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 & 기타(이근호)/지옥의 하나님(대구강의)

공포의 지뢰(사도행전 17:25) / 230403 / 비극과 공포(에베소서 6:12)

정인순 2023. 4. 3. 12:39

음성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4 - 비극과 공포의 차이

23,04,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사도들이 증언해주는 '주의 전쟁' !!

오늘은 교재 10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제목이 '사도들이 증언해주는 주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는데, 사도들이 주의 전쟁을 했다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온다는 겁니다. 6장 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말이죠.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것은 "이 세상 전쟁은 혈과 육의 전쟁이다" 라는 의미인데, 즉 자기 육을 지키기 위한 전쟁, 그게 이 세상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사도들의 전쟁은 무엇인고 하니, 혈과 육이 아니고,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즉 공중권세를 잡은 자들과의 전쟁이라는 것이죠.

* 세상 신 !!

이렇게 '나'와 '너'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인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그 가운데 '공중권세를 잡은 자'를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즉 '나'와 '너' 라는 것이 있고, 제3의 요소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세상 신' 이라고 표현하는데, 즉 세상 신이 있다는 것이죠.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게 인간의 모습을 하든 무슨 모습을 하든 간에 그런 세상 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그 세상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권세, 혹은 권력의 '파급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권력의 파급성으로 인해서 형성된 것을 두고 '세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세상 신의 권력이 퍼져나간 것이 곧 이 세상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마태복음 12장에서 시간으로 표현하셨는데, 즉 '세대'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이 세대 VS 오는 세대 !!

그러면 싸움이라는 것을 시간적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보면 '나' 라는 존재, '너' 라는 존재, 그리고 제3의 존재,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시간적으로 보면 무엇과 무엇의 전쟁인고 하니, 이것은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초반부터 조금 어렵게 해보면, '이 세대' 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데, 즉 존재론적으로 보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러한 이 세상에는 세상 신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으니 그것과 싸워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과 16장에서 이 세대를 두고서 '악한 세대' 라고 하셨는데, 악한 세대인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나란히 대결구조로 간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시간과 시간의 싸움이 과연 어떻게 진행이 되느냐는 겁니다.

이 세대는 과거로부터 흘러나오는데, 이것을 두고 '역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역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겁니다. 둘 다 뿌리가 깊은데, 어느 것이 더 깊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역사가 깊은데, 인간의 역사가 미처 모르는 역사가 있다는 말이죠.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인간의 역사는 모르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 시간에, 인간 역사는 그 뿌리가 사실상 없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처음에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새 언약 !!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뿌리가 있는데,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누구와 의논을 하셨는고 하니, 자기 아들, 즉 예수님과 의논을 하셨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그것을 마지막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새 언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창세 전에 이미 그렇게 정해졌는데, 여기서 인간은 배제라는 겁니다. 즉 "인간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배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그 자리에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창세 전에 예정된 자를 주님께서 솎아내듯이 구원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내 구원에 내가 관여할 수 없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이것을 '왕따' 라고 하는데,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립학교에 그 학교의 이사장 손자가 다닌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손자가 성질이 더러워서 무슨 짓을 하는고 하니, 패거리를 지어서 아이들을 골라서 때리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요즘 '학폭'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얻어맞은 그 아이가 그 사립학교의 역사에 관여를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인간이 아니라 누가 관여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관여를 한다는 겁니다.

*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해 !!

성경책이 참 두꺼운데, 그래서 사람들이 이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언제 이것을 다 읽고 분석을 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러한데, 성령을 받으면 이 두꺼운 성경이,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처럼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면 이렇게 성경자체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역사 안에 들어간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누가 주인공이라는 겁니까?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이죠.

* 껍데기 인생 !!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껍데기로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내용을 예수님으로 채우는데, 이렇게 쭈글쭈글 늙어가는 우리의 모습은 하나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껍질이 내용이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물에 따라서 껍질의 모양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의 주인공이, 그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고 누구라는 겁니까?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러니 "성경이 두껍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은, 성경을 역사로 간주해서 탐구에 나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고고학적으로 어떻고, 생물학적으로 이게 맞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옛날에 아브라함은 어떠했고, 모세는 어떠했는가? 우리가 다윗도 알아야 하고 예레미야도 알아야 하고 다 알아야 한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 아바타 !!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몇 명이나 알아야 구원을 받느냐는 겁니다.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알아야할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으냐는 것이죠. 그러니 성경을 인간의 역사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아바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혹시 '아바타' 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결코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없는 영화인데,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는 겁니다(ㅋㅋ). 하지만 그 제목은 참으로 중요한데,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는데 유용하게 써먹으니 말이죠. 그게 페르소나, 즉 가면, 혹은 껍질이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안에는 누가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데, 그것이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즉 선지자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있어서 과거로부터 오는 이 세대, 이게 인간의 역사인데 말이죠.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역사란, 넌픽션을 표방한 픽션 !!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의 역사부터 먼저 설명을 해보면, 인간의 역사는 그 주인공이 누구라는 겁니까? 물론 인간이 주인공인데, 그런데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는고 하니, 그 시대에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역사를 창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는 소설과도 같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넌픽션을 표방한 픽션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팩트, 즉 진실을 표방한다고는 하지만, 결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는 허구라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일제의 35년 통치나 6.25 전쟁 등등, 모두가 다 창작이라는 겁니다.

* 네가 나를 알아?

여기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한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기존 역사관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데 말이죠. 즉 "인간은 100년 전의 비극을 지금은 모른다" 라는 겁니다. 왜 모르는고 하니, 100년 전의 그들은 이미 죽었다는 말이죠. 그 뒤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흉내를 내면서 그 상황과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그 당시의 아픔을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100년 전 그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창작된 세계관 속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네가 나를 알아?"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동시대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데, 왜냐하면 사고방식이 대부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말이죠.

* MZ세대 !!

물론 '세대 차이' 라는 것도 있는데, 예를 들어서, 1981년부터 2010년 초반까지 태어난 자들을 두고 'MZ세대' 라고 하는데, 이런 동일한 세대에선 서로 공감을 하면서 같은 단어를 주고받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분명히 어른들도 그 세대를 지나왔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미 지나가고 난 뒤에 남겨진 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세대만 매일같이 창작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게 되는데, 끊임없이 교육을 시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뛰어들라는 것인데, 그게 교육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릴 때뿐인데, 나중에 자의식이 생기고 독립을 하게 되면, 자식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아버지의 인생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따로 논다는 것이죠.

* 타인을 타인을 몰라 !!

그런 면에서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인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노는 그룹에서는 교회에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식이고 부부사이라도 하더라도 타인인데, 그 타인은 타인을 모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100년 전의 비극을 지금은 모른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고 비극이었다" 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느낌은 모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각각 그 시대에 자기들이 창작을 하기 때문에 말이죠.

* '이 세대'는 '오는 세대'를 모른다 !!

이것은 조금 어렵기는 해도 우리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역사 속에서 '모른다' 라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정말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점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대는 오는 세대를 모른다" 라는 것인데, 세대차이가 나서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세대가 오는 세대를 모른다는 것, 이게 진짜 문제라는 말이죠.

아까 에베소서 6장에서 '이 세대'를 '이 세상' 이라고 했는데, 그런 이 세상은 어떤 상태에 놓여있다는 겁니까? 세상 신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곧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만들어낸 역사 속에 인간은 그만 갇혀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22장을 보겠는데, 31절과 32절입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사단과 베드로의 관계는?

31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라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시몬은 베드로인데, 그렇다면 이 베드로의 경우에, 사단과 베드로의 관계가 어떻다는 겁니까? 악마는 계속해서 베드로를 통제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베드로는 그 통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가 "나는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른다는 말이죠. 이게 오늘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그러면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악마에 갇혀있다는 것을, 즉 "이 세대의 신은 악마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아느냐는 말이죠.

그들은 이것을 모르는데, 역사학자들이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철학자들이 모르고, 고고학자들이 모르고, 물리학자들이 모른다는 말이죠. MZ세대가 이것을 모르는데, 그리고 요즘 아주 잘 나가는 오은영 박사도 이 세대가 악마에게 붙들려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죠.

그들이 하는 것은 이 세대 안에 갇혀서 자기들끼리 하는 것인데, 일종의 당근마켓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것인데, "지니야, 노래를 틀어 줘요" 라고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죠. 물론 요즘 'Chat GPT' 라는 것 때문에 난리인데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즉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 그러한 인간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고 한다는 겁니다. 일단 이 부분은 접어놓으시고, 여기서 사도행전 2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오순절 성령 !!

지금 오순절에 새롭게 편성된 12명의 제자와 120명이 모여있는데, 여기에 하늘에서 불의 혀와 같이 것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는 겁니다. 뜨겁다는 것이 아니고 그 모양이 불꽃과 같다는 말이죠. 그것이 각 사람에게 내려왔는데, 그게 바로 '성령' 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오순절에 성령이 오니 어떻게 됩니까? '오는 세대' 라는 것은 미래로부터 이미 완료된 것인데, 그러니 어떤 희망을 이야기하는 차원이 아니고, 이미 완료라는 말이죠. 반환점을 돌아서 이미 결승선에 도착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오는 세대의 상황이 성령을 통해서, 이 세대에 속한 '12명+120명'에게 그대로 쏟아졌다는 말이죠.

* 악마의 파급성 !!

그렇게 오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제가 강의초반에 '파급'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혹시 기억이 납니까? 인간 역사란 무엇인고 하니, 신이 있는데 그 신은 악마라는 겁니다. 그 악마의 영향력이 파급된다는 말이죠. 옛날에 월남치마라고 넓게 퍼지는 치마가 있었는데, 그렇게 악마의 영향력이 퍼져있다는 겁니다.

이 세대에는 신이 있고, 그게 MZ세대든 무슨 세대든지 간에 악마의 정신이 모두 파급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거기서 자기 역사를 창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찬란한 오천년 한 민족의 역사라고 자랑을 해도, 그것은 무엇의 파급성이라는 겁니까? 월남치마 안에 모두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퍼져도 그것은 인간의 시간, 즉 인간 역사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오는 세대가 아닌 이 세대에 속해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 세대에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의 아이디어로는 도저히 포착해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을 '구속사' 라고 하면서 해석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이지 하나님의 역사는 아니라는 말이죠. '언약사' 라고 해도 역시나 인간의 역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대결구조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 세대에 그만 구멍을 내버린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전쟁이 터져서 어떤 아파트에 미사일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아파트는 그만 잿더미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이 이제는 무의미하게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아무리 인간들의 역사가 어떻게 저떻고 해도, 그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죠.

* 성령의 오심은, '비극' !!

그러면 주님의 영인 성령을 받게 되면, 12제자와 120명은 졸지에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간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보면 비극인데, 그리고 이 비극은 예수님의 비극, 즉 십자가 비극의 재현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이 바로 오는 세대에 속한 증인들이라는 겁니다.

제가 방금 '비극'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일단 인간의 역사에서는 비극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이 '비극' 이라는 용어를 바꾸어보겠는데, 그러면 여기서 또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4장 14절을 보겠는데, 그리고 나서 아까 설명하지 못한 누가복음 2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베드로전서 4장 14절을 크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복인가? 비극인가?

여기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욕을 얻어먹는다는 것이 비극인가요? 희극인가요? 개인적으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게 스데반 집사의 가족이나 친척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누가 봐도 비극이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가 어떠하다는 겁니까? 복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 자가 복이 있는 자라는 겁니다. 또한 이것을 우리가 납득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미사일이 떨어졌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대에 속했다는 겁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인간들의 세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죠. 악마가 우리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

그러니 우리는 기껏해야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라고 하는 교육정도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해도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자기 하나를 희생해서 민족과 국가를 살리는 영웅이 되는, 그 이상의 수준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청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 외부강사가 와서 교인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이 젊은이들이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잘 성장하도록, 여러분이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책무이고 책임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하게 되면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마약을 하다가 길거리에 쓰러지게 해주세요" 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크게 쓰이는 일군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 사고방식인데, 즉 악마가 신이 되어있는 이 세대에 기여할 수 있는, 그래서 남들에게 성공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내용의 교육을 목사들이 교회에서 헌신예배를 빙자해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갈 때는 반드시 차비를 받는데, 공짜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마귀의 생각임을 누가 감히 알 수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국가와 민족과 교회가 잘 되는 것은 곧 마귀가 잘 되는 것인데, 그러니 그냥 폭탄을 맞아야 한다는 말이죠. "나, 없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는 존재는 실내용은 없고,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말이죠.

* 걱정이 늘어지는 50, 60대 !!

나이가 50대에서 60대로 가면 걱정이 늘어지는데, 주로 여자 분들이 그러한데 말이죠. 그러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친정 아버지와 친정 어머니의 나이가 90이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분들이 일찍 돌아가시면 복을 받은 것이고, 요즘은 90이 넘어도 살아있는 분들이 있다는 말이죠.

얼마 전에는 90이 훨씬 넘어도 쨍쨍하셨다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축하해드린 일도 있었는데, 정말로 축하할 일이라는 겁니다. 60이 넘어가면 자기 몸도 가누기가 힘드는데, 그래서 이제는 성경공부도 좀 하면서 자식들의 수발을 받고 싶은데, 그런데 그런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자기가 수발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수발을 해야할 분이 아직도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픈 몸을 이끌고 그분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만 하는데, 굳이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내가 어른을 돌보지 않으면 얼마나 나를 욕할까?" 라는 것이 자기 몸에 배여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나의 역사'가 들어있다는 것인데, 그런 '나의 역사'를 누가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게 바로 악마라는 말이죠.

* 나의 역사는 악마와 싸운 적이 없어 !!

아직도 자기가 껍데기가 아니고 아바타가 아닌데, 즉 "나는 나답다" 라는 것을 꾸준히 평생을 자기가 좋은 것만 골라서 자기 안에 알곡으로서 채웠다고 하는, 그런 티를 그냥 내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남들이 자기를 욕하는 것과 싸웠지, 마귀와는 싸운 적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데, 물론 베드로전서 4장 14절도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 이름으로 욕을 얻으면, 그것이 복을 받는 자다" 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이미 말씀하셨는데, 11절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러니 복을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이 세대에 갇혀있으면서 오는 세대의 미사일을 맞아서, 자기가 고이 간직한 내용물이 폭파될 때, 즉 잘나고 싶은 '나'가 완전히 박살이 날 때, 그것은 비극이 아니고, 그게 주님에게 꿀밤 폭탄을 맞은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복이라는 겁니다.

이제 누가복음 22장으로 돌아와서, 31절과 32절입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는 평소에 수제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우쭐거렸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는 악마의 권한에 놓여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악마는 베드로의 정신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우리와 동일한데, 베드로도 아담의 후손이고 우리도 아담의 후손인데, 그러니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악마에게 갇혀있는 베드로 !!

그런데 여기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렇게 베드로가 있다고 하면, 이 베드로는 누구에게 갇혀있다는 겁니까? 악마에게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런 베드로이기에 그야말로 자기 허세가 대단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 33절에 보면, "제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곳에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런 소리를 할 때는, 즉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것, 그것이 마귀가 자기 존재를 감추고 나온 말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악마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은데, 그 출발점을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라고, 즉 "나'로부터 시작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가 껍데기가 아니고, 자기 안에는 '나' 라는 본질이 들어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이 일을 누가 하지?" 라고 하면, 우리는 "예, 제가 하겠습니다. 그 느낌을 아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배제한 겁니까? 이 세상 신이 자기에게 파급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허세와 객기를 부리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 자기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때, "교회에 나오면 천국에 간다" 라고 했을 때, "내가 갈 게" 라고 했다면, 그런 용기와 결단, 그 출발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자기 의지로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여전히 악마의 권한 아래에서 뺑뼁이를 돌고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 이미 완료된 '오는 세대' !!

그래서 동그라미 속에 우리가 이렇게 놓여있다면, 여기에서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리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대, 혹은 이 세상은 어디에 포위가 되어있다는 겁니까? 그게 오는 세대, 이 오는 세대는 완료형인데, 즉 이미 다 이루어서 끝이 났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 그것은 오는 세대에서는 이미 다 결정이 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책에 속한 명단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합격자들의 명단이라는 말이죠. 이미 그 결과물이 나와있는데, 합격을 했다는 것이죠.

제가 이런 짓은 잘 하지 않는데, 한번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었으면 다 잃어도 상관이 없다" 라는 것인데, 다 같이 하겠습니다(ㅋㅋ). 이빨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흔들거려도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군사이고 예수님의 군사라는 겁니다.

* 주님의 기도덕분에 !!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영생이 있는 쪽에서 악마에게 속한 우리에게 미사일을 발사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누구의 기도덕분인고 하니, 그것이 주님의 기도인데,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기도덕분이라는 말이죠.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매일같이 다듬고 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면, 그것을 매일 해체시키는 것이 곧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즉 "네 것이 어디에 있는데? 그런데 왜 네가 다듬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사람이 자기 것이 있게 되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거기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즉 "나는 착실한데 남들이 착실하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최근에 자살한 사람들이 참 많은데, 자살은 자기가 어른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어른이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자립적이라고 생각하니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는 말이죠.

* 자립과는 거리가 먼 '어린아이' !!

그래서 어린아이는 자살을 하지 않는데, 어른들에게 맞아서 죽었으면 죽었지 자기가 스스로 죽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속해있는 세계가 아무리 조폭의 세계라고 해도, 그 아이에게는 그 세계가 아름답고 자유롭다는 말이죠.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한데, 그게 어린아이라는 것이죠.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마태복음 18장에선 12제자라는 어른들을 앞에 두고 누구를 내세웁니까? 어린아이를 앞세워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소위 어른스럽다고 우기는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어버립니까? 우리를 어린아이로 만드신다는 말이죠. 어린아이는 마냥 좋고 마냥 기쁘고,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숙제가 없기 때문인데, 즉 율법의 그 어떤 책임도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모든 부담에서 면제인데, 이것을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값없이 영생을 얻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내가 너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런 주님이라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값을 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 모든 부담에서 면제 !!

천국에 들어가는 비용을 요구하는 것은 목사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즉 "구원을 받았으면 값을 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봉사와 선교를 강조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구원을 받았으니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하든지, 그게 아니면 선교비라도 내야지"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요구를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로 대우는 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어른인 것처럼, 즉 어떤 일에 책임을 지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교를 요구하고 봉사를 강조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을 마치 주님이 요구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영생의 나라를 모르고 천국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오는 세대를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 세대에서 고상하고 건전한 것을 따로 만들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아니고 마귀가 만든 마귀의 작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마귀가 만든 마귀의 교회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누가복음 22장으로 돌아와서, 31절에서 34절입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닭과 베드로의 콜라보 !!

여기에 보면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다" 라고 하니,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3번 부인하고 난 다음에 닭이 울었는데, 그때 베드로가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닭이 운다는 것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겁니까? 베드로가 아니고 예수님인데, 그러면 닭이 우는 시점에 맞추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닭이 우는 것과 배신의 조합, 그게 누구의 파급된 영역 안에 있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예언하신 말씀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시나리오대로 닭과 베드로가 각각 역할을 분담해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어린아이인데, 즉 어른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어른은 따로 있는데, 그러니 베드로는 그 무엇을 하더라도 익히 주님이 알고 있는 행동만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심지어 아이큐가 그렇게 나쁘다는 닭마저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사실은 닭이 아이큐가 나쁘다는 것도 맞지 않는 소리이지만 말이죠.

* 인간보다도 못한 피조물은 없어 !!

인간보다도 못한 피조물은 없는데, 그래서 사람이 개를 키우는 것은 자기가 개보다 못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키우니 마치 자기가 어른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어른으로 폼을 잡을 기회가 주어지니 개를 키운다는 것이죠.

그래서 개 대통령에게 물어보면, 지나가는 사람을 그만 물어서 사고를 친 개의 경우에, 그 개보다도 주인이 더 나쁘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주인보다 더 나쁜 개는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모든 개는 다 좋은 개라는 겁니다. 갑자기 '개는 훌륭하다' 라는 프로는 홍보하는 느낌인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여기에서의 싸움은 주님과 악마와의 싸움인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안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두 가지 차이점을 몰라서 그러한데,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비극인데, 즉 "비극과 공포의 차이를 몰랐다" 라는 말이죠.

* 인간은 비극과 공포, 그 차이점을 몰라 !!

비극과 공포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논리대로 하면 너무 복잡하니 결론부터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한 것이 비극입니까? 공포입니까? 그것은 공포인데, 이 공포는 곧 전쟁이라는 겁니다. 전쟁은 비극이 아닌 공포인데, 그래서 "전쟁에 가담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괴물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전쟁이 없으면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고 하니, 자기의 비극을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 비극보다도 더 심각하고 더 참혹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포라는 말이죠. 비극은 슬픈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슬프다고 여기는 것은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 육체에서 비극으로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눈물인데, 그러니 운다는 것은 아직까지 살만하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약간의 여유 만만함이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릴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 울음조차도 그만 그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비극이 아니라 공포에 들어가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경직이 되고 마는데, 아직도 자아성이 남아있을 때는 눈물이 나온다는 말이죠. 반면에 공포라는 것은, 자기 자아가 뭉개지는 순간이란 겁니다. 그렇게 자아가 뭉개지면 인간은 그만 기계가 되고 마는데, 즉 기계란 인간성이 날아가 버린 상태라는 말이죠.

* 기계 인간 !!

그러니 괴물인데, 즉 싸움하는 기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은 견디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잔혹함과 잔인함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전쟁을 견딜 수가 있다는 겁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 거기서 군인들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눈물이 난다는 것은 그래도 평화롭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태원 사건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면 안타까워한다는 겁니다. 아프리카에 마실 물이 없다고 하면서 우물을 파는데 한 달에 천 원씩을 보내달라고 하면, 그러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어서 보내주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 이 세대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자아가 붕괴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자아가 남아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지고 남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들에게 동정을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는 숨쉴 만하다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아직까지 자기는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이 군에 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훈련을 받고 할 때는 연락이 오고 하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막상 전쟁터에 투입이 되었다고 하면, 그 아이의 엄마는 도저히 집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는데, 그래서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 주님은 제자들을 무슨 세계로 보내는가?

그게 바로 공포인데, 비극은 자기가 살아있지만 이 공포는 "나는 소용이 없는 존재다" 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무슨 세계로 보내었을까요? 그것이 비극의 세계일까요? 공포의 세계일까요? 그것이 바로 공포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공포를 피할까요? 접근할까요? 당연히 공포를 피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 피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바르게살기' 라는 겁니다. 바르게 살고, 남을 동정해가면서 착하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공포의 자리는 있는데, 그 주위를 맴돌면서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영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대충 눈치를 채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타협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정치인데, 그러니 사람들은 각자가 다 나름대로의 정치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 베드로가 경험한 세계는?

아무리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위해서 감옥에도 가고 죽기까지 하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공포로 보는 겁니까? 아니면 비극으로 보는 겁니까?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나왔는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갇힘과 죽음을 공포가 아닌 비극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베드로는 자아가 살아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리고 닭이 울었을 때, 그때 베드로가 경험한 것은 자신의 비극입니까? 그게 아니면 자기 자신의 존재감이 그만 날아가 버리는 공포입니까?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작전이었다는 것을, 즉 자기가 주님의 전쟁터에 투입되어서 알 수 없는 대상과 전쟁을 하도록, 그렇게 주님이 이끌어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베드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일곱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말고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그야말로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고기를 잡는 것 외에는 말이죠.

비극을 만드는 전쟁이 아니라 공포인데, 하지만 악마는 모든 인간에게 악마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인간역사를 쓰게 했다는 겁니다.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을 되풀이하게 하면서, 그래서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는데, 즉 "인생을 사는 것이 다 그런 거야" 라고 하면서, 마귀는 교회를 통해서 인간들을 달래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말하는데 "역사전체는 비극의 역사이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비극의 역사가 아니고 공포의 역사라는 겁니다. 하지만 왜 비극의 역사라고 합니까? 비극의 역사라는 것은, 다시는 그러한 짓을 하지 않음으로서 자기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과거의 것, 즉 역사를 배우게 한다는 것이죠. 자기 행복을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아까 베드로전서 4장 14절과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는 무엇을 복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것은 바로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것인데, 그것 이외에 다른 복은 없다는 겁니다. 즉 공포라고 하는 지뢰는 밟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말이죠.

다른 복은 다 거짓인데, 그런 것은 시간을 지연시키고 떼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극을 잠시 피해서 말이죠.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지. 우리 너무 슬픈 인생은 되지 말자"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챙기는 방법으로서, 교회에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고 한다는 겁니다.

* '오는 세대'의 생활방식 맛보기 !!

이제 강의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하는고 하니,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아바타, 즉 껍데기라는 겁니다. 어제 설교시간에는 그것을 흔적이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주님께서는 "이제 네 안에는 너의 애씀, 즉 너의 역사가 들어있는 게 아니고, 내가 네 속에 들어가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는 세대'의 생활방식이란 말이죠. 이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까지 강의를 이끌어왔는데, 오는 세대, 즉 천국인데, 그 천국이 미리 성령을 통해서 오순절날에 파급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살아있으면서 미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어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살아있을 때 오는 세대의 생활, 그것이 바로 천국생활인데, 이 땅에 살아있으면서 그 생활을 맛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오는 세대의 생활, 그게 천국생활이고 복된 생활인데, 그것이 인간역사에서는 무엇으로 반복되는고 하니, 그게 욕을 얻어먹는 생활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사고를 쳐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욕을 먹는 것인데, 그런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베드로전서 4장 14절의 말씀인데, 즉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보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함께 있는 생활인데, 이것이 바로 완료된 생활이라는 말이죠.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뿜뿜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값을 원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를 보고 무엇을 열심히 하라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천국생활, 그것을 이미 성령께서 그때그때 제공을 해주심으로서, 우리에게 꽉 차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특별히 무엇을 할 것이 더 이상 남아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데, 다만 우리 함께 있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면, 그것이 천국생활로서 바깥으로 '뿜뿜' 하면서 뿜어져 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7살 아이들의 생활영어 !!

그러면 이 천국생활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래서 제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미국에서 7살짜리 아이들이 하는 대화내용이라는 말이죠. 사실 우리 수준에는 7살도 과분하고, 3살 정도가 적당하지 싶은데, 그러면 여러분이 너무 기분이 나쁠까 싶어서 7살로 올렸다는 겁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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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잘못이야. - My bad.
* 나 그럴 줄 알았어. - I knew it.
* 너 멋져 보여. - You look great.
* 너 정말 못됐어. - You are so mean. (mean 못된, 얄미운)
* 딱 보니 알겠네. - I can tell. (tell 알려주다, 분간하다)
* 왜 못 오는데? - Why not?
* 소원을 빌어라. - Make a wish.
* 철 좀 들어라. - Grow up.
* 티가 나? - Can you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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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미국에서 7살 아이들이 하는 생활영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보면 이 7살짜리 아이들이 과연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어린아이들인데, 그들의 관심사는 이 세대에 번성하고 그것을 발산하는 것인데, 그래서 먹는 것, 이기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을 챙기는 것, 여기에 그 관심사를 두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 7살짜리 아이들이 어려운 경제용어 등에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데, 그러니 아이들이 자기가 품고 있는 그 세계를 꾸미지 않고, 보이고 느끼는 본능 그대로, 그것이 말로서 아주 간단하게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참 부러워. 너무 좋아!" 라는 식으로 말이죠.

* 예수님의 희생 !!

우리는 천국생활에서 어른이 아니고 어린아이인데,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의 천국생활에 있어서 간단하게 발산되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에 관한 것인데, 자기 희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이 감추어지지 아니하고 터져 나오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세대의 악마와 싸움을 하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예수님의 희생이 나오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마귀의 설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우리 열심히 노력해서 다같이 천국에 갑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세대에 갇혀있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베드로는 이 세대의 마지막 경계선에 접근 중 !!

베드로가 자기 자신의 권세의 종착점 향해서 달려가고 있으면서, 그가 뭐라고 합니까? "제가 주님이 죽는 것에 동참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의 결심과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베드로가 품고 있는 악마에게 속한 이 세대의 마지막 경계선에 접근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자기가 통제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베드로는 그게 마귀가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결심에 따라서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다 털리기 직전인데, 그러니 베드로는 아직 비극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완벽하게 망가지는 공포가 아니고 말이죠. 베드로는 아직 그러한 공포의 지뢰를 밟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놈이구나" 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죠.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니 지금 베드로는 의기양양한데, 다른 제자들을 보고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앞장서서 잘 섬기는지를 똑똑히 봐라" 라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고 있는데, 참 대단해 보이기도 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무엇이라 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그게 여기 교재 104페이지에 보면 "성경에서 사랑이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보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그러면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한 이야기냐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익인데,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가 도달하는 그 목적지에 '나' 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자기 행위의 그 결실점에 자기가 없는데, 그런 상태를 두고서 사랑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좋아해야 사랑인데, 자기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기뻐해야지,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죠.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인데,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모델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하는데,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면, 그러면 그 믿음의 후손들은 누구를 본받아야 한다는 겁니까? 당연히 아브라함인데, 마치 붕어빵을 만들어낼 때 보면 판에 찍혀서 똑같이 나오듯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상황이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역시 그대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로마서 3장에서는 '은혜' 라고 하는데, 행함의 반대말로서 사용이 된다는 말이죠.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렇다면 그 아브라함에게 어떤 절차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의 모든 것이 죽음에 함몰되고 만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남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나는 죽어도 자식만 살면 된다" 라고 하는 의식을 부수어 버리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다는 것이죠. 자기의 최종적 사랑을 말이죠.

그 작업이 바로 믿음의 작업인데, 그것을 어제 낮 설교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뽑아낸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부수고 박살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애버리는 그 믿음, 그것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 믿음을 없앤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의 자리에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이 찾아왔기 때문인데, 마치 미사일처럼 발사가 되어서 날아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과 자기 믿음이 교체가 되면서, 자기 믿음은 와르르 허물어진다는 겁니다.

* 믿씁니까? 믿씁니다 !!

기도원에 가면 강사가 통성기도를 유도하는 발언들을 하는데, 그때 하이라이트가 무엇인고 하니, 그때 'ㅆ'이 난무한다는 말이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씁니다. 믿씁니까?" 라는 식인데, 그러면 거기에 반응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믿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구하면 주실 줄 믿씁니다. 믿씁니까? - 믿씁니다!" 라는 것을 몇 번 반복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는 만세삼창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성부 성자 성령께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기도원에서는 난리가 나는데, 여기 저기서 "쭈여, 쭈여, 믿씁니다, 믿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렇게 기도할 때는 무엇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비극적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무엇이 중단이 됩니까? 자기 기도가 멈추어지게 되는데, 즉 "아하, 이게 내가 기도해서 될 문제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가 열심히 기도해서 자기 가정에는 불행은 저 멀리 물러나고 행복이 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도를 시도한 그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 그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마귀가 그 짓을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은 자기 하나 살려고 주님의 믿음을 언급했고, 자기 하나 살려고 주님의 소망과 주님의 사랑을 언급했다는 말이죠. "주여, 주여!" 라고 하면서 기도한 것, 그것이 다 자기 하나 행복해지려고 했다는 것을, 그게 다 마귀가 시킨 짓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 신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당했다는 것, 그게 자신의 종교행위로서 다 들통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 사도들의 당당함 !!

이런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사도들의 편지를 대하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느긋하고 당당했던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 그들은 일체의 그 어떤 주저함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들은 무섭고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이 교재에도 나오지만 여기서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이게 사도들이 설교한 내용인데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그 얼마나 자유롭고 당당한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사도바울이 아덴, 즉 아테네에서 한 설교인데, 22절과 23절입니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이미 범주를 벗어난 사도바울 !!

22절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라고 하는데, 종교성은 신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23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라고 하는데, 어떻게 사도바울이 이렇게도 당당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 설명해보면, 신은 인간들 위에 있는데, 그러면 신보다 더 높은 자가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얼마나 대담한 발언을 하는지 보라는 겁니다.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 그 신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해주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인간들이 기도하는 대상인 신이 있는데, 즉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을 한 울타리 안에서 묶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바깥에 있는 새로운 신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 범주, 그 개념의 안에 있다는 겁니까? 그 바깥에 있다는 겁니까? 바깥에 나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대범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여기 범주 안에서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는 신이 작용하는데, 그래서 인간은 비극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서 신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 요구하는 대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에게 행복한 일들만 생긴다고 여겼고, 그래서 마치 신의 몸종처럼 되어서 부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여기서 떠나버렸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여기 계속해서 사도행전 17장 24절과 25절을 보겠습니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너희들은 악마를 믿고 있어 !!

여기에 보면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과연 이 대목을 장로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기존 교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든 헌금이든 간에, 사람들이 바치는 것을 하나님은 일체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예배당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성경에는 분명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렇지요? 그리고 인간들이 말하는 신이 악마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25절에 보면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라고 하는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친히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 탓이요, 네 탓이요" 라고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주님이 시켰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여기 31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라고 하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심판의 증거를 주셨다는 말이죠.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핑계는 이제 그만 !!

그러니 이제는 오는 세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던지, 그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애를 쓰던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자기가 계속해서 애를 쓰면 지옥이고, 주님의 다 이루심을 받아들이면 천국이라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이미 그렇게 결정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분명히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을 이야기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니까, 목사님이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그런 것을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을 핑계거리로 삼지 말고, 지옥에 가는 것은 자기 탓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고 있는 줄로 압니다. 마귀가 우리를 훔쳐 가는 것을 주님께서 기도로 막아주셨음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의 부활하신 능력만 받아들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어른 흉내는 그만 내고, 이제부터는 어린아이처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