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12-15 / 경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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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5일 본문: 스바냐 2:12-15
(2:12) 구스 사람아 너희도 내 칼에 살륙을 당하리라
(2:13)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2:14)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2: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이스라엘만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스(이디오피아)도 망하고 앗수르도 망합니다. 우리는 나 말고 누가 망하면 순간적으로 생에 활력소가 생깁니다. “참 안됐다. 어쩌지 그쪽 집안.” 말로서는 동정심을 표시합니다. 이는 노골적으로 남 망한 것 고소해하다가 건방지다고 하나님에게 똑같은 상황으로 벌받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휴, 다행이다. 나는 그런 절망적 상황이 아니라서”라고 생각하면서 안심하게 됩니다. 구스라는 나라나 앗수르라는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이 아닌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마음 속에 쾌재를 느낄 겁니다.
이런 태도는 잘못입니다. 그들이 망할 때 여호와에게 망할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망한 이유가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도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타인의 망함을 통해서 우리 역시 망해야 마땅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교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5절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즉 인간이 추구하는 경로의 최종값은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음’입니다. 인간이 일부러 교만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이 마음가짐에 예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좋아했고 기뻐했겠습니까!
하나님과 자신들이 한편 먹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주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생각이 교만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우리 인간이 이미 자기 입장에서 만사를 생각하는 그런 교만한 자라는 점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한편이라고 자부하는 그들 손에 하나님이 살해되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가 잘못된 겁니까? 그 대목은 이사야 47:10-11에 나옵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여기서 ‘근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근본을 접촉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교만이 근본 아는데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대하는 시선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근본에 기준을 두고 보시는 겁니다. 그 근본에는 ‘근본 악’이 자리잡고 있고 ‘근본 의’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근본 악’과 ‘근본 의’에 접촉이 가능한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근본 악’을 보여주시기 위해 인간들이 세운 모든 국가들을 전부 황무하게 만드십니다. 쉽게 말해서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앗수르에 관해서는 나훔 3:1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나훔 3:1-3)
즉 앗수르라는 나라는 그냥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파괴당할 소리의 집합체’인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의 국가란, 그 안의 구성원을 평균화하는데 집중합니다. 그리고 소속된 백성들도 바로 이런 평균화를 기대하고 그 전체 평균화 속에 숨어들어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개인으로서 인간은 만나는 타인들과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몹시 삶이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주변 사람들 맞처 나가는 식으로 균질화하게 되면 그 이웃은 나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 협조적인 이웃이 되기에 사는데 불편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타인을 경계해야만 하는 피곤함을 완화시켜주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한 이웃의 숫자를 늘여가면 그 개인은 어디가도 편한 마음으로 자기 생각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형편을 두고 ‘좋은 사회’라고 합니다. 이 덩치 큰 ‘좋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누릴 때,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고대하는 이상적 세상살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균질화가 하나님에게 ‘교만’으로 간주될 줄은 상상도 못하지요. 왜 이게 교만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은 장차 천국은, 오로지 ‘일찍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행복을 꿈꾸는 내가 중심이 되는 환경이 결코 천국이 아닌 겁니다. 그리고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 중심이 있지 않는 상황을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규정한 ‘참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의미있다고 여기는 경로를 변경되어야 합니다.
‘죽음보다 앞선 죽음’에 접촉되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 온 동방박사가 그 예입니다. 별 따라 왔던 그들은 헤롯에 의해서 ‘죽음에로의 초대’를 받은 바가 됩니다. 천사가 와서 경로를 변경하므로서는 동방박사는 ‘이미 죽은 자’로 고향으로 돌아게 되었습니다. 또한 구약에 나오는 인물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롭다고 자부하는 욥은 자기에게 의미있는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욥이나 욥의 세 친구 모두다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볼 줄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전혀 의미 없는 그런 근본악과 관련된 인물인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한편이 아니라 십자가 죽었다가 살으신 아들과 한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성도를 ‘앞선 죽음’, 곧 ‘근본악’에 도달한 경로로 인도해서 거기서 영원한 ‘근본 의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 성도 안에는 이미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일찍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계 5:6)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자신을 거울 앞에서 세우지 마시고 십자가 피 앞에 세워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9강-스바냐 2장 12-15절(경로변경)2304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2장 12-15절까지입니다.
스바냐 2:12-15
“구스 사람아 너희도 내 칼에 살륙을 당하리라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여기는 유다, 이스라엘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구스 사람에 미래에 대해서 나오고, 또 13절부터 앗수르 사람들, 앗수르 수도가 니느웨이니까 앗수르, 니느웨 같은 나라입니다, 니느웨의 파멸적인 최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하게 하시는가?’는 11절 또는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아 또는 유다야, 네가 그 주변 나라를 네가 상대할 생각을 하지 말라.’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이고 유다 나라 사람이라면 우리의 자존감 때문에, 우리 위신, 체면 이런 것을 고려하기 때문에 꼭 자기 힘으로 적들을 파괴시켜서 내 존재가 의젓해 보이고 싶은 그런 충동들이 우리에게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고로 남들 앞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은데 거기에 뭐가 섞여 들어가느냐 하면, 봐, 하나님 믿는 내가 대단하잖아요. 하나님의 대단함을 핑계 삼아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으스대고 싶은 그런 욕구가 이스라엘에게 있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을 보게 되면, 여기 구스라는 나라, 지금의 에티오피아에요, 이집트 밑에 있는 나라 그 에티오피아라는 나라나 앗수르라는 나라나 이 모두 멸망하는 데 있어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이 아무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관여한 것이 없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치시고, 구스도 치시고, 앗수르도 치시고, 하나님께서는 혼자 다 쳐버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괜히 하나님 믿는 민족이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나서지 말라는 거예요.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하고 한패 먹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 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사람 편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편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하고 편먹지 인간하고 편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인간인지라 하나님께 자기 쪽에서 찾아오니까 어느 인간인들 그런 착오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갑자기 하나님과 한패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하는 하나님 일을 적극 도와줄 것이고 그 와중에 하나님도 영광을 챙기지만 그 못지않게 우리 하나님 잘 믿는 나도 같이 영광 받을 만한 멋있는, 내가 원하는 승리감에 도취될 만한 그런 일들을 우리 눈앞에 목격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어느 인간인 들 왜 안 들겠습니까?
그런 쪽에서 보면 시편이라든지 그리고 선지서에 그 내용을 옹호해 주는 내용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수백 군데 나와요. 특히 시편 같은 곳에. ‘야곱아 너는 내 거야. 내가 너를 통해 영광을 받으리라. 그리고 너는 내 영광의 승리에 참여해서 너도 같이 영광 받으리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우리 이스라엘을 옹호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찾고 있었는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우리 이스라엘 하고 편먹어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했던 그 민족 그 유대 민족이 막상, 정작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을 때에는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 그 오류가 오늘날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 우리에게 어찌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이 이스라엘의 과오를 그대로 반복하는 겁니다.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착오를 일으키는가, 분석해봐야 해요. 그것은 ‘나는 무조건 옳고, 나는 무조건 정당하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뒤받침해 주실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옳다. 하나님이 옳으니까 하나님 믿는 우리를 옳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논리 구조, 순서가 그렇게 되거든요. ‘이 못난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도 의롭고, 나도 의롭다.’ 신약에 사도바울이 나오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 그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잘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의롭고 그래서 하나님 믿는 나도 의롭다. 그래서 이 내가 의로우니까 내가 하는 일, 하나님께서 내 위신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명예에 대해서 책임지고 보장해서 지켜줄 것이다. 세상 사람과 세상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를 높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것이지요. 성경 말씀에 거기에 나오니까요.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무엇의 착오를 일으키느냐 하면, 하나님이 옳으니 내가 옳다고 말로는 그렇게 순서를 ‘하나님 1번, 그다음에 2번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내가 옳으니까 하나님을 옳다고 본다는 그 0순위를 우리가 깜박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옳으신 분입니다” 하고 끄집어내게 될 때 그 전에 이미 ‘나는 옳다’는 생각을 우리는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옳으니 너도 의인이고 하나님 믿는 너를 내가 지켜주겠다.’라는 이 모든 말씀은 어떤 경우에만 성경에 합당하느냐 하면, ‘내가 옳지 않다’를 출발점으로 하는 사람에게만 이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성경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에요.
시편에 보면 ‘내가 너를 지켜줄게. 야곱아 네가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버림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적용되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아 마땅합니다.’ 하는 생각을 예수님 빼놓고 이 세상 어떤 인간도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에요. 성경 말씀은 예수님하고 상관이 있는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이 ‘에티오피아, 구스, 그래 이 구스 사람들? 이 이방민족 죽여야 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뭐냐 ‘앗수르, 이 잘난 민족, 우리 하나님이 작살내야 해.’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이 본문을 보면서 ‘역시 우리 하나님 잘 하십니다’ 할 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거기서, ‘우리’ 좀 빼주면 안 되겠니? ‘우리 하나님’에서, 그 ‘우리’라는 말에서 네가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왜 네가 몰라?”
그러면 이 말씀을 왜 주셨는가? 이 앗수르가 멸망하고, 구스 이 나라가 멸망할 때 멸망할 이유를 찾아야 해요. 사람들은, 내가 아니면 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내가 아닌 자가 망해버리면 대리적인 어떤 카타르시스, 기쁨을 느껴요. 누가 망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자기 아들 유치원 운동회 하는데 자기 아들 달리고 자기 아이 친구들도 같이 달리기할 때 앞서가던 내 자식 친구가 1등 하다가 자빠지면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끼는 거예요. 자기 아들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고구마 하나 들고 ”이때다! 하나님이 주신 찬스다! 이때다! 1등 해서 공책 타야지!” 요새는 아니고 옛날이야기입니다만, “너 연필 한 자루 받는다. 공책 하나 타야지!” 네모 칸 친 노트 있잖아요, 네모 칸 노트. 옛날에는, 나 때는 그랬어요.
사람이 사는 재미,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 망하고 남 아주 웃음거리 될 때 그것에 새록새록 사는 재미가 나잖아요. 여자 연예인이 음주운전 해서 걸릴 때, 그런 소식이 온 국민을 즐겁게 하잖아요. 저게 왜 망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무조건 내가 아니기에 망하는 게 마땅하다는 이런 의식과 사고방식, 이런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고 하나님 믿는다고, 예수님 믿는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놓고 ‘하나님 내 편이다. 성경에 나오거든!’ “이스라엘아 너는 내 것이라.”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고요. 이방 민족이 망한 이유가 나옵니다. 이 구스라는 것을 힌트로 삼아서 찾아보겠습니다.
에스겔 29장 9절에서 10절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여기에 왜 구스와 에굽이 나오느냐, 구스는 10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와 네 강들을 쳐서 애굽 땅 믹돌에서부터 수에네 곧 구스 지경까지 황무한 곧 사막이 되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구스라 할 때는, 에굽을 합쳐서……, 그 당시에 에티오피아가 에굽나라와 동맹 관계에 있었거든요. 구스를 친다는 것은 에굽을 칠 때 구스, 에티오피아 그 나라도 같이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구스 나라가 오늘 본문에서 왜 이렇게 멸망 당했는가? 이 멸망 당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이유도 없이 때리지는 않는데, 이유가 있다 이 말이죠.
이유가 뭐냐 하면, 교만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앗수르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와 앞에 교만했다는 겁니다. 자만심을 가졌다는 겁니다. 스바냐 2장에 그게 나옵니다. 15절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중심을 보거든요. 어떤 마음가짐을 보느냐?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이가 없다.’ 이렇게 하신 거예요.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하신 겁니다.
자, 국가는 무엇이냐? 특히 이방 나라를 말하는 겁니다. 국가가 뭐냐? 국가는 모든 백성을 평균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러한 시도가 있는 조직체가 국가예요. 국가의 백성, 오늘날은 국민이라고 하지요, 시민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국가의 국민이나 옛날의 백성들이나 그 국가라는 조직체에 무엇으로 자신이 끼어 들어가려 하느냐면 평균화된 모습으로 끼어 들어가려 하는 겁니다.
국가가 국민들을, 국가가 백성들을 모을 때 평균화시켜서 모으고, 거기에 호응해서 백성들도 평균화되어서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좀 어렵습니까? 그러면 더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뭐냐? 한 국가 안에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톡톡 쏘는 가시 같은 이 자아를 잊어버리고 그 국가 안에서 자기를 평균화시킨다는 말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 동질화시킨다는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스트레스받고 괴로운 것은 뭐냐? 그 사람과 내가 경쟁해야 하고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 차이 나는 그 점이, 이웃 사람하고 인사만 해도 그게 하나의 괴로움으로 다가오거든요. ‘내게 없는데 왜 저쪽에 있지?’ 이렇게 차이가 나잖아요. 그런데 이 국가는 이렇게 균등화시켜요. 개인적으로 타인과의 만남에서 ‘차이 남’에서 오는 마음의 괴로움을 국가가 나서서 균등하게, 동질하게 만들어버리면 좋은 이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좋은 이웃은 경쟁을 완화시켜요. 경쟁을 완화시키면 ‘그때부터 네 사는 꼬락서니 내 사는 꼬락서니 똑같다’ 하면 여기서부터 더불어 사는 안정감과 평온함을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외국의 캐나다나 미국에 이민 가면 잘 적응 못 하지요. 동양인이 외국에 나가면 잘 적응 못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만나지요. 그러니까 한국을 떠나도 작은 한국들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를 중심으로 작은 한국들을. 왜? 타인과 싸운다는 것이 피곤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자도 말하기를, 될 수 있는 대로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왜? 적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힘들어서 그래요, 힘들어서.
층간소음 나더라도 대충 좋게좋게 해서 친하게 지내면 좋은 말로 해서 완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원수라고 해서 망치 들고 올라가지 말고 좋은 말로 사람 친하게 지내면 내가 이익이에요, 내가. 경쟁을 완화시키니까요. 조금씩조금씩 더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면 이제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경쟁해야 할 대상들이, 그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지요.
그러면 숫자가 줄어들면 내가 경쟁한다는 말은, 내 행동과 생각을 움츠려야 되는데 다들 같은 생각 하고 있으면 어느 낯선 자리에서 어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사람들과 편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럼 나에게 이익이고 삶의 부담이 적어지지요. 그걸 가지고 흔히 아는 표현으로, 사람이 사회성이 좋아지는 겁니다. 성격 좋은 거예요. MBTI 그 심리 현상에 보면 현실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두루두루 사람 좋게좋게 지내는 거예요. 튀지 않고, 톡 쏘지 않고. 사람 좋다 소리 들으면 결국 그 이익은 나에게 돌아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국가라는 겁니다, 이게 국가. Nation이죠. State라고 하는 것은 민족, 혈통 중심이 강렬하지만 국가는 그 혈통보다도 법적으로 동의가 되는 사람들의 연합체, 공동체, 이게 국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국가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교만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교만하다고.
왜 교만하다고 하느냐 하며, 그게 이사야에 나와요. 오늘 본문 15절에 나오는 말씀, 다시 안 봐도 되지요, ‘천하에 나밖에 없다.’ 이걸 누가 이야기한다고요? 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체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앗수르 나라 전체가 균등하니까, 동질하니까 생각들이 다 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다 묵인하고 동의한 단체가 되는 겁니다. 앗수르가.
그렇게 했을 때 그 앗수르를 인수인계받는 나라가 바빌론 나라에요. 바빌론 나라에서 왜 그것이 교만한가의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이사야 47장 10절에서 11절, 8절부터 보시면 더 좋을 텐데, 이사야 47장 8절부터 제가 빠르게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치하며 평안히 보내고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아까 스바냐 본문에서 나오는 2장 15절 같은 말씀이지요. 여기서 바빌론이 이런 교만을 가지고 있다는데 이 바빌론 선배가 앗수르에요. 생각을 같이 인수인계 받은 겁니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이제 정답은 11절에 나옵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이게 교만이에요. 근본을 알지 못했다. 이게 교만입니다. 온전히 앗수르 나라의 멸망에 관해서만 예언한 선지자가 나훔 선지자입니다. 나훔 3장 1절에 보면 “화 있을 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 도다.”
그 다음 2, 3절에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인간들의 집합체가 국가인데 이 교만한 국가의 실내용,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뭐냐 하면, 파괴될 때 나는 소리로서 뭉쳐진 조합이라는 거예요. 파괴될 때 나오는 소리. 파괴 소리를 울리기 위한 그러한 악기 종류, 쨍쨍거리는 칼 소리, 파괴를 위해서 뭉쳐졌다는 사실을 너희 인간 국가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 국가들이 뭉치게 만들어서 거기서 ‘우리밖에 없고, 우리는 나밖에 없고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건방지고 교만한 일을 하는 이유는, 그런 국가를 때릴 때 나오는 소리 있잖아요, 멸망하는, 파괴되는 모습, 그 모습과 파괴시키는 그 당사자로서 여호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점점 어려워져요.
자, 구약에서 하나님 편에 누가 속했느냐? 이스라엘이 속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쳐버립니다. 이스라엘을 쳐버리지요. 이스라엘을 쳐버리면 그 다음 남아 있는 것, 아까 말한 구스, 에티오피아와 앗수르 쳐버립니다. 그리고 이사야에서는 바벨론을 쳐버립니다. 앗수르를 인수인계받은 바빌론을 쳐버려요.
그렇다면 이 국가라는 것이 형성되도록 왜 하나님께서는 방치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처맞을 인간 뭉치가, 그 조합이 필요했던 거예요. 때릴 때는 소리가 나야 해요. 파괴되는 소리.
다시 이사야를 보겠습니다. 그 파괴되는 소리가 원래 하나님의 속성 안에 들어있어요. 이사야 48장 11절에,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했다고 라고 되어있어요. 자, 여기서 한번 정리하고 들어갑시다. 인간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근본, 인간의 근본을 경유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물론 악마가 그걸 막죠.
인간들이 아무리 높고높고, 생각을 많이 하더라도, 아무리 모든 사치를 하고 모든 걸 다 가지고 권력을 쥐고 있어도 인간은 그 가지고 있는 권력과 사치, 그것으로 인하여 근본으로 나아가는 그 경로를, 본인의 건방짐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어요. 근본도 모르면서 너무 풍족하게 사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뭐냐? 교만인 거예요.
이유는 근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답답할 거예요. ‘그렇다면 근본이 무엇이냐? 무엇을 가지고 근본이라고 하는 거냐?’ 이렇게 궁금해하실 겁니다. 그럴 줄 알고 제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을 펼쳐드립니다. 자, 천국은 무엇이냐? 천국은 요한계시록 21장 22절과 22장 2절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만인가? 무엇이 지옥이냐? 지옥은 어린양,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반드시 희생당한 거예요, 희생당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보호가 없는 곳, 어린양이 중심에 있지 아니하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천국은 뭐냐? 희생당한 어린양이 있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다예요. 천국까지 이르지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한패다.’ 이게 다예요. 거기에 무슨 희생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죽임을 당한 하나님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오직 이스라엘 자기가 행복하고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요. 이방 나라처럼.
이게 어떻게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다닌다는 저와 여러분들의 노림수 아니겠어요? 우리는 내가 행복한 걸 천국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안 아프고,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하고, 어떤 집안을 수리해도 수성페인트만 칠해도 되고, 냄새나는 유성페인트 안 발라도 되고, 실수도 안 하고, 그렇게 모든 만사가 하자 없이 이루어지는 걸, 불편 없이 사는 걸 우리는 그것을 천국 개념의 대용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잘못인 거예요. 그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위해 멸망되어야 할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잘 될 때 하나님이 내 편이라서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그 구절을 막 찾아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막 찾아요. 문제는 그 말씀이 우리를 공격하는 말씀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너는 근본에 가본 적이 있느냐? 근본악에 우리가 터치를 해야 해요. 근본악, 근본에는 근본악이 있고, 근본의가 있어요. 우리는 근본악에 터치를 해야 근본적인 하나님이 의롭다 하듯이 우리도 의인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빠지고 지식으로 구원받는 방법은 없어요.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경로 변경’이라고 짓고 싶습니다. 구약에 경로 변경을 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욥입니다. 욥은 1장부터 31장까지 3명의 친구들에게 싸여서 계속해서 공격받습니다. “네 죄를 알렸다.” 욥은 말합니다. “내가 내 죄를 알 수가 없다.” 친구들은 말합니다. “네가 죄 있기 때문에 벌 받았잖아.” 욥은 말합니다. “나는 죄 없이 벌 받고 있다.”
이게 대화가 안 됩니다. 욥기 31장 35절에서 36절에 보면 욥이 너무 답답해서 이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찌니라.” 내가 변호하는 걸 들어봐라, 이거예요.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곧 “내 잘못을 적어서 소송장을 나에게 준다면 내가 ‘아, 이런 잘못을 지었구나.’ 하고 내가 아예 공개할 게. 나는 자신만만해. 그 정도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어.” 36절에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겠다. “내가 이런 잘못한 것이 있다고 누가 고소해주면,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떠벌일 게. 너희들도 내 잘못을 찾아내지 못하고, 나도 아무리 훑어봐도 잘못이 없다. 그러니 나에게 이 고난 준 하나님의 조치는 뭔가 잘못됐다. 행정적인 무슨 미스가 있다.”
그렇게 하니까 32장 1절에서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드디어 네 번째 엘리후라는 친구가 노를 발하며 등장합니다. 2, 3절에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가 말을 못 한 것은 세 친구 모두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잘났다고 하면서 욥을 지적하려고 덤벼든 거예요. 세 친구나 욥이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모습인가가 아니라 내가 생각한, 내가 규정한 내 앞에서 나는 어떤가를 늘 매일 같이 심사숙고하며 살아왔던 거예요. ‘이만하면 어때?’ 거울 보면서. 경로 변경이 안 된 거예요. 근본악에 도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근본악에 가는 방법은 욥에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직접 나타나죠. 38장에 보면 직접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직접 폭풍 가운데서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 2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야! 도둑고양이가 지하실에서 몰래 있을 때 주님께서 후레시를 들고 나타나서 “여기 숨었네?” 갑자기 어두 깜깜한 곳을 후레시가 환히 비추면서 “여기 숨었네? 이 도둑고양이.” 이렇게 비치는 식이에요. 근본악은 우리는 못 찾아갑니다. 악마가 가로막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잘남부터 출발하는 생각이 우리 생각이에요. 그런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망했고, 모든 인간이 다 망했어요. 욥도 망하고, 다 망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온 거예요. 무엇을 가지고? 십자가를 가져오신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 아들도 죄인의 취급받은 그 지점이에요. 근본악입니다. 터치한 거예요. 근본악에서 비로소 지금까지 연결된 모든,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는 이 경로가, 죽음보다 먼저 있는 죽음에 미리 터치하는 그것이 근본악이에요.
이래서는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니까 마태복음 2장 12절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0-12절 이 대목은 동방박사가 예수님에게 몰약과 유향과 황금을 드렸던 그 대목이에요. 11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 다음 12절에 보세요.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왔어요. 별을 따라 왔는데 별이 어디서 스톱이 되었느냐 하면, 예루살렘 상공에서 멈췄어요. 예루살렘에서 별이 스톱되었으니까 아직까지 예수님 태어나신 곳에 도착을 못 했어요.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데, 거기서 물으면서 헤롯왕을 만나게 됩니다.
헤롯왕께 물어 베들레헴이라는 곳을 알아서 출발하니까 다시 사라졌던 별이 베들레헴으로 인도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헤롯이 동방박사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을 동방박사가 알 수가 없어요. 그렇데 헤롯은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죽여 버려라. 죽여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동방박사가 헤롯을 만난 것은요, 동방박사가 죽어야 해요. 순서가 동방박사가 죽어서 그다음에 아기 예수를 만나야 해요. 예수님을 죽였던 헤롯, 유대 민족의 왕, 그 유대민족의 왕을 경유해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이유 때문에 동방박사는 미리 죽어야 해요. 자기 죽음, 헤롯에 의해서 미리 죽어야 하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헤롯이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무사히 돌아갔다는 것은 이미 죽었던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더불어 그냥 죽은 채로 돌아간 거라 보시면 돼요. 나중에 혹시 알겠지요. 하나님이 왜 꿈에 나타났는지 이유를 알겠죠. 만약에 꿈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동방박사 죽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아기 예수는 우리를 죽여 놓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경로가 바뀌었어요. 내 인생 경로가 살았다, 살았다, 별 보고 따라왔다, 살았다, 살아있는 내가 별보고 따라왔다, 할 때 그 별 보고 따라온 것이 아니고 동방박사는 자기가 죽어야 할 그 죽음, 미리 먼저 죽는 죽음을 경험하라고 하나님께서 별로 동방박사를 아기 예수 쪽으로 유도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십자가로 가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이 경로, 인생경로로서는 절대로 내 중심에 어린양이 중심이 되는 천국 백성이 되지를 못합니다. 살아있는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구원이 안 돼요. 그걸 오늘 본문을 통해 스바냐 본인은 뭐라고 하느냐?
내가 살아있을 때는 내가 의미가 있어요.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의미가 돼요. 그러나 십자가는 무의미한 곳이에요. 근본악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만 의미 있고 우리는 무의미함을 알려주는 그 근본, 그 근본을 구스도 몰랐고, 에굽도 몰랐고, 바벨도 몰랐고, 앗수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 멸망한 거예요. 어떻게? 황무지로. 의미 있다고 우겼던 그들의 나라의 공간이 아무 짐승들이나 사는, 인간은 살지 못하는 무의미한 공간으로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내리신 겁니다. 무심한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들이. 앗수르 백성들, 바벨론 백성들, 에굽 백성들, 구스 백성들, 오늘날 아~대한민국 백성들.
왜 그것이 교만 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의미가 없는데 자꾸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사니까그게 뭐로 나왔다? 하나님 앞에서? 그게 교만한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 앞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앞에서 우리는 내 중심처가 빼앗겨야 돼요. 왜? 그곳이, 어린양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어린양이 중심이 되지 않는 곳은 저주받을 지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무의미를 심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일찍부터 천국 백성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뭐냐? 우리가 만나고 만나는 이 대한민국 사람들, 그리고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했던 앗수르, 바빌론, 구스 이런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왜 그들이 망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부터, 왜 우리나라부터, 하나님이 내 편 먹었다는데 왜 그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쳤느냐, 왜 멸망케 하는가의 그 이유를 그들은 미리 접수한 것이 그들에게 복된 거예요.
왜냐하면 망해도 이유를 알고 망해야 해요. 적들, 이방 민족들, 안 믿는 사람 망하는 것, 이스라엘 망하는 것, 우리 망하는 거 똑같습니다. 의미도 없는데 의미 있다고 우겼던 것, 그게 우리에게는 교만으로 작용한 겁니다. 그 교만의 내용이 이사야 14장 12절에서 15절까지 나오는데 이 구절은 꽤 유명한 구절이므로 제가 후딱 읽겠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 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하늘의 별을 보고 있는 사람이 ‘별 하나 나 하나’ 헤아리겠지요. 왜 헤아립니까? 저 별이 의미 있듯이, 지금 별을 보고 있는 내가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교만이라 하고, 이 교만은 모든 인간세계, 아담 후손 세계에 다 확산돼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이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망하고 이방 나라 다 망하는 겁니다. 무엇으로서? 십자가로서. 십자가 달린 예수님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 오실 때에 십자가를 목표로 해서 태어나신 분이에요.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죄인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버림받은 거예요.
그게 근본악과 더불어서 근본의와 접촉되는 그 지점이었습니다. 근본악으로 들어가서 근본의, 근원적인 의인이 되신 거예요. 그 십자가.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국가 안에서 어떤 평균을 통해 나의 삶의 불편함을 없애고자 하는 이 자체가 아직도 나 자신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적인 행위라 하는 것을 우리는 깜짝 놀라며 발견하죠.
물론 이 깜짝 놀람은 성령을 받아야 깜짝 놀라죠. ‘그건 뭐 당연한 거 아니야? 하나님 믿으니 하나님 내 편 되지.’ 이런 교만을 떨고 있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데! 의미는 우리 속에 들어온 예수님에게만 의미 있어요. 우리는 의미를 위한 껍데기, 껍질에 불과한 겁니다. 왜? 천국은 어린양 중심이기 때문에. 천국은 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신 전체 내막을 저희들이 꿰뚫어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계심으로써 십자가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죄인이 의인됨을 깨달았다면 이제부터는 내 안에 주님만이 십자가만이 중심이 되고 그것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늘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앞에 자기를 세우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