취향' !!
이 오락은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미적 감각을 위한 오락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키에르케고르' 라는 덴마크의 철학자가 인간을 분석해서 내놓았는데, 그 당시 유럽의 목사들이 복음은 전하지도 않고 교회 키우기에 열중하자, 이것을 비판함으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여겼는고 하니, 그는 먼저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돈으로 산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이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는데, 즉 돈을 버는 것에 환장해버린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은 미적 취향이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미적 취향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것을 한다든지 해서 자기 인생의 교양이나 소양을 풍족하게 해주는 취향이 있어야, 그래야 사람다운 맛이 난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 취향을 있어야 품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1단계, 즉 낮은 단계라는 말이죠.
그러면 2단계는 무엇인고 하니, 음악, 미술, 연극과 같은 것을 합쳐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문학도 여기에 속한다는 겁니다. 이런 예술적 취향이 있어주어야, 그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기본단계이고, 2번째 단계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윤리적 취향' 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은 윤리적 취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지요? 윤리적 취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착실하게 살아야 하고, 고상하게 살아야 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예의범절이고 에티켓인데, 즉 자기의 이익보다 타인을 배려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음악, 미술, 연극과 같은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단계를 조금 더 높여서, 성실하고 착실하고 고상하게, 이게 소위 '바르게살기'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타인을 배려하면서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는 단계가 2단계인 '윤리적 취향' 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 실존주의 철학 - '신적 취향' !!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단계가 하나 더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3단계인데,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한다. 그것이 인간답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최초로 이야기해서 신학적으로 유명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은 단독자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실존주의 철학' 이라고 하는데, 즉 실존이라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떻게 비추어지는가?" 라고 하는, 그것이란 겁니다. 이것을 '신적 취향'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신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돈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서 1단계는 미적 취향이고, 즉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돈을 번다고 바쁘고 정신이 없어도, 고상한 예술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답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1단계라는 말이죠.
그리고 2단계는 바르게 살고 남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한다는 겁니까? 이제 3단계로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비추어지는가?" 라는 것을 살펴봐야 하는데,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이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사람의 말이 맞습니까? 돈만을 아는 것은 그야말로 짐승의 세계인데, 인간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의 주장에는 문제가 없는지,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지금부터 그것을 살펴보자는 것이죠.
* 키에르케고르는, 새로운 시작점을 놓치고 있어 !!
그것은 바로, 키에르케고르는 "새로운 시작점을 놓치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는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책에 의하면 이 세상은 전쟁 중인데, 그런데 전쟁을 하려고 하면 항상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야 하는고 하니, 처음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1단계, 2단계, 3단계의 주장을 하는 키에르케고르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2단계가 되면 1단계는 지난 것이고, 그리고 3단계가 되면 1, 2단계가 없는데, 그러면 그것이 처음 자리인가요? 처음 자리를 한참 지난 자리입니까? 처음 자리는 지났는데, 그러면 처음 자리와는 작별을 고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님의 전쟁, 즉 영적 전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 품위를 높이고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고, '전쟁' 이라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그것은 오락 !!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마땅히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성도의 사명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접근하게 되면,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한 "1단계, 2단계, 3단계" 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그만 오락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인생은 길고 시간은 남아도는데, 그러면 이제 자기가 할 것은 자기의 품위를 높이고 가치를 높이는 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시간을 때우게 되면, 그것은 오락이라는 말이죠. 즉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가치를 추구하는 자기 전쟁이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평소에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텐데, 그러면 "저 사람은 과연 무슨 오락을 즐기고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라는 겁니다. 1단계에 있는 사람은 음악 이야기가 나오는데, 베르디와 모차르트가 어떻고 오페라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죠. 주현미나 나훈나가 나오는 게 아니고(ㅋㅋ), 고상하다고 하는 클래식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것으로 자기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자기 자랑을 줄줄 늘어놓는데,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미술 이야기가 줄줄 나오고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것은 영적 전쟁이 아니고, 자기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하는 자기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서 키운 것이라는 말이죠.
* 모든 것은 다 예수님 이야기 !!
달리 말해서, 처음 지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처음 지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예수님 이야기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 이야기인데,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자기 신체에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다리가 멀쩡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장애자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야곱이 기분 나빠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았는데,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었다는 말이죠.
* 장애자, 야곱 !!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기는 야곱이었는데, 그래서 모든 것을 야곱부터 시작을 한다는 겁니다. 즉 "1단계, 2단계, 3단계, 그렇게 내가 착하고 바르고 살고, 이웃을 배려하면서 살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만나겠다" 라고 시도하는, 그런 야곱적 안목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싸움은 이제 야곱의 싸움이 아니고, 야곱이 지니고 있는 흔적의 싸움이라는 말이죠. 즉 야곱이 먼저 하나님 앞에 와장창 깨어졌다는 겁니다.
* 인간은 망가졌다 !!
그러면 인간의 처음자리는 무엇인고 하니, 문제성이 있다는 말이죠. 즉 "인간은 처음부터 망가졌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은 처음부터 뭔가 오류가 있고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바로 이것을 알아야 사명감을 가지고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한 것처럼 "1단계, 2단계, 3단계", 그렇게 자꾸만 높여가게 되면 자기는 정상인 줄로 안다는 말이죠. 착하게 살고 마음도 고상하고 또한 남까지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까지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다 오락인데,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서있다고 여겨도 오락이라는 겁니다. 자기 즐거움에 빠져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인생이 오락이 되고, 거기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멸망의 대상임을 누락했기 때문인데, 그러면 모든 것이 오락이 되고 게임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전체를 안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나의 이야기는 허용되지 않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았을 때만 가능하다는 말이죠. 첫 번째로, 성경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멸망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래서 "모든 것은 나의 스토리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인생은 내가 만든 '기관차+객차'다 !!
이것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인생은 내가 만든 '기관차+객차'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앞에는 기관차가 끌고 있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이 되고, 그 뒤에는 줄줄이 자기 성과들을, 그런 객차들을 계속해서 붙이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른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 이야기를 하면 소설책이 무려 10권은 된다" 라고 하는데, 그동안 인생을 자기 이야기로 구성해서 살았다는 겁니다. 사명감도 없고 영적 전쟁도 없고, 그냥 자기 인생을 꾸준하게 살아온 것,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인데, 당연히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이 없으니 자기밖에 생각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남은 인생을 지루하지 않게 어떻게 오락으로 때울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오락에는 도박이나 노름과 같은 것도 있지만, 아주 고상한 오락도 있다는 겁니다. 즉 연극이나 오페라와 같은 것도 있다는 것이죠.
그것보다 더 괜찮은 오락이 "저 사람이 착할까? 내가 더 착할까?"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보다도 더 차원이 높은 것은 "교회에 가서 누가 더 가도를 많이 할까? 누가 전도를 많이 할까? 누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까? 누가 천국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않을까?" 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다 오락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습니까? 자기의 장애요소가 없다는 말이죠. 야곱이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발생된 그 절뚝거림, 그것이 그만 누락되고 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 자기를 건사하는데 평생을 모두 다 보낸다는 것이죠. 자기를 관리하고 지키는 것에 말이죠.
이것은 교회든 어디든 간에 누구를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바로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입에서 자기 객차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작년에 김장을 했는데 좀 짰어. 그래서 이번에는 젓갈을 좀 바꿔서 김장을 해볼까?" 라는 식으로 말이죠(ㅋㅋ). 자기가 김장을 했다고 하는 스토리가 객차처럼 붙어있다는 겁니다.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인간은 자기가 멸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러니 모든 것은 예수님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면 "모든 것이 예수님 이야기라도, 그 안에서 내 이야기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나올 수도 있는데,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0절에 의하면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여기 마지막에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되어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자기에게 몰입하고 자기 스토리, 즉 자기 기차놀이에 온 정신을 다 팔고 있었다는 말이죠.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 이야기인데,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죠.
* 예수,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렇게 "예수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라는 것은 마태복음 8장에 의하면,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분명히 마귀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실상에서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예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하는, 우리의 대화 중에서 무심코 내뱉은 것이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즉 "나는 지금 예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나는 지금 베토벤에 빠져있어. 오페라에 빠져있어. 연극에 빠져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가 교회는 나가주겠지만, 예수는 나와 상관이 없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야기만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왠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이야기는 외면하고, 절대적으로 자기 이야기에 빠져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멸망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 잉태치 못한 자 !!
이제 영적 전쟁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해보면, 조금 어렵게 해보겠는데 말이죠.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가 나오는데, 그러면 잉태된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분할 때는, 모든 것이 예수님 이야기로 출발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우리가 구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인간이 인간을 구분하게 되면,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잉태치 못한 자와 잉태된 자로 구분을 한다는 말이죠. 참으로 특이한데, 그래서 제가 어렵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잉태치 못한 자'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출생한 것이 무효가 된 자라는 말이죠. 반면에 '잉태된 자'는 무엇인고 하니까, 잉태된, 즉 자기가 출생한 것을 그대로 밀어붙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그렇게 둘로 나누어서 보신다는 말이죠.
일단 모든 인간은 출생이 되었으니 있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렇게 출생이 되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출생된 것을 잘못된 사태로 여기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출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출생된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 '그냥 갑시다' VS '엉터리야' !!
그렇다면 이 출생된, 즉 잉태된 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갑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미 태어난 것이니 그냥 밀어붙이자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볼 수 있는데, 먼저 "일단 밀어붙이자" 라는 쪽이 있고, 그리고 "내가 태어난 것은 잘못이다" 라는 쪽이 있다는 말이죠.
물론 이런 경우에는, 자기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 후회스러운 상황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경우는 "이런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라고 할 정도로 매우 기이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잉태치 못한 자들의 집합체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천국백성'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라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 이야기에 의하면, 잉태치 못한 것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 자체가 없는 것이 되는데, 그러면 즐거워할 것도 없다는 말이죠. 이게 우리의 논리인데, 즉 "이왕 잉태되었으니 1단계, 2단계, 3단계를 거쳐서, 즉 미적 취향을 가지고, 그리고 바르게 살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서 살면 된다. 그게 인간이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잉태된 것을 가지고 그냥 마구 밀어붙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잉태된 자의 문제점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야곱의 흔적, 장애요소, 오류, 그것을 알 길이 도무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전혀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 !!
인간은 자기의 처음 자리를 오해하고 있는데, 자기가 출생을 했으니, 그것을 어려운 말로 '존재' 라고 하는데 말이죠. 즉 "태어났으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면 이제 바르게 살면 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엉터리라는 것을, 그것은 곧 범죄한 것이고,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은 상상도 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데, 우리 인간의 스토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스토리에 의하면, 예수님의 스토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런 예수님의 스토리에 의하면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런 세상을 그냥 방치해두겠습니까? 멸망을 시키겠습니까? 당연히 멸망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멸망 중인데, 우리가 오락이나 하면서 즐기고 할 때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누가복음 21장을 잠시 살펴보고,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4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21장 34절과 35절입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 심판의 날, 왜?
여기 35절에 보면 '이 날'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34절에 보면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멸망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러니 이 날은 심판의 날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이 세상은 심판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먼저 "인간은 심판을 받는 세상에서 심판을 받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왜 멸망을 당해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인간들은 모른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데,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고 보니 그 세계는 무너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왜 무너져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런데 왜 멸망을 당해야 하느냐는 말이죠.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 아들아, 이제 그만 죽어라 !!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이 나이가 드니까, 그 자식을 보고 "이제는 내 말을 알아들을 때 되었구나. 그러면 너는 이제 죽어라" 라고 한다면,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너는 죽어라" 라고 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귀를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제 죽어 마땅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자식이 "그러면 엄마 아빠는 무엇인가요?" 라고 하면, "우리도 죽어 마땅해. 왜냐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3이 되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 것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출발점 자체가 아니고, "이왕 태어난 것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겠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 나쁘냐는 겁니다. 1단계와 2단계의 취미생활, 그런 것도 다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돈이 없으면 오페라고 뭐고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연금이라도 없으면 나이가 70이 되어도 새벽부터 부지런히 설쳐야 한다는 말이죠.
* 이 세상은 예수님 이야기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이 세상이 누구 이야기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인간을 앞장세워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예수여, 굳이 당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나는 이 땅에서 나름대로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여,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알아서 살아갑니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여러분이 교회에서든 바깥에서든 간에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러한 낌새를 한번 체크해보시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사명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성도로 이 땅에 태어난 사명감이라는 겁니다.
*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
이제 갈라디아서 4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여기 27절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이상한 말이 아니냐는 것이죠.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잉태치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되는데, 그러면 당연히 즐거워하고 말고 할 주체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자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출생한 날이 있는데, 그래서 그 날이 되면 "생일 축하합니다 ♬"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이고 그 시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은 인간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라고 한다는 말이죠.
* 먼저 언약이 있었다 !!
우리 인간 이야기는 실선이지만 예수님 이야기는 점선인데, 그런데 인간은 이 점선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출생하기 이전에, 여기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언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언약이 둘로 갈라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약속이 있었는데, 이 약속이 언약이 되고, 이 언약은 '1번 언약'이 있고 '2번 언약'이 있다는 말이죠. 1번 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출생을 무효화를 시켜서 예수님의 실선에서 출발점을 파악하게 된 자들이라는 겁니다.
* 두 개의 언약 !!
이게 바로 야곱인데, 그냥 야곱이 아니라 흔적을 가진 야곱이라는 말이죠. 즉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흔적을 지닌 야곱이 자기의 출생보다 앞서서, 자기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 이제 자기와 주님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고, 상관이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 스토리는 어디에 편입이 됩니까? 예수님 이야기에 편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를 합니까? 거부를 합니까? 동의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동의를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보다 약속이 우선이니 말이죠.
자기 이야기를 꾸며나가는데 있어서, 즉 "1단계, 2단계, 3단계, 근사한 나, 멋있는 나, 가치가 있는 나, 괜찮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나", 그것은 바로 잘못된 출발점에서 나왔다고 하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착하고 훌륭하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죠.
그 생각자체가 잘못인데, 왜냐하면 아무리 백 날을 그렇게 생각해도, 그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고 하니, 그것이 자기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러면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 결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멸망이 없으면 그만 오락이 되고 마는데, 즉 자기가 그냥 즐기는 세상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또 하나의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이 2번 언약은 1번 언약에 의해서 저주를 받는 언약이 되기 위해서 출발한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1번에 의해서 2번이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 그러면 1번은 무엇을 받을까요? 누구를 저주할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러면 이쪽 1번은 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서, 그렇게 약속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인데, 그래서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모든 것이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우주는 쓰레기장 !!
여기 교재 107페이지 제목이 '우주적 권세와의 싸움'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우주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남겨놓은 쓰레기장이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들은 그게 쓰레기인 줄 모르는데, 자기는 고상하게 산다고 자부를 하니 말이죠.
그런데 그동안 쓰레기장의 배후에서 "내가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지?" 라는 것과 관련된 것들만 계속해서 생산해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다 부정적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없는 것 같지만 있다는 겁니다.
저기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 그런 것들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만든 것과 인간이 만든 것이 같이 섞여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고 "저 달을 한번 보세요" 라고 하면, "지금 내가 바쁜데 왜 저 달을 봐야하죠?"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달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
시편 136편에 보면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영원하다는 겁니다. 즉 "무엇을 하라 그러면 영원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은 우리 인간의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인생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만든 기차는 영원하지 않는데,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시 136: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달을 볼 일이 있습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은 나는 상관이 없다" 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나와 상관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여러분은 24시간 누구와 상관이 있습니까?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상관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 자기 부모, 자기 마누라, 그렇게 자기와 상관이 있다는 말이죠. 밥은 잘 챙겨먹는지, 그래서 하루에도 12번은 더 전화를 걸고 하는데, 남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해와 달은 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러나 주님은 신경을 쓰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영원함이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와 달에 무슨 영원함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인자하심' 인데, 그러니 해와 달과 별에 인자하심이 녹아져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그냥 공짜로 주시는 사랑, 그것이 거기에 스며들어있다는 겁니다.
*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인자하심 !!
예를 들어서, 피자에 보면 치즈가 녹아 들어가 있는데, 그러면 치즈는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해를 보고 달을 봐도 인자하심이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인자하심에 거기에 녹아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성경에서 해와 달을 보라고 해서 보기는 보는데, 그러면 "아, 반달이네", 혹은 "아, 보름달이네" 라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거기에서 무엇은 발췌하지 못하는고 하니, 주님의 거저 주신 인자하심이 녹아져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면 자기 인생을 주님의 그저 주신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애쓰고 노력해서 사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이 정도로라도 가꾸어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손자를 키워준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귀하다는 말이죠. 거기에 자기 노동과 자기 고생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나의 이야기'가 된 것인데,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밀어붙이기밖에 되지 않는데, 즉 "이미 태어났으니 계속해서 진행하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태어나니 부모가 자기에게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래서 '나' 라고 인정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자기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러면 이제 믿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고, 남들에게는 지지 않아야 하는데, 지면 패배자가 된다는 말이죠.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겁니다.
* 주님에게 관심조차 없는 인간들 !!
그렇게 온통 자기에게만 신경을 다 쓰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말씀은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성경책에서 가위로 그만 오려낼까요? 오로지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지 주님에게는 관심조차도 없는데, 그러니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런데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자기를 위해서 주님에게 뭔가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 너희들은 끝났어 !!
자기가 없는데 주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아닌가요? 그래서 돈이 생기면 오락을 통해서 인생을 즐기면 되고, 돈이 없으면 악착같이 돈을 벌고 한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이 그것 외에 달리 없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 언급한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여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척'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데 정신이 없어서, 철학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을 하고 말고 할 여유조차도 전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은 말하는데, "너희들은 끝났어!"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닙니다. 아직 저의 인생은 남아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50년, 60년을 교회에 다니면서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이죠.
* 점선을 노리는 인간들 !!
그러니 전체를 보는 그림 자체가 잘못되어있는데, 이 점선은 모르고서 눈에 보이는 실선부터 시작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살다가 이제 죽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러면 어디로 가는고 하니, 실선은 실선대로 두고 점선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죠.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채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이용하는 것인데, 전혀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조금 전에 제가 여기 칠판에 무엇을 쓴 것이 있는데, '잉태치 못한 자' 라고 해놓고 그 뒤에 뭐라고 적었는고 하니, "나의 출생은 무효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기억이 나지 않지 싶은데, 이미 먹은 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이왕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무효로 돌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무효로 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악바리로 살아온 인생의 모든 노력과 희생이 오류에서 불발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자기가 그것을 돌이길 수 없음에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삭제하시고 무효로 돌려주셨으니, 그것을 즐거워하자는 겁니다.
* 나는 나에게 손님이어야 한다 !!
다시 말해서, "너의 인생에 대해서 손대지 마라. 내가 깎아주겠다" 라는 겁니다. 왜 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 물건값을 깎게 되면 누가 좋아합니까? 장사꾼이 아니라 손님이 좋아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나에게 손님이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네 주인이 아니고, 주인은 따로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주인이 우리의 가치와 의로움에 대해서 알아서 값을 깎아주시는데, 그러니 이런 즐거움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즉 "출발점으로 가자. 세리와 창기가 있는 곳으로 가자" 라는 것인데, 즉 더 이상은 자기의 것을 내세울 수 없는 곳으로 합류하라는 겁니다.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물론 세리와 창기라고 해서 모두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알게 된 자들에 국한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십자가에 달린 강도, 즉 죄인인데, 그 구원받은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자기가 탈출할 궁리를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아주 가볍게 "이제 제 인생은 주님의 인생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다른 강도는 무엇인고 하니까,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악착같이 자기 본성을 그대로 지속한다는 말이죠. 즉 "당신이 만약에 지금 나를 살려준다면, 내가 당신을 믿어줄게. 당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해줄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지옥에 간 강도의 이야기, 오늘날 교회가 그런 이야기로 가득히 차 있다는 말이죠.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물론 교회가 "하나님, 한번 봐주소. 살려주소" 라고, 그렇게 조폭과 같이 투박하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주여, 믿씁니다" 라고 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둘 다 똑같은 소리라는 겁니다. 그 관심사가 자기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지금 우리 남편이 아픈데, 그 병에서 낫게 해주시면 제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십일조를 두 달간 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거래를 제의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 이야기는, 신나는 이야기 !!
그러니 그동안 성경말씀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주님의 뜻은 "이것은 전부가 내 이야기이지 너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너 속에 들어가면 된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기차가 아니라 주님의 기차인데, 즉 주님은 기관차가 되고 우리는 객차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나는 이야기인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왜 자기가 짊어지고 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도 끝까지 말이죠. 유황불로 가면서도 끙끙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야야, 너거들이 나를 여기 요양병원에 보냈는데, 여기 병원비도 만만치가 않다고 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요양병원에 가서도 자식 생각을 하는 척을 하는데, 그렇게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의 스토리에 의하면, 요양병원에 누가 보낸 겁니까? 우리의 주인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 자신의 값을 깎아주기 위해서 요양병원에 보냈다는 겁니다. 즉 "네 가치는 이제 제로가 된 것이 임박했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말이죠. 70살, 80살, 아니 100살을 살아도, 마지막에 카운터를 해서 값을 셈해보니 '0원' 이라는 겁니다.
* 값어치는 '-7,600만원' !!
사실은 제로도 아닌데, 왜냐하면 죄만 지었기 때문에 '-7,600만원' 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가 죄인인 줄 알았다고 하면,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네가 죄인인 줄로 알았으니, 그러면 너는 천국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죄인인 줄로 알았다고 하면, 그런데 이 실선에서는 인간은 절대로 죄인이라고 나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점수를 자기가 매기기 때문에, '-7,600만원' 이란 것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심지어는 전과 100범의 사기꾼이고 사형수라고 해도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 자신만은 고귀하다는 겁니다. 물론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것인데, 즉 "놓치지 말아라, 너 자신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마귀는 늘 우리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왔다는 겁니다.
* 병원에 가는 것도 주님의 인자하심 !!
그래서 사형수에게 목사가 가서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하면, "저도 어릴 때 주일학교에 좀 다녔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주일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자기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주일학교에 다녔으니 지옥이라도 좀 편한 곳에 가게 해주세요" 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 무효인데,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라는 겁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는 것도 주님의 뜻인데, 그러니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죠. "나, 이제 죽을 란다. 그만 빼라" 라고 하면서 객기를 부리지 말라는 겁니다. 며느리가 병원에 데리고 가주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아프면 병원에 당장 달려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도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겁니다. 해와 달과 별에 영원한 것이 녹아있다고 했는데, 그게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말이죠. 시편 136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해보다 못하고 달보다 못하고 별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 악마의 방해공작 !!
그러면 누가 방해를 했습니까? 우리 속에 들어있는 마귀가 주님의 영원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그야말로 인간을 조져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와의 영적싸움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지혜나 지식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가지고 해야하는데, 거기에 정답이 나와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해드리지만, 성경 이야기는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야기인데, 우리의 주인이 바로 그 예수님이었다는 말이죠. 즉 "내가 나 자신 주인이 아니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예수님 덕분이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성경말씀이 정말 어렵지만 실상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겁니다. 이 실선, 즉 자기의 출생부터 이야기하는 것, 이것을 두고 "육체, 즉 육신을 따라서 살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오로지 육신을 따라서 !!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 산 것이 맞는데, 그렇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하는 것이 다 육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인데, 또한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도 역시 육신이 시킨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육신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죠. 전부가 다 육신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육신대로 사는 인간들이 동창회를 연다고 하면, 동창들끼리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합니까? "너는 육신대로 살았지?" 라고 하면, "그래, 육신대로 살았어. 너는 아니야?" 라고 하면, "그래, 맞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합니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끼리 만나게 되면 하자가 발견되지 않는데, 이게 문제점이라는 말이죠.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이 육신의 문제점이 나오는데, 즉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 말씀은 보지 않겠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이 인간아, 살다가 썩어서 죽어라 !!
성경에서 이 육신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이 인간아, 살다가 썩어서 죽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자가 있었다는 말이죠. 처음부터 고장이 났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멸망의 대상인데, 이것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이죠. 즉 "내가 백년을 살아도 소용이 없구나. 애초에 고장이 났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나쁜 짓을 해서 문제가 아니고, 처음부터 고장난 육체를 인수인계를 받았는데, 부모로부터 말이죠. 육신에게서 육신을 받았는데,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겁니다. 해결책은 없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다는 말이죠. "갈 때까지 가보자" 라는 것인데, 그렇게 70년, 80년을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방금 보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뒤에 보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육체가 성령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몸만이 육체가 아니고, 육체의 관심사는 오직 육체에만 꽂히게 되어있는데, 그래서 육신, 즉 육체라는 겁니다.
그러한 육체가 교회에 나오면 그 교회는 오락단체가 되고 마는데, 그냥 노닥거리면서 시간을 때우고 논다는 말이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로 갔다가 육체로 오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오로지 그 관심사가 육신에 가 있는데, 그러면 자기 육신이 아닌 타인의 육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저 사람은 가방을 무엇을 들고 왔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육신은 육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아이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지?" 라고 하고, 또한 "저 사람의 한 달 수입은 얼마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썩어질 것은 썩어진 것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점선으로 되어있는 것, 물론 이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라" 라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그것은 반성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후회가 아니고, "누군가가 나를 무효로 시켜주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한 뼘의 인생 !!
지금 종이가 있으면 좋겠는데, 제가 종이를 이렇게 길게 접었다는 말이죠. 우리가 인생을 출발해서 이렇게 죽을 때까지 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일에 대해서 후회와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거기에서 무슨 후회가 나오느냐는 것이죠. 주식이나 부동산을 해서 망해도,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말이죠.
여기서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이 끝을 처음이 아니고 그 이전으로 넘어가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긴다란 종이를 계속해서 접으면 하나의 순간이 되는데, 이게 시편에 보면 나오는데,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접으면 한 뼘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접으면 자기는 공중에 붕 뜨게 되는데, 즉 면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은 처음부터 예수님 이야기인데, 달리 말하면 성령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처음부터 성령이 오셔서 성령의 품속으로, 즉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즐거워하라는 것인데, 그러니 후회와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과거에 자기가 바보짓을 한 것을 알면 되는데, 알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나는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을 후회한다" 라고, 혹은 "당신 같은 여자를 만난 것을 후회한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다음에 다른 남자를 만나도 또 그런 남자를 만다는 말이죠(ㅋㅋ).
* 어머니의 품 !!
우리는 육신대로 사는데, 육신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온갖 오락을 다 즐기는데, 그런데 그것을 원래 주인이신 성령의 품으로, 그것을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는 어머니의 품이라고 하는데, 그 품안으로 우리를 집어넣어 주신다는 말이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게 성경, 즉 예수님 이야기인데, 예수님이 그것을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냥 서 계시고 우리가 알아서 믿어주면 되는, 그런 분입니까? 예수님은 활동을 하시는 분인데, 우리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신다는 말이죠.
* 주님의 독설과 영적 사람 !!
주님께서는 이렇게 종이를 접듯이 우리를 접어가면서, "너는 죽어. 너는 멸망의 대상이야. 너는 육신이야" 라고 하시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음껏 독설을 퍼붓는데,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다는 겁니까? 주님의 자기 백성이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바리새인이야" 라고 하면, "제가 바리새인입니다" 라고 하고, 또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면, "제가 바로 저주를 받을 놈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주님의 독설, 그 말씀 하나하나가 잊혀지지 아니하고 자기 육신 속에 꽂히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영적 사람' 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을 버렸다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과 더불어서 말씀이 같이 섞여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영적 사람인데,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 나의 스토리를 짜자 !!
그런데 육의 사람은 말씀이 들어오면 꽂히는 것이 아니고, 다 뱉어버린다는 말이죠. 육적인 사람은 "이제부터는 말씀을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라는 식인데, "지금 제가 너무나도 바빠서 교회에 가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모두 다 밀어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에 바쁘다는 겁니까? '나의 스토리'를 짜는데 모든 시간을 다 보낸다는 말이죠. 즉 "나는 야곱과 같이 장애자가 아닙니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가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라는 말을, "나는 죄인 중에서 괴수입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자들의 입에서는 "그동안 가능한 한 술수를 줄이고, 남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했으며, 심지어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까지 했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그 어떤 일을 해도 그 마지막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그런 말만 듣기를 원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자들은 이 전체 그림이 잘못되어있다는 겁니다.
*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답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예수에게 관심이 없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게 정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멸망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찾던 자들이었는데, 그런데 그만 멸망을 당했다는 것이죠.
이게 정답인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변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접촉을 했던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바로 그것을 이스라엘이라는 지평에 낱낱이 사건화를 시켜서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그게 구약성경인데, 거기서 드러난 시작과 끝, 그게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데, 알파와 오메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데,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나는 나다 !!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나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뭐라고 반응을 해야할까요? 무엇이라고 반응을 해야 영적인 사람이냐는 말이죠. "나는 나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반성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자기 인생이 아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나다" 라고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나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대화 속에 이것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말이죠.
* 역시 내 김장솜씨는 엉터리야 !!
예를 들어서, 작년에 김장을 하는데 조금 짰다는 겁니다. 그러면 "젓갈을 잘못 선택했나?" 라고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하면 됩니까? "역시 나는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김장 이야기를 2시간이나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ㅋㅋ).
이제 감이 오지요? 자기 아이가 고3이라고 하면, "이번에 잘 되어야 할텐데" 라고 나서, "역사 나는 맛이 갔어"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윤석열과 이시다가 만났는데, 윤석열의 지지율이 올라갔을까? 내려갔을까?" 라고 할 수는 있는데, 그리고 나서 "내가 왜 정치라는 오락에 관심을 두고 있지? 나는 엉터리야. 역시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야" 라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는 자가 승리자이고, 반성하지 않는 자가 승리자라는 말이죠. 즉 자기를 포기하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한다는 겁니다. 교회에 50년, 60년을 다녀도, 성령을 받고 복음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에게 매여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유가 없다는 겁니다. 입으로 자유를 외친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고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남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래서 "남들에게 나를 보고 우리 가족을 보고 뭐라고 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안절부절 마음을 놓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은 육으로 왔다가 육으로 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하면, 성경말씀은 "이 세상은 끝났다" 라고 이미 선언을 해버렸는데, 즉 "너는 더 이상 너에게 기대를 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마지막에 심판이 이 세상을 덮친다는 말이죠. 오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지 말라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무너지게 되어있는데, 그 무너짐에 대해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이죠. 즉 "내가 무너지고 이 땅에 무너지고, 이 땅에 태어난 내가 무효가 된다"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돈이 좀 있고 이유가 있다고 해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500억이 있던 사람은 돈이 490억이 되면 그 사라진 10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실감은 나지 않지만 말이죠(ㅋㅋ).
휴대폰 하나 잊어버려도 잠이 오지 않고, 또한 운전을 해도 항상 염려가 되고 불안해하는데, 그래서 "이제 운전면허증을 반납해야하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소관인데, 그러니 원래 주인을 찾아간다는 것이죠. 전혀 후회 없이 반납하면 되는데, 물론 우리가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육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버티기에 들어가는데, 그냥 밀어붙인다는 말이죠. 즉 "갈 때까지 가보자" 라는 것인데, 하지만 성령께서 이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를 종이를 접듯이 돌돌 말고 접어서, 우리의 인생을 그야말로 한 뼘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그것이 시편에 나오는데, 지금 당장에 찾으려고 하니까 찾을 수가 없는데 말이죠. 여기 시편 90편에 보면 그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9절과 10절을 보겠습니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리고 시편 39편을 보겠는데, 5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왜 알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을 외면하기 때문인데,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인데, 즉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평생을 자기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어도 "농담하지 마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자랑케 하는 마귀가 자기 안에서 그 관심사를 성경에서 비켜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자기의 몸이 아픈 것, 자기에게 돈이 없는 것, 관심사가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생문제를 자기가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일같이 기도하기를, "주여, 조금만 도와주시고 조금만 편안하게 해주시면, 제가 하나님께 잘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내 인생 후회하지 않기 !!
우리가 하나님께서 잘해주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자기 인생을 무효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같이 주님 앞에서 약속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 인생 후회하지 않기!" 라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지는 몰라도, 앞으로 더 꼴아 박을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돌돌말기'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잉태치 못한 자로 만들어주시는데, 그런 주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리는 하나님의 작업, 그것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그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해와 달과 별에 주님의 인자하심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도 그 주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고 증거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